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회 학술문예상 수필 가작
제44회 학술문예상 수필 가작
  • 박은서(국어국문 2)
  • 승인 2018.11.26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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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비

  나의 할머니는 충청남도 청양에서 자라 태안으로 시집오셔서 한 생을 사셨습니다. 돌아가신 후에야 고모를 통해 들은 이야기로는 할머니의 고향 청양은 아주 시골로 농사꾼뿐인 마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의 노인 우울증이 치매로 오해받던 시절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집이 청양이라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때 나는 왜 “할머니 집은 태안이잖아.”라고 고쳐드렸을까요. 할머니는 사실만 말했을 뿐인데 나는 그 순간 할머니를 치매 걸린 노인네로 만들어버렸습니다.
 

  할머니는 그 시절의 여자들과는 다른 삶을 꿈꾸었지만 다르지 않은 삶을 사셨습니다. 시골 농사꾼의 아내로, 종으로 살고 싶지 않아서 고등학교 때 출가하여 대전으로 가셨답니다. 그리고 미용기술을 배워서 일을 하려고 했으나 할아버지와 결혼하게 되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원점보다 더 낮은 곳일 수도 있겠네요. 할아버지는 정치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할머니가 소일거리로 모아둔 돈을 모두 가지고 서울에 가서 정치를 하고 돈이 떨어지면 다시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하셨다고 합니다. 하루는 할머니께 여쭈어봤습니다. 그런 할아버지랑 왜 살았냐고. 할머니는 웃으며 답하셨습니다. 할아버지가 의심스러워서 그 분이 지내시는 여관에 간 적이 한 번 있었다고. 그러나 여관 주인이 그러더랍니다. “여기 정치한답시고 오는 사람들 중에 여관에 여자 안 끌고 오는 사람 못 봤는데 그 사람을 어찌나 양반이던지 여자는 고사하고 청소하러 들어가서 보면 아주 이불부터 수건까지 싸-악 각 맞춰서 개놓고 나가더라니까..” 할머니는 그 말만 믿고 할아버지의 서울행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참 이상하죠. 어쩌면 할머니는 꿈을 좇는 할아버지를 나름의 방식으로 응원하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할머니가 버틸 수 있었던 또 다른 힘은 제 아빠, 할머니의 아들 덕분이었습니다. 아빠는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할머니의 일을 도왔습니다. 점심시간만 되면 저 머얼리서 쪼르르 달려와 할머니의 수레를 끌고 방앗간까지 옮겨주고 묵묵히 학교로 돌아가는 아빠의 뒷모습이 할머니의 눈앞엔 선명한지 종종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시곤 했습니다. 두 분은 서로를 그렇게 많이 의지하며 힘든 시기를 보내셨나봅니다. 할머니가 의지하신만큼 아빠도 할머니께 많이 의지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꼭 아버지라 부른 반면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우리엄마’라 부른 것으로 이를 어림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두 분이 서로를 의지했던 만큼 재미있는 일화들도 많은데 아빠가 들려주는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들은 언제 들어도 우리에게 큰 즐거움이 됩니다. 그 중 하나를 남기자면 어린 아빠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때에 하루는 할머니께서 아빠를 다급하게 깨우며 학교에 늦었다고 재촉하시더랍니다. 그래서 어린 아빠는 선생님께 혼나고 싶지 않은 마음에 학교까지 달음박질쳤지만 텅빈 교실에 당황하여 집으로 털레털레 돌아왔고 알고 보니 할머니께서 학교에서 돌아와 어슴푸레한 저녁까지 낮잠을 자는 아들을 골려주려 시계까지 돌려놓고 장난을 치셨던 것이었습니다. 아빠는 이 이야기를 여러 번 하셨지만 아직도 그 당시를 생각하면 재미있는지 박장대소를 하십니다. 그렇게 할머니의 즐거움이 되었던 세 자녀가 모두 장성하여 집을 떠났고 할머니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의 뜻대로 주유소를 개업한 뒤 할머니는 커다란 유리로 된 창문 안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여러 친목모임과 운동 등으로 자리를 비우시는 할아버지 대신 주유소를 지키는 것은 할머니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절대 가게 문을 닫지 않으셨고 그 문을 여는 사람은 할머니였습니다. 주유소를 처분하고는 할아버지는 편찮으셨고 그 병수발을 하는 사람 역시 할머니였습니다. 항상 창밖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며 죽어야뎌 죽어야뎌..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할머니의 인생을 바라보면 모두들 입을 모아 말합니다. “참 안됐지..” 할머니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안된 삶 속에서 작은 즐거움들을 찾으려 매우 노력하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면 약속이 없는 날에도 꽃단장하길 좋아하셨습니다. 까맣고 푸석한 머릿결을 따라 빗질을 하고 동네 화장품점에서 산 화운데이션을 바르고 빠알간 루주를 바르느라 오랜 시간을 거울 앞에서 보내곤 하셨지요. 거기에 항상 반짝이고 밝은 옷을 입으셨고 주름진 손목에는 금색의 손목시계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주유소를 지키셨습니다. 손님을 보기 위해 만든 커다란 유리창은 창살이 되었고 할아버지만이 그 문을 나설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에게 허락된 자유는 스포츠댄스 교실에 다녀오는 것과 장보기였습니다. 방학을 할머니와 보냈던 저는 종종 스포츠댄서가 되어 할머니의 연습상대가 되곤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노래 부르는 것도 정말 좋아하셨는데 대부분의 할머니들처럼 트로트를 가장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트로트 가사를 외우고 싶었던 할머니의 부탁으로 초등학생인 제가 장윤정이 부른 ‘어머나’의 가사를 또박또박 메모지에 적어드리곤 했습니다. 할머니는 손님이 없을 때 노래연습을 하셨는데 혼자 있는 공간에서 열창하셔서 그런지 노래를 아주 구성지게 잘 부르셨습니다. 아직도 잠자리에 자장가로 불러주시던 할머니의 포근한 트로트가 귓가에 또렷이 남습니다. “꽃나비가 되-어서 날아가고파 그대 품에 안기고 싶어-” 지금 보니 할머니는 한 송이의 꽃이 아닌 한 마리의 나비이고 싶으셨나봅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병원에서 지내셨을 때 제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젊으니께 가고 싶은 데 있으믄 실-컷 가봐야 혀. 다 가봐.” 할머니가 가고 싶었던 곳은 어디였을까요. 유리창살 너머 어디로 날아가고 싶었을까요.
 

