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이라는 ‘덫’을 되돌아보다
공정이라는 ‘덫’을 되돌아보다
  • 최주희 사학전공 교수
  • 승인 2021.11.22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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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 열기가 뜨거운 요즘이다. 한국의 정치 관행상 개별 후보의 정치 성향이나 도덕성이 선거의 당락을 결정짓는 주요 변수가 돼 온 것이 사실이지만, 최근 들어 보수, 진보 가릴 것 없이 ‘공정’이라는 키워드를 자신의 정치 아이디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공정’은 어느 한 쪽에 치우침 없이 공평하고 올바름을 의미한다. 이는 치우침, 즉 각자의 팽팽한 이해관계가 전제된 것이다. 모두가 공정이라는 키워드에 공감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저마다 지켜야 하는 이해관계가 첨예하고 절실함을 뜻한다.

  개인의 고유한 역량을 순수하게 발현할 수 있는 사회환경, 개인을 선입견 없이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시험제도, 시험 통과자들에게 제공되는 사회적 지위와 재력이 하나의 사이클처럼 선순환되는 구조야말로 다수가 바라는 공정한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이클은 한 번만 순환해도 금방 모순을 드러낸다.

  MZ세대에게는 생소할 ‘우골탑(牛骨塔)’이라는 말은 영국의 역사학자인 에릭 홉스봄이 지적한 한국형 능력주의의 대명사다. 60~70년대 농가의 유일한 재산인 소를 팔아 아들의 등록금을 마련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시대에 대학의 상아탑을 달리 부르던 속어이기도 하다. 우골탑 세대는 한국의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이룬 주역인 동시에 능력주의의 관문에서 큰 수혜를 본 계층이다. 한국사회의 주도층인 이들에게는 능력주의의 보상으로 안정된 직장과 경제적 부가 자연스럽게 제공됐지만, 동일한 관문을 통과한 후속 세대에게는 그와 같은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 지금의 청년층이 느끼는 박탈감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한국만의 상황일까? 예일대 로스쿨의 다니엘 마코비츠 교수 역시 미국사회의 능력주의 함정을 ‘덫’으로 표현했다. 하버드, 예일과 같은 명문대학은 애초에 귀족 자제들이 입학하는 학교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뛰어난 인재들이 입학해 자기 능력을 자본화하는 법을 터득하고 졸업 후 새로운 엘리트층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자본을 자녀세대에 세습함으로써 전통적인 산업구조 속 중산층이 와해되고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된다고 진단했다. 현상은 다르지만, 능력주의 사이클을 통과한 계층이 사회적 지위와 부를 독점하면서 계층 격차가 심화되는 상황이 유사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능력주의를 전제로 한 ‘공정’만을 강조하는 것이 과연 해답일 수 있을까?

  우리에게도 공정이라는 키워드와 통하는 오랜 전통이 하나 있다. 바로 과거(科擧)다. 조선왕조는 유교적 민본주의를 실현할 만한 유능한 관료를 선발하기 위해 유교 경전과 문장을 시험 보는 제도를 500년 동안이나 유지시켰다. 양반은 본래 과거에 합격한 관료집단을 일컬었다. 그러나 관직이 주는 지위와 부를 경험한 가문들이 점차 정부로부터 군역을 면제받고, 과거 공부에 열을 올림으로써 양반은 향촌에서 지배 신분화됐다. 19세기까지 과거시험을 보는 인구는 계속 늘어났지만, 대과 합격과 청요직으로 이어지는 엘리트 코스는 점차 특정 가문 출신들에 의해 독점화됐다. 다산 정약용과 같은 실학자들은 과거제의 폐단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지금의 추천법에 해당하는 공거제를 주장했으나 끝내 실현되진 못했다. 과거제는 조선 후기 들어 ‘출세의 사다리’가 아닌 ‘희망 고문’으로 작용했다.

  해방 이후 한 세기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한국사회는 다시 엘리트 세습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 공정을 강조하면 할수록 후속세대는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더 많은 경쟁과 자기착취에 시달려야 할지 모른다. 후속세대가 장년층이 돼 마주할 국제사회의 과제들 역시 녹록지 않기에 이러한 상황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 우리 사회에 능력주의를 가장한 새로운 신분제 사회가 정착되지 않도록 소외된 계층을 배려하고, 왜곡된 시장 구조를 바로잡는 공동체적 혜안이 절실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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