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황은 운명의 갈림길 이다
내 방황은 운명의 갈림길 이다
  • 덕성여대 기자
  • 승인 2007.03.31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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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남 (중어중문)교수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방황을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특히 고등학교 3학년과 대학교 4학년의 시점은 향후 각각 인생의 기로가 되기 때문에 방황도 극에 달하기 십상이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내게도 고교 3학년 시절에 ‘사당오락(四當五落)’을 믿고 열심히 시험준비만 했었던 시절이 있었다. 시험결과는 아쉽게도 예상성적을 훨씬 밑돌았다. 담임선생님은 학교의 대학진학률을 높이게 위해 내게 S대 농대를 권유했다. 재수를 하겠다고 나서던 길에 복도에 떨어진 H대 원서를 우연히 주워들었다. 내가 원했던 생물학과나 천체기상학과와는 전혀 무관한 대학이었다. 하지만 이듬해에 나는 그 대학 중문과의 신입생이 되었다.
1980년대 초반의 대학문화는 지금과 비교하면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판이하게 달랐다. 군사독재 체제였지만 대학 내에서만큼은 낭만과 이상, 민주와 자율이 넘실댔다. 내가 소속된 중문과도 여느 대학의 중문과처럼 대동단결을 모토로 내걸었다. 때문에 다른 종목에서 질 수 있어도 줄다리기만큼은 절대 질 수 없다고 했다. 이런 풍토는 사실 끈끈한 선후배간의 유대에 크게 힘입고 있었다. 과별로 참가하는 행사만 해도 신입생환영회, 학기별 개강 및 종강파티, 춘계 추계 총 엠티를 비롯해서 세계 민속문화제, 모의 올림픽, 모의 유엔총회 등이 있었고, 동문회와 동호회 차원의 활동을 함께 나열하게 되면 매주 거의 한 번꼴로 행사를 치렀던 것 같다.
흥진비래(興盡悲來)라고 했던가. 즐거운 시간은 왜 이리 빨리도 흘러가는지. 대학 4학년이 되면서 내게도 고민과 방황이 찾아왔다. 사람들이 “너 졸업하면 뭐할거냐?”고 묻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놀기는 놀되 장학금 명단에서 제외되지 않을 정도로만 놀았다. 덕분에 대학원 선배들과 교수님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가정형편 때문에 진로를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특히, 모 기업으로부터의 특채 권유를 받은 이후부터는 방황의 바다에 빠져죽는 줄 알았다.
고교 3학년 때 복도에 떨어져 있던 원서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어떤 선배가 나를 구해주었다. 그는 나를 학교 앞에 새로 생긴 부대찌개 전문 기사식당으로 데려가 2인분을 주문했다. 부대찌개의 맛은 감동 그 자체였다. 그 앞에서 나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공부를 하겠느냐는 말에도…….
그 후 나는 공부를 하는 사람이 되었다. 더 이상의 고민도 없었고, 더 이상의 방황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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