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서 사라지는 성별의 한계
무대 위에서 사라지는 성별의 한계
  • 정해인 기자
  • 승인 2022.05.16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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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프리 캐스팅, 다채로운 공연 문화를 선도하다

  아버지의 원수인 숙부에게 복수의 날을 가는 왕자 햄릿, 악마와 계약한 천재 파우스트,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욕망하고 질투하는 살리에리 등 우리가 아는 작품의 주연 캐릭터는 대부분 남성으로 정해져 있다. 그런데 최근 캐릭터의 감정을 표현하고 작품의 본질을 얘기하는 데 성별의 구분이 필요하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남성이었던 배역을 여성으로 바꿔 여성 배우가 연기하거나 성별의 구분이 필요 없는 배역에는 남성과 여성을 동시에 캐스팅하기도 한다. 이러한 젠더 프리 캐스팅이 공연 문화의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하고 있다.

 

  여성 배우의 햄릿,
  남성 배우의 오필리아

  국립극단은 지난해 온라인 극장을 통해 ‘햄릿’을 선보였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지난 몇백 년간 전 세계적으로 관객에게 가장 익숙한 작품 중 하나지만, 이 공연이 특별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기존 여느 공연과 달리 햄릿이 왕자가 아닌 공주였기 때문이다. 이봉련 배우가 햄릿 공주 역할을 맡았고 햄릿의 연인인 오필리아는 남성 배우가 연기했다. 이처럼 성별의 제약 없이 배우를 섭외하는 캐스팅을 젠더 프리 캐스팅(gender free casting)이라고 한다.

이봉련 배우는 국립극단의 연극 ‘햄릿’에서 햄릿 공주를 연기했다.
이봉련 배우는 국립극단의 연극 ‘햄릿’에서 햄릿 공주를 연기했다.<출처/국립극단>

  젠더 프리 캐스팅은 배역과 연기하는 배우의 성별에 차이가 있기도 하지만 공연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배역의 성별을 특정하지 않기도 한다. 신적이거나 관념적인 캐릭터들이 이에 속한다. 2017년 뮤지컬 ‘광화문연가’의 월하노인을 모티프로 만든 캐릭터인 월하 역에 남성 배우와 여성 배우를 *더블 캐스팅 했고, 뮤지컬 ‘더 데빌’에서도 X-Black과 X-White 역에 남성 배우와 여성 배우를 더블 캐스팅했다. 성별 구분이 무의미한 캐릭터도 남성으로 표현하고 남성 배우가 연기하던 기존 작품과 차이가 있다.

 

  젠더 프리 캐스팅의
  이유 있는 인기몰이

  2019년 연극 ‘오펀스’는 주요 배역을 모두 젠더 프리 캐스팅으로 설정했고 하반기 연극 중 예매율 1위를 기록했다. 다양한 캐스팅 조합이 가능한 젠더 프리 캐스팅의 특성이 다회 차 관람으로 이어진 덕이다. 같은 시기 예매율 3위를 차지한 연극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도 주인공 역할에 젠더 프리 캐스팅을 적용했다.

  젠더 프리 캐스팅 열풍은 공연예술을 넘어 연예계로 이어지기도 했다. 여성 월간지 마리끌레르 코리아는 지난 2018년부터 ‘젠더 프리 리딩’ 프로젝트를 이어오고 있다. 기존 남성 배우들이 연기했던 배역을 여성 배우들이 연기하는 프로젝트다. 2018년에 게시한 프로젝트는 5월 기준 유튜브에서 조회수 123만 회를 기록했다.

마리끌레르 코리아의 젠더 프리 리딩 프로젝트는 2018년부터 호평을 받으며 2022년에도 이어졌다.
마리끌레르 코리아의 젠더 프리 리딩 프로젝트는 2018년부터 호평을 받으며 2022년에도 이어졌다.

  연극과 뮤지컬을 포함한 공연예술의 수요는 여성 관객이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한다. 2019년의 인터파크 티켓 공연 예매자를 분석한 결과 전체 관객 중 여성이 72%를 차지했으며, 모든 장르의 공연에서 전체 관객의 70% 이상이 여성 관객이었다. 여성 소비층이 두꺼운 만큼 흥행을 좌우하는 것은 멋진 남성 배우의 몫이라는 것이 업계의 오랜 불문율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와 반대의 분석이 나오기도 한다. 여성 관객들이 남성 배역에 열광하기보다는 같은 여성인 캐릭터에게 이입하고 여성 배우들의 폭넓은 연기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특히 공연시장의 핵심 수요층인 20~30대 여성은 한국 사회에서 젠더 이슈에 가장 민감한 계층이기도 하다. 실제로 국내 젠더 프리 캐스팅은 공연예술계 미투운동을 계기로 확산됐다. 공연예술계 내 성범죄를 고발하는 흐름이 구조적 차별에 대한 담론으로까지 이어진 사례다.

