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보는 덕성 100년사]학생의 날 기억할 근화여학교 학생들의 외침, “광주학생사건 동정 만세”
[미리 보는 덕성 100년사]학생의 날 기억할 근화여학교 학생들의 외침, “광주학생사건 동정 만세”
  • 박현옥 덕성 100년사 편찬위원회 전임연구원
  • 승인 2018.11.05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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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대학은 10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존립했다. 그만큼 덕성의 역사는 가치 있다. 모든 역사는 현재로 통한다. 앞으로 나아갈 덕성의 미래를 위해 덕성의 100년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11월 3일, ‘학생의 날’과 광주학생운동
  지난 3일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었다. 지금 공식적 명칭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지만, 오랫동안 ‘학생의 날’로 기억돼 온 이날은 광주학생운동을 기념하는 날이다. 올해로 89주년을 맞는 광주학생운동은 1929년 10월 말 광주에서 나주로 향하던 열차 안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한 ‘나주역 사건’이 발단이 됐다. 첫 시작은 11월 광주지역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학생·시민시위였으나, 광주를 넘어 전국 각 지역의 학생들이 호응하며 1930년 3월까지 전개됐다. 광주학생운동이 광주에서의 시위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호응해서 전개된 전국 각지의 만세운동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광주학생운동의 주역은 광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광주학생시위와 서울지역 학생들의 만세시위
  광주학생시위가 일어나자 서울에서는 크게 두 차례 학생연합시위가 일어났다. 1차 연합시위는 12월 9일 경신학교를 선두로 보성, 중앙, 휘문고보 등 남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됐다. 시위는 다음 날까지 이어져 서울 시내 여학교로서는 가장 먼저 숙명과 근화여학교 학생들이 동맹휴교를 단행했다. 이어 11일 경성여자상업학교, 동덕여학교에서도 궐기하며 시위가 계속되자, 각 학교 관계자들은 학생들의 열기를 잠재우기 위해 조기방학을 시행했다.

  하지만 광주학생운동의 열기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1930년 1월 7일 서울 중등학교의 개학과 동시에 학원가는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근화여학교 학생들 역시 새 학기가 시작되자 가장 먼저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화여고보 학생 최순복으로부터 시내 여학교에서 같은 날 동시에 시위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시위를 생각 중이던 근화여학교 학생들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1929년 12월의 1차 시위와는 달리 1930년 서울지역 2차 연합시위는 여학생이 중심이 돼 계획됐는데, 근화여학교 학생들은 준비과정에서부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고등과 2학년 학생이었던 최성반은 본인의 하숙방을 각 여학교 대표자 회의 장소로 제공했다. 근화여학교 학생 6명을 포함해 각 여학교 대표 16명이 하숙방에 모여 시위를 준비했다. 이때 별도로 시위를 추진하던 남학생들과 연계해 시위를 진행하기로 뜻을 모았다. 시위 전날 밤, 남녀 각 학교 대표가 모여 시위의 세 가지 방침을 정했다. △1월 15일 오전 9시 30분에 각 학교에서 동시에 만세를 부르며, 종로사거리에 집합해 남대문 방향으로 행진할 것 △시위운동에는 “광주학생 석방만세”, “피압박민족 해방 만세”를 외칠 것 △경찰에 연행돼도 절대 회합자를 알리지 않고, 경찰에 유치당할 때는 단식을 할 것이다.
 

  근화여학교 교정에서 울려 퍼진
  “광주학생사건 동정 만세”

  연합시위 당일인 15일은 근화여학교 시험일이었다. 남녀학교 시위계획 모임에 대표로 참석한 김순례(17. 고등과 2)는 등교하자마자 동급생인 최성반(18), 김연봉(18), 이충신(19)에게 협의 사항을 전한 후, 함께 4학년 교실로 가서 김귀인복(19)과 김금남(19)에게 알렸다. 연합시위를 하기로 한 9시 30분이 되자, 이충신이 먼저 일어나 “어젯밤 시내 각 학교 학생들이 모여 오늘 일제히 시위운동을 실행하기로 했다”며 “우리 학교도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 함께 시위운동을 일으키자”고 선언했다. 이에 호응해 2학년 학생 전체는 함성을 지르며 복도로 뛰어나갔다. 이 소리를 들은 4학년 학생도 “빨리 종로로 가자”고 함성을 지르며 행진을 위해 뛰어나갔다.