  할머니가 가장 신이 나는 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명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항상 홀로 주유소를 지키는 할머니에게는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명절이 되기 전에 미리 할머니 댁에서 머물면 할머니가 명절 준비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음식 준비만큼 항상 잊지 않으시는 것은 양말을 여러 켤레 사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신는 정장양말부터 고운 색으로 된 여성양말,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아동양말까지 고루 사서 명절을 쇠러 모인 친척들에게 한 켤레씩 양말을 나눠주는 것이 할머니에게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의 옷장 한 칸에는 큰집에 주인이 오지 않아 전달되지 못한 양말들이 가득했지만 명절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마트에 가 새 양말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명절 당일이 되면 잔을 들고 모든 어른들과 한 잔씩 술을 나누느라 앉아서 식사할 새가 없으셨던 분이었습니다. 웃사람, 아랫사람, 먼 친척, 가까운 가족 어느 한 사람 빠짐없이 작은 몸으로 비좁은 틈을 요리조리 다니며 술잔을 기울이곤 하셨지요. 명절 행사들이 끝날 즈음엔 며느리인 엄마가 설거지를 하려 하면 한사코 말리시며 “지금 내 몸이 성할 때 다 할테니께, 나중에 내가 늙어서 정신이 없으면 화내지 말고 잘해줘.”라며 설거지를 도맡아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희가 서울로 떠날 때엔 너무 서운하다며 저희 호주머니에 빳빳한 새 돈을 넣어주셨습니다. 시골에 가면 용돈이 당연했던 내 모습이 너무나도 철없게 느껴지네요.
 

