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본래 양인 신분으로 처음부터 천민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고 형제들과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어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만덕은 어쩔 수 없이 퇴기 월중선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적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이후 만덕은 나이 20세에 본의 아니게 기생된 사연을 관아에 호소하여 본래의 양인 신분을 회복하고 기적에서 이름이 삭제되었다.
기방에서 나온 그녀는 당시 급속도로 발전하던 조선 상업의 흐름을 읽고 신용과 박리다매를 경영원칙으로 하여 제주 최고의 거상으로 성장하였다. 정조 18년 8월 27일과 28일에 태풍이 불어닥쳐 당시 제주에 왔던 심낙수 어사가 ‘온 섬을 비로 쓸어버릴 것 같아서 어디가 어디인지 구별할 수 없다‘고 보고할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음해 봄에 큰 기근이 일어나 제주의 세 고을에서 굶어 죽은 사람만 6백여 명이나 될 정도로 피폐해지게 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도 이를 근심하여 2만석이나 되는 미곡을 제주에 급히 보냈으나 수송선 5척이 침몰하고 말았다. 이 때 김만덕은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육지에서 미곡 5백여 석을 사들였다. 그 중 10분의 1은 친족과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 4백5십여 석을 관아에 진휼미로 내놓았다. 관에서 완급을 가리어 진휼미를 나누어 주니 구호를 입은 백성들이 거리에 나와 만덕의 은혜를 칭송하였다.
만덕의 이야기를 알게 된 정조는 ‘임금님을 만나는 것과 금강산을 구경하는 것’인 그녀의 소원을 허락하고 ‘내의원 의녀반수’라는 벼슬을 내려 궁에서 살도록 했다. 당시는 ‘월해금법’이라고 하여 제주 여성이 육지로 나갈 수 없도록 국법으로 금지하였었다. 출륙금지령으로 인한 당시 제주 여인의 삶을 생각한다면 만덕의 소원은 매우 상징적인 일이다.
만덕이 궁 생활을 끝내고 제주로 돌아오려 하자 좌의정 채제공이 만덕의 거룩한 뜻을 담은「만덕전」을 지어 건넸고, 병조판서 이가환은 만덕의 선행을 시에 담아 주었다. 제주에 유배온 추사 김정희는 만덕의 진휼 행장에 감동하여 손수 찬양한 글을 지어 양손 김종주에게 전했다고 한다.
기업가 정신에 상응하는 모험과 도전을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한 성공한 CEO로서, 신분 질서가 부여한 귀속적 지위의 한계를 극복하고 유교 사회에서도 인정받아 칭송받게 된 조선의 여인, 김만덕. 그녀의 천벌 같던 어린 시절 불행이 어찌 보면 어려운 사람들의 사정에 함께 가슴 아파할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이를 통해 나눔과 베풂의 삶을 몸소 실천하며 “내가 이만한 거상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다 제주 백성 덕분이고 그들에게 다시 돈을 돌려주는 것은 하나도 아까울 것이 없다.”고 던진 그녀의 메시지는 ‘기업가 정신’과 ‘나눔의 힘’이 아쉬운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