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문명의 틀, 경국대전
조선 문명의 틀, 경국대전
  • 오항녕 전주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 승인 2021.04.20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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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의 헌법은 무엇인가.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쉽게 답할 것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이 상식이 과연 옳은지 의문을 달아보고자 한다. 먼저 경국대전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만세불역의 법전을 만들다

  경국대전은 조선 제7대 임금 세조 6년(1460년) 부터 집필을 시작해 성종 16년(1485년)에 이르러 완성됐다. 이는 조선건국의 시점에서 보면 근 한 세기가 흐른 뒤에야 완성한 것이며, 그것은 다른 사회영역에서도 나름의 질서를 잡아가고 있던 과정과 일치한다. 물론 이전에도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경제육전(經濟六典)>등 경국대전의 모태가 된 법전들이 있었다. 이 시기의 ‘경제’란 말을 우리가 흔히 쓰는 경제(Economy)라는 말로 이해 하면 오해가 생긴다. 당시의 경제는 경세제민(經世濟民), 곧 인간사회의 운영에 관한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물론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경제란 의미도 포함한다.

  혹자는 경국대전이 세조의 명으로 편찬 작업을 시작했다는 점을 들어 세조를 조선조의 기틀을 잡은 군주로 평가하고, 세조의 왕위찬탈은 정당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당성을 놓고 가부를 판단하기에 앞서 조선 초부터 그런 노력이 있었다는 점, 편찬 작업을 세조의 명으로 시작하긴 했으나 학자 최항 등 참여한 학자 들은 세종 때의 집현전(集賢殿)에서 고제(古制. 옛 제도)를 연구하던 점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이렇듯 경국대전은 세조 정권의 정통성을 좌우할 만한 작업이었을뿐아니라, 이후 조선을 경영하는 만세불역(萬世不易)의 법전으로 자리를 잡았다.

조선의 중앙관청 부서는 육조 체계에 따라 존재했는데, 총 6전인 경국대전은 이 관청부서 체계와 같게 만들었다.
조선의 중앙관청 부서는 육조 체계에 따라 존재했는데, 총 6전인 경국대전은 이 관청부서 체계와 같게 만들었다.<출처/KBS역사저널 그날>

 

 

  경국대전의 짜임새

  물론 경국대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경국대전만 해도 영조 때 <속대전(續大典)> , 정조 때 <대전통편(大典通編)>고종 때 <대전회통(大典會通)>으로 증보했다. 아무래도 시대가 변하면서 보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세불역’이란 말이 그대로 적용됐던 것은 아니다. 대체로 이들을 ‘대전류(大典類)’라고 부를 수 있을 텐데, 가장 늦게 간행된 대전회통은 이러한 변화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정리했다. 순서대로 ‘원(原)’, ‘속(續)’, ‘증 (增)’, ‘보(補)’며, 경국대전을 기초로 대전류가 이후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있게 표시했다.

<출처/지식백과>

 

 대전류 외에 중요한 법률 역할을 한 것이 왕의 전교였다.  한편 각 관청별로 ‘편하게 참고 하는 규정(便考)’, ‘일반적으로 두루 참고하는 규정(通考)’의 매뉴얼을 만들어 사용했는데, 요즘으로 치면 시행규칙이나, 시행세칙, 지침 등이다.

 그런데 ‘조선의 헌법’ 하면 머리에 첫 번째로 떠올랐던 경국대전은 과연 조선의 헌법이었을까? 경국대전 본문을 보면 서문을 빼고 모두 6권으로 △이(吏) △호(戶) △예(禮) △병(兵) △형(刑) △공전(工典)이다. 형전(刑典)에 들어갈 만한 각 양형(量刑. 형벌의 정도를 정하 는 일) 규정은 중국의 <대명률(大明律)>을 갖다 썼다.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인데, 대명률에 이두를 달아 해석한 것으로 별도의 형률을 만들지 않고 이를 참조하여 법집행에 활용했다.

 경국대전은 요즘으로 치면 정부조직법과 국가 운영에 관한 구체적인 시행 법안에 가깝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상에 기초한 국가의 기본이념과 국민의 기본권을 밝히고 있는 근대의 헌법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경국대전이라는 명칭으로 보면, ‘국가를 경영하는 큰 법’이므로 일견 헌법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막상 내용을 보니 우리의 관념과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와 현대를 헌법의 형식에 있어 단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시대의 헌법이라고 알려진 경국대전을 살펴본 것이며, 기대와는 달리 경국대전이 우리가 생각하는 헌법과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런 결과의 이유를 국왕 중심의 전제정치로 돌리고, 그 때문에 근대의 헌법 같은 것은 애당초 조선에서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아마 이런 생각 때문에 조선시대 헌법의 존재에 대한 발상조차 가능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또 사실과는 다르게 경국대전이 헌법과 같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의적인 국가운영을 통해 500년을 통치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적어도 근대의 헌법과 같은 그 무엇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쉽게 포착되지 않는 것은 혹 우리의 접근 방법과 관점에 문제가 있기 때문일 수도 있지 않을까.

