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리사 선생이 누구야~!
차미리사 선생이 누구야~!
  • 양가을 기자
  • 승인 2006.05.2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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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미리사(車美理士)(1880~1955)


차미리사(車美理士) 선생은 1880년 8월 21일 경기도 고양군 공덕리 출신이다. 결혼 3년 만에 남편이 죽은 뒤 기독교에 입교하여 미리사라는 세례명을 얻게 된다. 이때 미국인 여선교사를 통하여 선진국의 실정 및 여성의사회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유학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1905년 여선교사의 알선으로 중국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된 그는 인천에서 떠나는 중국 화물선에 몸을 숨겨 출국한 뒤 쑤지우에 있는 버지니아여학교에 입학한다. 1909년 학업을 마친 후 학교 측의 주선으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캔사스의 스칼라이트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한다. 이때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하고 있는 안창호 등과 함께 교포사회의 부인들을 일깨우기 위한 애국적 부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고, 신한민보의 전신인 대동공보일의 기자로서 활약하기도 한다. 이때 차미리사 선생은 외국에 있는 것보다는 고국으로 돌아가 사회활동을 하고 청년 여성들을 교육시켜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1917년 미국선교회에서 한국으로 파견하는 선교사 8명 중 한 사람으로 귀국한다. 귀국과 동시에 「배화여학교」의 교사와 기숙사 사감에 취임하여 여학생들의 애국ㆍ애족사상 및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3ㆍ1운동 이후에는 평소 신념하고 있었던 소외받는 여성에 대한 교육사업에 착수하기 위하

「여자야학강습소」를 설치, 여성을 대상으로 한 문명퇴치와 계몽운동에 헌신한다. 1920년에는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하고, 이듬해 순회 여자강연단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계몽강연을 실시한다. 이때 4개월간 73개소에서 여성교육의 중요성, 생활개조, 여성해방, 남녀평등 사상 등을 일깨웠으며, 1921년 10월 강연회에서 얻은 찬조금으로 「근화여학교」를 설립,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차미리사 선생은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강연회ㆍ음악회ㆍ연극회ㆍ바자회 등을 개최하였으며, 총독부는 물론 외국인 선교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고 자립ㆍ자력으로 학교를 유지ㆍ발전시킨다.

1934년 2월 안국동에 근화학원을 설립하여 재단이사장을 역임한 후 여성이 독립적으로 생활하기 위해서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여 「근화여학교」를 「근화여자실업학교」로 확대ㆍ발전시킨다. 광복이 되자 차미리사 선생은 그동안 계획하여온 여성교등교육기관의 설립을 추진, 1950년 「덕성여자초급대학」(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을 설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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