시위 당일 근화여학교 모습을 담은 1930년 1월 16일 동아일보 기사. 제가두진출이 제지당하자 근화여학교 학생 수 명이 기절하고, 창문을 파괴하며 만세를 고창했다. 출처/동아일보
시위 당일 근화여학교 모습을 담은 1930년 1월 16일 동아일보 기사. 제가두진출이 제지당하자 근화여학교 학생 수 명이 기절하고, 창문을 파괴하며 만세를 고창했다. <출처/동아일보>

  그러나 경찰은 전날 밤부터 각 학교의 시위 계획을 탐지했고, 근화여학교 내에도 도학무과 직원, 경찰관들이 이미 배치된 상태였다. 교사들 역시 원하든, 원치 않든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제지해야 했다. 하지만 근화여학교 학생들의 열기는 매우 뜨거웠다. 학생들은 경관과 교사의 제지를 뚫고 합동해 만세를 부르며 정문 앞까지 나갔고, 정문에서 대열을 지어 계획대로 교문 밖 진출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몇몇 학생은 교문 옆 판자벽을 부수기까지 했으며 창문을 파괴하다가 손을 다친 학생, 흥분해 잠시 정신을 잃은 학생도 있었다. 학생 일부는 기숙사 쪽 보통과 학생들을 불러 함께 ‘광주학생사건 동정 만세’, ‘광주학생 만세’, ‘만세, 만세’를 외치며 함성을 질렀고, 복도에 있던 학생들도 함께 이를 연창했다. 누군가는 맞은편에 있는 보성전문학교를 향해 “남학생들이 자존심도 없나?”고 말하며 만세시위에 동참하도록 자극하기도 했다.

  시위참여를 두고 불참하는 학년과의 균열도 있었다. 근화여학교 고등과와 보통과 대부분 학생이 만세시위에 참여했지만, 고등과 3학년 학생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만세시위참여에 냉담했고 시험에 응했다. 이에 어떤 학생은 3학년 교실 유리창을 깨트리며 함께 참여하라고 외치기까지 했다. 학생 내부에도 시위에 대한 온도 차와 이로 인한 학생 간 균열이 자연스럽게 존재했다. 결국 근화여학교학생들은 교문을 사이로 경관과 대치하며 농성했고, 경성여자미술학교, 실천여학교, 정신학교 등 일부 학교 학생들만이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구속된 근화여학교 학생들
  서울지역 동조시위를 전개한 여학교는 8개 학교였는데, 연합시위로 인해 검거된 여학생 총 135명 중 근화여학교 학생은 25명으로 적지 않은 비율을 차지했다. 만세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은 경기도 경찰부로 가서 취조를 받았는데,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각 여학교의 주동자급 학생은 33명으로 그중 근화여학교 학생은 최성반, 김순례, 김연봉, 김금남, 이충신, 김귀인복 여섯 명이었다.

  그렇다면 근화여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선도한 학생들은 어떤 학생이었을까? 유치장에 수감됐던 20여 명의 인적사항을 분석해보면 주축이 된 학생은 고등과 학생이면서 서울에 유학하고 있는 지방 출신 학생의 비율이 높았다. 그들은 근화여학교에서 중등교육과정 학생이었지만, 나이는 많게는 25세, 평균 20세를 넘는 현대의 대학생 정도였다. 지방 출신자가 많은 이유는 부모와 떨어져 하숙이나 기숙생활을 하고 있어 부모로부터 활동에 제약을 덜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주모자로 지명된 6명의 학생 중 3명은 기숙사생이었고, 나머지 3명은 하숙을 하고 있어 모두 부모의 감시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성반은 평안북도 출신으로 당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하숙집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방정환의 집이었다. 최성반의 아버지가 귀한 딸을 낯선 서울에 보내기가 불안해 친구 방정환의 집에 하숙시킨 것이다.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그녀의 하숙방은 여학교 대표자 16명이 연합시위를 계획하는 장소로 제공됐다. 남녀연합시위 사전회의에 근화여학교 대표로 참여했던 김순례는 전라남도 광주 출신으로, 광주공립제일보통학교를 졸업 후 서울 근화여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김순례가 접한 동향 학생들의 시위와 무차별적 검거 소식은 그녀에게 동조시위에 커다란 자극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근화여학교 학생들은 ‘광주의 희생’에 대한 공분과 희생자가 같은 학생 신분이라는 연대의식 속에서 1929년과 1930년에 일어난 두 차례의 서울지역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근화여학교 학생들 또한 광주학생운동의 주역이었던 셈이다. 광주학생운동은 ‘피압박민족 해방만세’라는 구호에서 볼 수 있듯이 식민교육에 대한 저항의 차원을 넘어, 일제 식민통치 자체에 대한 항거로 전환됨으로써 독립운동의 성격을 갖는다. 또한 민족운동이 다시 활성화되는 동기를 부여해 1930년대 민족운동을 촉진하고 이를 수행하는 인적자원이 양성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러한 항일 학생운동 역사의 중심에 행동하는 근화여학교 학생들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근화여학교 학생들의 의미있는 외침과 행동을 이번 학생의 날을 계기로 우리가 함께 기념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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