[미리 보는 덕성 100년사]대학문화의 꽃, 덕성 축제의 발자취
[미리 보는 덕성 100년사]대학문화의 꽃, 덕성 축제의 발자취
  • 오제연 성균관대 교수(사학과)
  • 승인 2018.10.23 14: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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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성인, 축제를 시작하다
  흔히 축제를 대학문화의 꽃이라고 한다. 축제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행사와 학생활동이 그 시대 대학생들의 생각과 경험을 집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덕성여자대학교(이하 덕성여대)도 마찬가지다. 매년 5월이 되면 많은 덕성인이 축제를 즐기며 대학생활의 낭만을 만끽한다. 그렇다면 덕성여대의 축제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또 오늘날 축제와 비교했을 때 과거 축제는 어떤 특징을 보였을까?

  <덕성여대신문> 1호를 보면 1964년 10월에 축제가 거행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이전에도 축제가 열렸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다른 대학에서도 대부분 1960년대 전반기부터 축제가 시작된 사실에 비춰 봤을 때 이 축제가 덕성의 초창기 축제인 것은 확실하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여왕대관식’이었다. 여왕대관식 역시 정확한 시작 시점을 확인하기 어려우나 1968년 여왕대관식을 ‘여덟 번째’라고 설명한 것으로 미루어 1960년대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덕성여대는 4년제 ‘학부’와 2년제 ‘초급대학’으로 이원화돼있었는데, 학부와 초급대학에서 각 1명씩 총 2명의 학생을 ‘여왕’으로 선발해 내외귀빈들 앞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당시에는 여대뿐만 아니라 남녀공학에서도 졸업반 여학생 중에서 한 사람을 ‘퀸’, 즉 여왕으로 선발해 축제 때 화려한 대관식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덕성 축제의 여왕대관식도 그중 하나였다. 여왕대관식은 1960년대 내내 덕성 축제를 상징하는 행사로 계속 이어졌다.

  여왕대관식과 더불어 초창기 덕성 축제를 대표한 행사는 ‘카니발’이었다. 카니발은 1964년 10월 축제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때 카니발은 캠퍼스가 있던 운현궁 정원에 수백 명의 남녀커플이 모인 가운데 막을 올린 후 가장행렬, 장기자랑, 행운권 추첨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그중 유명악단의 연주 속에서 진행된 인기 가수들의 공연이 가장 큰 인기를 끌었다.

  1965년에는 축제가 개교기념일 행사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그리고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덕성 축제는 5월 축제로 자리 잡았다. 축제의 여왕도 ‘메이 퀸’, 즉 ‘5월의 여왕’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1965년 축제의 여왕대관식은 전보다 더 화려해져서 2명의 여왕을 보좌하는 6명의 ‘시녀’가 함께 등장했고, 대관식에 이어 1학년 학생들의 매스게임과 3학생 학생들의 포크댄스가 진행됐다. 카니발도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유명 악단과 인기 가수를 초청해 ‘쌍쌍파티’의 형식으로 진행됐다.

  1967년부터는 축제 전날에 ‘전야제’ 행사가 개최됐고 카니발의 정식 명칭이 ‘축제놀이’로 바뀌었다. 당시 운니동 캠퍼스의 협소함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이후 한동안 1~3학년은 전야제에, 4학년은 축제놀이(카니발)에 각각 나눠 참석했다. 또한 1972년부터는 반대로 전야제는 4학년을 위한 행사로, 카니발은 1~3학년을 위한 행사로 치러졌다. 이후 카니발은 1974년부터 1975년까지 잠시 중단됐다가 1976년에 ‘운현잔치’라는 이름으로 재개됐다.
 

2000년 덕성여대 대동제 <출처/덕성여대신문>
2001년 덕성여대 대동제 <출처/덕성여대신문>


  더 ‘학술적’으로, 더 ‘민중적’으로
  1960년대 덕성 축제는 덕성인에게 가장 중요한 학교행사였다. 하지만 학생 중에서 특정인을 여왕으로 선발하는 관행과 인기 가수 위주로 진행되는 카니발, 그리고 각종 행사와 장터에서의 강매 등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커졌다. 덕성의 축제가 대학생의 축제답게 더 지적이고 진지해져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해 1970년대에는 덕성 축제에서 몇 가지 중요한 변화가 이뤄졌다.

  우선 1971년 5월 축제에 새롭게 ‘학술제’가 시도됐다. 이때 학술제에서는 '현대 한국 여대생의 가치관'이라는 주제로 대규모 심포지엄이 열렸고, 각 학과별 세미나도 개최됐다. 1973년부터는 학술제가 ‘운현학술제’라는 이름으로 매년 10월에 거행되기 시작했다. 10월의 운현학술제는 심포지엄과 학과별·학회별 세미나 외에도 외국어연극, 합창대회, 전시회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함으로써 사실상 2학기 가을 축제의 역할을 했다.

