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회 학술문예상 수필 가작
제 44회 학술문예상 수필 가작
  • 김세현(정보통계 3)
  • 승인 2018.11.26 12: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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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 수 없음)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있다. 가슴 속이 몽글거리고, 무언가가 피어오르는 데 기분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도, 정작 나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도 없다. 알 수 있는 건 답답함. 뿐이다.

사람은 단어에서 감정을 배운다고 한다. 단어에 사람의 감정이 귀속되어 단어에 감정을 맞춘다. 사람은 단어를 통해서 감정을 표현하지만, 한 단어로 표현된 감정들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눈물이 적었다. 외부의 신체적 자극에 의한 눈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감정적인 눈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화가 나고 억울해할 때만 아무 말 못 한 채 눈물만 뚝뚝 흘렸을 뿐, 모두 슬퍼하는 상황에서도, 눈물바다가 된다는 영화를 보고서도, 내 눈가는 건조하기만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있었다. 때마다 정도는 다르지만 비슷한 부류의 것들이었다. 숨이 가빠지고, 목이 막히고, 얼굴이 빨개지고, 손이 떨리며, 내 눈앞의 물건들은 뿌옇게 보이고, 주변 소리보다는 내 심장 소리가 가장 크게 들린다. 눈 주위의 근육들은 파르르 떨리고 안절부절못하며 온기 있는 것을 잡고 싶었다. 나는 이럴 때마다 이 알 수 없는, 무엇이라 달리 이름 부를 수 없는 것에 답답함을 느끼며 그 순간을 견디기만 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슬픔이었다. 처음에는 이 아이에게 이름을 붙인 것이 기뻤다. 이제 내가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말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슬픔의 지식이 더해져 상황을 더 느끼고, 더 아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내 슬픔이라는 이름을 붙이자, 그에 관한 개념의 모양들이 나를 뒤덮었다. 이름을 붙이기 전의 감정들은 제각기 다 달랐다. 부류만 같을 뿐, 모양도, 느낌도 말이다. 어떤 것은 조금 더 거칠고 아팠고, 어떤 것은 오히려 나를 감싸기도 했다. 나를 감싸는 아이들과 나를 발전시키고 성장시켰던 아이들이 슬픔이라는 모양 안에서는 부정적으로 느껴졌다. 단어의 한계가 느껴졌다.
 

  ‘슬픔의 사전적 의미는 정서 중에서 기쁨과 대응되는 비교적 기본적인 체험으로, “슬픔은 자기의 무력감이므로 인간에게 부정적(否定的)인 감정인 동시에 사물에 대한 허무감을 느끼게 한다.”라는 설명을 하고 있다.
 

  내가 느끼는 모든 슬픈 것들은 사전에서 정의된 슬픔에서 벗어나는 것들이 많다. 사전에서 설명하는 것보다 모나고 뾰족하며, 때론 둥글고 푹신하다. 과연 사람들이 느끼는 슬픔이라는 것도 모두 저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아닐 것이다.
 