 

  헌법과 역사성 

  헌법의 이념과 조문은 분리해 생각하는 편이 낫다. 근대 헌법은 민주주의와 기본권에 대한 자연법 사상과 계몽주의가 그 이념이고, 그것이 우리가 아는 헌법 조문으로 구체화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연법 사상과 계몽주의는 역사상 특정한 시점에 등장한 이념이다. 우리가 아는 헌법은 매우 역사적인 산물이다. 동시에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어떤 시기에 특정 형태로 지양(止揚)할 수 있는 체제 다. 우리가 조선시대의 ‘헌법’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알고 있는 ‘헌법’이 초 역사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사회규범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여기에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다. 예치(禮治)와 법치(法治)의 문제다. 이는 법 일반의 성격을 좌우하는 이념도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법이 사람들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사실 요즘도 법을 의식하며 살거나 법의 규정이 힘을 발하는 삶의 영역은 수치로 보아 10%도 되지 않는다는 보고도 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 많기에 그래도 사회가 이만하게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예치와 법치

  ‘법치(法治)’라는 관념이 가장 훌륭한 미덕인 시대는 우리가 사는 근대사회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그나 카르타>, <권리장전>, <나폴레옹 법전> 등을 계보를 삼아 그게 없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생각하는 발상의 저 편에는 바로 근대 사회의 법치주의 이념이 자리하고 있다. 즉, 이런 법치를 통해서 인간의 삶을 질서지운 시대에 대한 찬양이 담겨 있다. 동시에 그 시대인 근대를 인간 역사에서 가장 발전된 시대로 보는 배경이자 근거인 것이다.

조선은 경국대전 이전에도 조선경국전, 경제육전 등 법전을 편찬했고 그 이후에도 속대전, 대전통편, 대전회통 등 당시 사회 규범 어긋나지 않도록 꾸준히 새로운 법전을 편찬해 법치 주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조선은 경국대전 이전에도 조선경국전, 경제육전 등 법전을 편찬했고 그 이후에도 속대전, 대전통편, 대전회통 등 당시 사회 규범 어긋나지 않도록 꾸준히 새로운 법전을 편찬해 법치 주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출처/차이나는 클라스>

  그러나 이런 법치의 가치를 반성이 동조하는 데 대한 문제제기는 여전히 다음과 같은 과제를 남겨 놓고 있다. 왜 예치(禮治)를 우선하던 사회에서 법치를 우선하는 사회로 넘어갔는가? 그 과정에 필연성 혹은 단절이 있는가? 사회규범이 인간사회의 필수 조건이라면 어떤 인간학적 기초에서 고민해야 하는가?

  공자가 말했다. “행정명령이나 규제를 통해 인민을 이끌고, 형률을 통해 질서를 유지하려고 하면, 인민들은 그 규제나 형률을 모면하려고 하고 잘못에 대한 부끄러움을 모르게 된다. 덕으로 인민을 이끌고, 예로 질서를 유지하면 인민들은 부끄러움도 알게 되고 품격이 있게 된다.”

  <논어(論語)> 위정(爲政)에 나오는 말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된다. 어렸을 때로 기억하는데, 당시 교통법규를 위반하면 새끼줄을 친 구역에 위반한 사람을 얼마간 세워 뒀다가 풀어주는 처벌을 시행한 적이 있었다. 아마 창피를 주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부끄러움이라는 질서관념을 교육하는 시간인 셈이다. 요즘은 벌금을 내게 한다. 길에 세워놓는 방식은 당장 인권 침해 논란을 일으킬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이 윤리학과 법학의 상관 관계에 대한 질문의 답이 끝난 것일까? 아예 포기 한 것이 아닐까? 인간의 자율성, 자발성이라는 측면을 중시해 사회생활의 상호이해, 배려, 질서를 실현할 때 느끼는 평온함과 달리, 강제적 법집행(또는 처벌을 요행히 회피하는 것)이 갖는 한계도 분명하지 않았나?

  경국대전이 조선의 헌법이냐, 아니냐에 답이 있지 않다. 경국대전은 나라의 경영에 이러한 윤리학, 법철학의 고민을 담은 문화적 성과다. 상벌이 따르는 법률 규정에서부터, 내재적 자발성을 유도해 나라를 꾸려가려는 이념이 담긴 헌법이자, 정부조직법이자, 사회규범이다. 이쯤에서 21세기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의 ‘경국대전’은 무엇이며, 어떤 철학적, 역사적 비전에 기초하고 있는지 물어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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