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가난
도둑맞은 가난
  • 정해인 편집장
  • 승인 2020.09.07 02: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부모님 연봉이 얼마인데, 이 정도면 가난한 거 아니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런 내용의 글을 보면 마음 한구석 어딘가 선득하다. 곧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장학금을 주겠다며 불러서 내게 한 말이 떠오른다. “너희 집, 불우하잖아. 맞지?”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기에 답을 망설이던 나에게, 그는 몇 번을 더 물어 기어이 수긍의 끄덕임을 받아냈다. 그때 나는 장학금을 받으니 좋은 게 좋은 거라며 교무실을 나왔다. 하지만 등록금을 낼 때나 자취 대신 택한 왕복 4시간 통학길 지하철에서 문득 깨닫는다. 그 말이 내 마음에 남아 있음을. 그것을 이따금 곱씹다가 어쩌면 그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한다.

  ‘아무튼, 주말’이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절반 이상인 50.63%가 "나는 가난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중엔 연봉 6000만 원 이상이 11.35%, 1억 원 이상도 1.81%나 됐다. 집을 가진 사람이 51.85%, 차를 가진 사람도 59.15%였다. 너도나도 가난을 자처한다.

  부자들은 이제 가난마저 탐나나 보다. 그렇게 가난은 ‘힙’함으로 둔갑했다. 더럽고 때 탄, 누더기 같은 모습으로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골든구스의 유행이 단적으로 이를 보여준다.

  부자들이 훔쳐 간 것은 가난의 겉모습만이 아니다. 큰 결의를 보이는 삭발을, 걸 수 있는 게 목숨밖에 없기에 시작한 단식을 빼앗았다. 그뿐인가, 삶의 터전 역시 마찬가지다. 노인들이 일제 강점기에 지은 한옥에서 금속 공장과 한복집을 하며 모여 살던 익선동은 어느새 힙스터들의 무대가 됐다.

  하지만 가난의 실상은 그리 ‘힙’하지 않다. 친구들과의 대화 주제가 ‘대학 등록금을 어떻게 내는지’로 흘러가면 늘 허탈해진다. 부모가 등록금을 내주는 주변인들 가운데 일부는 ‘내가 학비를 내줬으니까 이렇게 해’라는 말을 들을 필요가 없는, 학자금 대출을 받는 나를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들이 부러워하는 나는, 부담과 불가능의 차이를 모르는 그들을 부러워한다. 그리고 종래에 친구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나를 발견했을 때의 자괴감을 지울 수가 없다.

  나는 여전히 내가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국장학재단이 명백하게 수치로 제시한 나의 상황이 끊임없이 나를 갉아먹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선택의 순간마다 기회비용을 계산하느라 새로운 도전을 망설이곤 한다.

  박완서의 단편소설 ‘도둑맞은 가난’ 속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에 안 차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나는 우리가 부자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도봉구 삼양로144길 33 덕성여자대학교 도서관 덕성여대신문사
  • 대표전화 : 02-901-8551, 8552, 855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정해인
  • 법인명 : 덕성여자대학교
  • 제호 : 덕성여대신문
  • 발행인 : 강수경
  • 주간 : 조연성
  • 편집인 : 정해인
  • 메일 : press@duksung.ac.kr
  • 덕성여대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0 덕성여대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duksung.ac.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