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숨은 여성을 찾아서
역사 속 숨은 여성을 찾아서
  • 김윤지 기자
  • 승인 2006.05.20 18: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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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

 
냉정한 시대에서 외로웠던 열정의 소프라노  
 

  1926년 8월 5일,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현해탄에서 남녀 한 쌍이 갑자기 몸을 던져 자살한 기사를 사회면 머리기사로 장식하여 세상을 온통 떠들썩하게 하였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현해탄에서 발생할 자살 사건만으로도 충격적인 뉴스가 되겠지만, 그 사건의 주인공이 윤심덕이었기 때문이다. 윤심덕은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성악가로 한창 명성을 날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남성들의 사랑을 받았던 여성이었다.
  윤심덕은 1897년 1월에 평양에서 가난한 집안의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일찍이 미국인 여의사 홀 부인이 운영하는 광혜의원의 보조원으로 근무하였다. 어머니는 홀 부인의 영향으로 생각과 사리를 판단하는 관점과 생활 습관에 이르기까지 서구적으로 개화된 여성이었다. 그 중에서도 어머니의 교육에 대한 관심은 지나칠 정도로 높았다. 그러니 윤심덕은 남보다 먼저 개화의 눈을 뜨고 신학문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윤심덕은 열살이 되던 해에 진남포 보통학교 3년을 마치고 평양에 있는 숭의여학교를 거쳐 1918년에 경성여고보 사범과에 입학하였다. 그녀는 사범과 내에서도 성적이 우수하고, 노래 또한 매우 잘 불러 인기가 많은 학생 이었다. 주위의 모두가 평양이나 서울의 보통학교로 발령 될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일제의 부당한 발령 조치로 그녀는 벽지로 알려진 강원도 원주공립보통학교로 발령이 났다. 이런 부당한 대우에 분개한 그녀는 굳게 마음 먹었다.
 "그래, 나는 이런 산골에서 여선생이나 해먹을 팔자는 아니야. 노래를 불러야 해."
  이 다짐이 그녀를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가 되게 한 큰 결심의 시작이다. 그러나 그 당시 한국은 강한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성악 공부는 기생짓, 연극은 광대로 업신여기던 것이 일반적이었다. 반면, 일본은 그런 분야를 거창하게 예술이니 문화 교육이니 하며 후진 양성에 애를 쓰며 인재 모으기에 바빴다. 조선총독부 관비생으로 일본을 건너 간 윤심덕은 엄청난 노력과 뜨거운 열정으로 동경 유학생들은 경이로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의 명성은 차차, 한국까지 넘어와 뭇 남성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가 생계를 위해 이러 저리 허둥댈 때마다 좋지 않은 추문만 무성하게 따라다닐 뿐이었고, 이런 것들이 누적될수록 그녀는 생에 대한 환멸과 비관을 한시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것은 결국 윤심덕이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만든다.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 / 너는 무엇을 찾으려 왔느냐 /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 녹수청산은 변함이 없건만 / 우리 인생은 나날이 변했다 /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이는 윤심덕이 유행가요 가수로 전향했을 때, 불렀던 ‘사(死)의 찬미’의 가사이다. 마지막 가사는 마치 현실에 지친 윤심덕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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