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문예상] 수필콩트동화부문 (가작) - 향수
[학술문예상] 수필콩트동화부문 (가작) - 향수
  • 양가을 기자
  • 승인 2006.11.11 20: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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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람 (스페인 3)

 ‘아……또 울어, 바보같이’
 창밖을 보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맨 처음 코스인 마을버스 안에서 난 항상 내 감정에 복받쳐 울어버리곤 한다. 특히 혼자서 이곳을 떠나오게 되는 날이면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자꾸만 ‘내 물건을 놓고 온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곤 하는데, 멍하니 앉아 뭘 놓고 온 걸까 생각하다보면 그제야 깨닫게 된다. 내가 놓고 온 것은 내 마음 한편이란 걸.
 “다음에 올 땐 못 줄 수도 있어. 가지고 가서 차비 해. 부모님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고.”
 몇 번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주머니에 찔러진 꼬깃한 돈 삼만 원. 당해 낼 수 없다는 듯이  받아들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면 길 건너편에서 계속 이 쪽을 바라만 보고 계시는……나의 소중한 사람, 나의 할머니.
 아주 어릴 적 내 기억속의 그 분은 나에게 있어 엄마 그 이상의 존재였다. 엄마는 직장에 나가셨기 때문에 나를 돌보는 건 항상 외할머니의 몫이었고, 서정주 시인의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란 시구(詩句)처럼 나를 키운 건 팔할이 외할머니셨다.
 외할머니의 첫째 딸인 우리 엄마의 첫째 딸로 처음 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그렇게 못생겼다.’던 나를 업고 외할머니는 우리 큰 손녀라며 자랑을 하고 다니셨단다. 외할머니의 손녀자랑을 지겹도록 들었던 한 아주머니께 후에 직접 들은 얘기는 ‘못 생긴 애기를 자랑하고 다닌다.’며 혼잣말로 흉을 보셨다고.
 어느 날은 나를 업고 큰 할머니 댁에 가셨는데 당시 ‘엄마’란 말 밖에 못 했던 내가 외할머니께 “엄마, 엄마.” 라고 부르자 처음 보는 사람이 “늦둥이 낳으셨어요?”란 말을 했었다고 한다. 나중에 큰 할머니가 딸이 아니라 손녀라고 해서 오해가 풀리셨다면서 외할머니는 그 때 일을 미소와 함께 회상하셨다.
 언제 외할머니를 ‘엄마’라 부른 적이 있는지 기억도 못 하는 나지만 외할머니와 함께 했던 시간동안 나에게 두 명의 엄마가 존재했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퇴근하고 나를 집으로 데려가 하룻밤을 함께 보내는 진짜 엄마와, 엄마가 맡기고 간 그 후의 모든 시간을 책임지셨던 가짜 엄마(?)인 외할머니.
 엄마가 직장을 그만 둔 후에도 틈만 나면 걸어서 10분 거리였던 외할머니의 집을 찾아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침에 일어나 우리 집엔 오지도 않고 바로 학교에 갔던 기억도 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그 때까지, 그렇게 10년 동안 외할머니는 나에게 엄마가 되어 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의 일로 우리 가족은 서울을 넘어 경기도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그 해 10월 우리는 모두 인천을 떠났다. 전학 문제로 며칠을 더 머물렀던 난 외할머니와 함께 그 곳에서의 마지막을 보냈는데, 부모님과 떨어져 있는 10살의 아이였던 나는 엄마가 보고 싶다거나 밤마다 생각나서 잠을 못 이룬다던가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지금까지도 내 무뚝뚝한 성격 때문에 엄마가 가끔 서운한 빛을 띠곤 하시니까.
 하지만 그런 성격도 외할머니 앞에선 통하지 않았던 걸까.
 그렇게 나를 마지막으로 우리 가족은 정든 고향과 굿바이를 했고…… 외할머니와 헤어지던 작별의 순간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듯싶다.
 작은 이모 손을 붙잡고 이사 간 우리 집에 처음으로 가던 그 날, 할머니는 집 앞에 배웅을 나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잘 가라, 잘 가라……”
 난 새로운 우리 집에 대한 기대에 한껏 부풀어 할머니와의 헤어짐이 후에 얼마나 많은 눈물로 다가올지 몰랐었다.
 “할머니, 나 갈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 후 돌아서려는데 외할머니는 눈물 섞인, 그렇지만 부서질 듯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가지 마. 할머니랑 같이 여기서 살자.”
 그 때의 나는 얼마나 어린 아이였던지…… 새 집에 가게 된다는 들뜬 마음에 외할머니의 말을 뒤로 하고 그저 웃기만 했었으니까. 그렇게 돌아서며 정든 고향과, 그보다 한껏 정든 외할머니를 남겨두고 난 이 곳으로 왔다. 마치 지금 이 순간처럼.
 당시와 다른 게 있다면 12년이 지난 세월만큼 내 키가 훌쩍 자라 이젠 외할머니를 내려다볼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과, 외할머니의 주름살은 더 깊이 패고 염색을 한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숨겨진 새하얀 시간의 흔적들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 다만 그것 뿐, 떠나는 사람과 떠나는 사람을 바라보며 조용히 손 흔들어주는 보내는 사람의 모습은 12년의 시간동안 한 치도 변함없이 계속되어왔다.
 무한의 그리움과 보고픔에 목마름을 느끼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을까……
 새 집에 이사를 오고 며칠 뒤부터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머릿속을 맴도는 건 온통 10년간을 살아왔던 익숙한 그 곳과 눈을 감아도 보이고 노력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내 몸이, 내 마음이 길들여진 그 곳이었다. 그 곳에는 뛰어놀던 골목길이 있었고 매일 과자며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던 조그만 구멍가게, 그리고 집 앞 평상에 앉아계신 할머니……
 외할머니를 떠올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왔고, 무던히도 서러웠던 난 한동안을 눈물 속에서 잠들어야 했다. 누군가가 보고 싶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그날 밤이 나의 향수병(鄕愁病)에 불을 지핀 최초의 순간이었으리라.
 집으로 돌아오는 3시간 내내 나는 12년간을 반복해온 생각을 여지없이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 생각들은 지겹도록 토해내서 이미 그 끝을 알고 있지만 모두 안다고 해서 시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울 준비를 하고 슬픈 영화를 보듯이 나는 뻔한 결말을 또다시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집에 돌아오는 길은 항상 똑같았다.
 어김없이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따라 이제는 익숙할대로 익숙해진 곳에 다다랐다. ‘또 시작이구나.’ 현실에 대한 의무감이 고개를 들고 이정표를 따라 내 몸도 건너올 때쯤 드디어 긴 여행은 끝이 났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뻗어 무거운 마음과 뒤섞인 값진 돈 삼만 원을 꺼내들었다.
 너무 아까워서 선뜻 쓰지도 못하고 서랍 속에 오롯이 넣어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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