  나의 할머니는 이러한 삶을 사셨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아무리 풀어내려 애써도 고작 이것뿐이네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에서 고모는 말씀하셨습니다. “80년 넘게 살아도 사흘이면 다 끝나버리네. 허무하게” 그렇게 할머니의 마지막은 너무나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첫 명절은 이듬해 설이었습니다. 조촐해져가는 명절문화가 그 해에는 유독 풍성하고 왁자지껄 했습니다. 아빠는 살아계실 때 잘해야지 돌아가시고 나서 모이면 무슨 소용이냐고 하셨지만 저는 조금 다릅니다. 할머니의 삶은 춥고 어두운 먹구름에 가려있었던 것 같지만 그 구름 아래에서 할머니는 주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며 모두의 기억에 따뜻한 온돌로 남으셨습니다. 명절이 되면 사촌들에게 양말 한 켤레라도 쥐어주시고 한 잔 씩 술을 나누시던 할머니. 돌아가신 후에도 행복한 이야기로 우리 가족들에게 따스한 온기를 나누고 계신 겁니다. 나는 할머니를 남기기 위해 이 글을 씁니다. 아무리 기억하려 애써도 기억이 흐릿해질 때 어딘가에 글로, 사진으로 남아있는 할머니를 만난다면 다시금 그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날 것 같아 모자란 솜씨로 이 글을 씁니다. 직접 보셨다면 “우리 손녀 장원일세.”라고 자랑스러워 하셨겠지요. 그 시절을 산 여자 중 그 무엇도 특별할 것 없던 삶을 살던 할머니는 당연한 듯이 모든 고통을 속으로 삼키며 사셨지만 내겐 가장 특별한 분입니다. 나에겐 하나뿐이고 가장 위대한 여성인 할머니, 동시에 가장 순수하고 소녀 같은 우리 할머니가 어디엔가 영원히 남으시길 바랍니다.

 

  <제44회 학술문예상 수필 가작 수상소감>
  먼저 학술문예상에 공모해 보라고 제게 권유해준 김지원 학우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할머니에 대한 글을 썼지만, 주변에 할머니와 유년 시절을 보낸 친구들이나 지금도 한 지붕 아래에서 할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친구들과 비교하면 할머니와의 관계가 아주 가까운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제게는 할머니의 죽음이 크게 실감 나지 않았습니다. 슬펐지만 언제든 시골에 가면 할머니가 웃으며 저희를 반겨주실 것만 같았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르는 내내 장남인 아빠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덤덤하게 할머니의 임종을 지켰고 문상객을 맞았으며 입관을 지켜봤습니다. 그러던 아빠는 할머니의 관이 화장로에 들어가고 그 문이 닫힘과 동시에 무너졌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엄마를 찾으며 우는 아빠를 보니 비로소 할머니의 빈자리가 실감났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를 기억하고 싶어 하는 아빠를 위해 나에게 남은 할머니를 글로 남겨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할머니, 나 할머니 글 써서 학교에서 상 준대. 할머니 덕에 내가 상도 받네. 구여운 손녀가 언제 이렇게 컸나 싶지? 나 벌써 대학생이여~ 아무튼 할머니, 우리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고 가서 고마워. 다음 생에는 진짜 창공을 나는 독수리로 태어나서 어디에도 매이지 말구 살아야 혀! 할머니가 못 가본 곳 내가 다 가보고 나중에 얘기해줄게. 심심해도 친구들이랑 춤추고 한 잔씩 하면서 기다려줘. 너무 재미나게 지내서 나 까먹으면 안 돼! 알겠지? 할머니, 내가 많이 보고 싶고 모두들 할머니를 보고 싶어 해. 꿈에 한 번만 나와줘. 기다릴게! 할무니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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