  사람은 자라나면서 슬픔을 경험할 기회가 많다. 그만큼 사람에게 사랑이 많다는 것이겠지. 나의 경우에도 남들과 똑같이, 여느 아이처럼 슬픔을 경험하면서, 느끼면서 자랐었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남들과 비슷하게 자라던 슬픔이라는 것이 멈추어버린 것이다. 나와 함께 자라야 했던 슬픔이라는 것이 어느 순간 자라기를 멈춘 후, 나는 슬픔을 오히려 고스란히 느꼈다. 더 생생하고, 더 아프게.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것의 이름을 붙이고 단어의 액자를 씌우는 게 오히려 무의미하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광범위하고 방대한 감정을 한 단어로 넣는 것이 사람에게도 적용될지도 모른다. 사람을 액자에 넣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나이 별로 해야 할 일이 규격화된 곳에선 더욱더 그러하다. 해야 할 일이 사회 통념처럼 정해져 있기에, 비슷한 나잇대에는 비슷한 고민을 한다. 고등학생 땐 대학 고민을 하고, 대학교 땐, 취업 고민을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사람들은 외로움을 느끼고 고독하며 소외되는 것이다. 사람에게 씌워지는 액자의 이름은 다양하다. “그 나이 때에는~” 혹은 그 나이에?”로 시작하는 나이’, “여자는~”‘ 혹은 남자는~”으로 시작하는 성별’, ‘자본’, ‘직업’, ‘지역등등. 이뿐만이 아니다. “눈이 이렇게 생기면,, 코가 이러면,, 귀가 이러면,,” 또는 예쁘면,,” 으로 이야기하는 외모도 있다. 이 이외에도 사람에게 씌워지는 훨씬 더 많은 액자들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선의 경계에 있는 사람들이고, 또 중요한 것은 이딴 액자로는 전체를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무의 경우로 예를 들어보자. 집안의 조그마한 화분에서 나무를 키우면, 그 나무는 조그마한 화분에 맞게, 조그마하게 큰다. 조그마한 화분을 큰 화분으로 분갈이 해준다면, 나무는 이내 큰 화분에 맞게, 더 커진다. 만약 나무를 화분에서 꺼내와 드넓은 들판에 심는다면 어떻게 될까? 여러분도 예상하다시피, 나무는 하늘에 닿을 듯이 높고 푸르게 커진다. 물론 화분에서 나무를 키운다고 해서 참나무에서 소나무가 된다거나, 버드나무가 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 나무의 종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나무의 본질은 화분에서나 들판에서나 같다. 그렇지만 그 본질이 발현될 공간에 제약이 생긴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김춘수 시인의 <꽃>의 시를 보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이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 시인은 여기서 이라는 사물을 대상화하여 관조하고 있다. 꽃을 정감적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사물화 하여 존재의 깊이를 관찰한다. 하지만 나는 명명(命名) 행위를 통해 대상을 느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대상을 사물화하지 않음으로써 비단 존재를 더욱더 명확히 확인하고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상 본질의 발전과 성장을 촉진할 수 있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인간은 게으르다. 대상이나 현상이 자신이 아는 단어에 거의 비슷하기만 하면 그것을 단어에 끼워 맞추고는 한다. 그곳에서 삐죽 나온 것들은 무시하고 없는 체하거나, 못 본 체한다. 무엇을 판단하는 것은 쉽고 빠르게 진행하며, 그 판단을 바꾸는 것은 어렵고 느리게 진행된다. 그리고 그 판단에 적용되지 않은 판단의 경계선에 서 있는 것들은 소외시킨다. 마치 내가 문단 처음에 썼던 인간은 게으르다의 판단처럼.

 

  분명 여러분도 일상에서 한 현상이나 대상을 판단하려 할 것이다. “AB 하다라는 식으로 대상의 이름 지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일상에서 계속 만나는 A는 결코 항상 B 같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A는 조금 B 같고, 또 어떤 A는 훨씬 B 같거나 C 같을 수도 있다. 우리는 A를 틀에 넣지 않고 그를 고스란히 느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도 A가 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액자를 깨부숴야 한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수많은 액자의 무게를 버리고 그 안에서 나와 우리를 보여줘야 한다. 프레임 안에 대상을 넣는 것은, 그 대상을 결코 성장하게 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틀은 대상의 기껏해야 한 부분만을 이야기할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본질은, 사람의 본질과 감정은, 감히 박스나 단어에 귀속될 수 없다.

 

  '슬픔이라는 단어로 끼워 맞추려 했던 내 감정들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제44회 학술문예상 수필 가작 수상소감>
  안녕하세요. 이번 제44회 학술문예상에서 수필 부문 가작을 수상하게 된 김세현입니다. 덕성여대신문사 54주년 창간기념호에 제 글이 실린다니 실감이 안 납니다. 사실 제 글은 평소에 깊게 생각하고 있던 주제로, 글로 한번 써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자기 전에 학술문예상 공모 글을 보고 급하게 써서 낸 것이라 완성도가 다소 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에도 나와 있듯이 저는 사람들의 수많은 판단과 타인이 저에게 씌우는 액자와 사회가 저에게 씌우는 액자, 심지어는 제가 저에게 씌우는 박스들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 판단들이 저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후 액자와 판단들을 깨부수려 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깨기 어려운 것은 제가 저에게 씌우는 박스였습니다. 타인의 말과 생각은 애써 무시하면 넘어가는 것이지만, 제가 저에게 하는 판단과 제 본질에 비해 턱없이 작은 상자들은 제가 발현하는 데 장애물이 될 뿐입니다. 저는 이런 것들을 깨기 위해 크고 작은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제 글을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지만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제 글을 읽은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에 대해 단어라는 것이 감정을 억압하고 제어한 건 아닌지, 그리고 여러분을 억압하고 제어하는 액자는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며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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