 

  기울어진 무대 속 여성 배우들,
  새로운 성별의 옷을 입다

  남성 중심적인 공연 문화에 대한 여성 배우들의 저항은 젠더 프리 캐스팅 등장 이전부터 있었다. 1948년 시작된 여성국극이 그것이다. 여성국극은 배우 전원이 여성으로만 이뤄진 것이 특징으로, 여역과 남역 상관없이 무대에 오르는 모든 배역을 여성 배우가 연기한다. 여성국극이 탄생하기 이전 국악계에서 여성 예인은 남성 예인과 동등하게 대우받을 수 없었다. 차별은 물론 심지어는 경제적 착취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차별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여성 국악인들이 여성국극을 시작하면서 여성 배우들이 무대에 설 수 있었다.

  현대의 공연예술계도 성차별에서 자유롭지 않다.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이 배역 성비 불균형이다. 공연 예매 사이트인 인터파크 티켓의 2022년 5월 예매 점유율 상위 10위 공연을 살펴본 결과, 남성 배우가 여성 배우보다 많이 캐스팅된 공연은 뮤지컬 9개, 연극 8개였다. 여성 배우가 남성 배우보다 많이 캐스팅된 공연은 뮤지컬과 연극 모두 없었다. 특히 고전극의 경우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연이 대부분 남성이기 때문에 배역의 성별에 따라 배우를 캐스팅할 시 여성 배우는 부차적인 역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젠더 프리 캐스팅은 공연예술계의 구조적 성차별 속에서 여성 배우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지난해 뮤지컬 ‘광화문연가’의 프레스콜에서 월하 역을 맡은 차지연 배우는 “여성 배우들이 특정 역할에 갇혀 있기보다 좋은 작품을 찾았을 때 용기 내서 도전할 수 있는 시대가 조금 더열린 것 같다”며 “성별과 상관없이 좋은 작품과 역할을 두고 선의의 경쟁을 펼칠 수 있다면 공연의 질도 올라갈 것이다”고 말했다.

  기존의 익숙한 서사라도 캐스팅 방식에 변화를 주는 것으로 작품의 새로운 방향을 열 수 있다는 것 역시 젠더 프리 캐스팅의 강점이다. 2020년 연극 ‘파우스트 엔딩’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원작인 ‘파우스트’를 각색해 국내 최초로 파우스트 역에 여성 배우인 김성녀 배우를 캐스팅했다. 조광화 연출은 지난해 3월 공연 후 진행한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전과 같은 방식의 캐스팅으로는 원작의 무게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며 “주인공의 성별을 바꾸니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고 말했다.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무대,
  진정한 젠더 프리를 위해서는

  젠더 프리 캐스팅은 남성 중심적인 공연시장 속에서 그동안 외면받아왔던 여성이 주체적으로 무대를 이끌어나가려는 움직임이다. 오늘날 공연계의 의미 있는 흐름으로 자리잡았으나 아직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젠더 프리 캐스팅을 표방해 화제성을 챙기면서도 일회성에 그치거나 여성 배우 중 극소수에게만 배역을 얻을 기회가 돌아가기도 한다. 국내 최초의 젠더 프리 캐스팅 시도는 2001년 ‘에쿠우스’다. 당시 박정자 배우가 국내 최초의 여성 다이사트를 연기했지만 그 이후 다이사트 역이 여성 배우에게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젠더 프리 캐스팅의 취지는 배우가 다른 성별의 배역을 연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남성 중심적인 공연예술계 문화를 타파하는 데 의의가 있다. 단순히 배우가 다른 성별을 연기하는 것을 젠더 프리 캐스팅이라고 한다면 여성이 무대에 서는 것을 금지해 배우가 전부 남성이었던 시대의 공연도 포함될 수 있다. 이는 크로스 젠더 액팅(cross gender acting)으로, 젠더 프리 캐스팅과는 구분되는 개념이다.

  공연예술을 포함해 모든 문화예술에서 여성의 역할은 조력자에 머물렀다. 누군가의 어머니 또는 연인으로 등장하거나 성녀와 악녀의 이분법적인 기준으로 나뉘었다. 젠더프리 캐스팅은 오랫동안 통용되던 성 고정관념에 도전하고 균열을 낼 때 그 취지가 발현된다고 할 수 있다. ‘햄릿’과 ‘파우스트 엔딩’ 모두 관객에게 익숙한 고전을 채택하면서도, 젠더 프리 캐스팅을 시도하며 그 안에서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보여줌으로써 신선하다는 호평을 받았다. 두 작품 모두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여성 캐릭터의 욕망, 분노 등의 감정을 표현했다. ‘햄릿’의 부새롬 연출은 “여성이어도 남성과 다를 바 없이 왕권을 원하며 복수하고 싶어 하는 모습을 그리고자 했다”고 말했다.


*더블 캐스팅: 한 배역에 다른 두 배우를 동시에 캐스팅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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