  학술제 개최와 더불어 특기할만한 축제의 변화는 여왕 선발과 대관식이 지속적인 비판에 직면해 결국 1972년에 폐지된 것이다. 또한 1970년대에는 5월 봄 축제의 명칭이 이전부터 간간이 쓰이던 ‘운현축전’ 또는 ‘운현축제’로 정착했다. 이렇게 해서 덕성 축제는 1학기 봄 축제인 운현축전(축제)과 2학기 가을 축제인 운현학술제로 확립됐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축제에 ‘민속놀이’의 비중이 커지기 시작했다. 1970년대는 대학생들 사이에서 ‘민속’에 대한 관심이 점차 고조된 시기였다. 이에 덕성여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1975년 운현축전에서 ‘북청사자놀이’가 공연됐고 같은 해 운현학술제에서는 ‘남사당놀이’가 공연됐다. 1976년 운현학술제에서는 ‘민속제’ 행사가 별도로 마련됐다. 1978년부터는 민속제가 운현축전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 이어졌다. 덕성인에게서 민속에 대한 관심과 축제에서 관련 행사의 진행은, 민속의 주인공인 ‘민중’에 대한 지향과 긴밀하게 연결된 것이었다. 이러한 학생들의 민중 지향성은 1980년대 축제에서 더 뚜렷하게 나타나게 된다.


  축제에서 ‘대동제’로
  1980년대에 들어 덕성 축제에는 두 가지 큰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는 주간부의 현 쌍문동 캠퍼스 이전이 1984년 완료된 것을 계기로, 캠퍼스의 위치와 관련한 축제의 명칭이 바뀐 것이다. 즉 기존의 ‘운현’이라는 명칭을 대신해 ‘백운’이란 이름이 새로 등장했다. 이에 1985년부터 1학기 봄 축제는 ‘백운제’ 또는 ‘백운제전’으로 불리고, 2학기 가을 축제는 ‘백운학술제’로 불렸다. 또 하나의 변화는 1985년 총학생회의 부활을 계기로 5월 봄 축제가 학교 본부가 주관하는 개교기념식과 완전히 분리돼 진행됐다는 점이다. 그리고 학원자주화와 사회민주화를 지향하는 총학생회를 매개로 축제가 학생운동과 자연스럽게 결합했다. 이제 봄 축제는 ‘5월 개교’를 기념하기보다 ‘5월 광주’를 기억하는 자리로 자리매김했다.

  부활한 총학생회가 주도한 1985년 ‘백운제’는 이후 오랫동안 지속된 덕성 축제의 새로운 전형을 창출했다. 우선 축제의 시작과 끝이 ‘개막식’과 ‘폐막식’이라는 집회의 형식으로 이뤄졌다. 당시 개막식에서는 광주민중항쟁의 진상규명과 관련한 방침 및 방향성이 논의됐고, 축제가 무사히 진행되기를 기원하는 ‘제(祭)’가 거행됐다. 폐막식에서는 전교생이 ‘해방춤’, ‘농민가에 맞춘 4박자 춤’ 등을 함께 즐기는 대동놀이와, 학생운동의 지향을 담아낸 ‘개사곡 부르기’ 같은 행사가 진행됐다. 그밖에도 축제의 여러 행사가 학생운동과 결합하는 모습을 보였다. 예를 들어 1985년 백운제에서는 광주민중항쟁 관련 ‘모의 재판’ 행사 후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나가 시위를 시도하면서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1986년 백운제에서도 마당극 공연 후 역시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진출해 경찰과 대치를 벌이다 해산하기도 했다.

  민족과 민중, 그리고 민주주의는 1980년대 덕성인들이 지향하며 쟁취하고자 했던 소중한 가치였고, 축제는 이러한 가치로 덕성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중요한 문화적 계기였다. 축제에서 덕성인의 ‘대동’이라는 의미가 강조되면서 1980년대 후반부터는 축제가 아예 ‘대동제’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후 1987년 ‘백운제’의 정식명칭이 ‘백운대동제’로 바뀌었으며,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백운’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그냥 대동제라는 명칭만 남게 됐다. 오늘날에도 계속 쓰이는 대동제라는 축제 명칭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같은 맥락에서 2학기의 ‘백운학술제’도 1990년대 이후 ‘학술제’로 명칭이 바뀌어, 지금은 단과대학 중심의 행사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덕성의 축제는 대동제라는 명칭의 지속과는 별개로 1980~1990년대와 비교했을 때 학생운동과의 결합도가 매우 얕아졌다. 반면 ‘소비성’은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이는 덕성여대 학생들을 비롯한 오늘날 한국 대학생 전반의 모습과 상통한다. 언제나 대학 축제는 당대 학생들의 생각과 경험을 반영해 그 내용과 성격을 끊임없이 바꿔왔다. 과거 덕성여대의 선배들이 그랬듯이 오늘날의 덕성인도 시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면서 새로운 축제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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