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국가보훈처와 대학내일이 주관하는 <대학생 기자단 현장르포 ‘2007 대학생 헤이그 특사단’>에 선발되어 많은 경험을 하고 돌아왔다. 이번 탐방은 헤이그 특사 파견 100주년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가치가 있다. 18명의 대학생 특사단은 헤이그 특사 사건의 재조명과 항일독립운동정신을 계승하고 이를 만천하에 고한다는 당찬 포부를 가지고 임했다. 본지를 통해 8박 9일 동안의 여정 중 헤이그에 머물렀던 7월 13일과 14일 양일간의 현장을 생생히 전달하려 한다.
# 100년 전 恨이 서려있는 곳에서 마음이 시려오다
1907년 6월 24일. 제 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라는 고종의 명을 받고 이준, 이상설, 이위종 특사는 헤이그에 도착한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회의장 안에 출입조차 하지 못하게
된다. 울분의 나날을 보내던 중 이준은 끝내 7월 14일 순국했다. 이준의 순국 후, 이상설, 이위종은 분통한 헤이그를 떠나 흩어졌지만 계속
항일과 구국에 투신하는 생을 살아갔다.
▲ 이준열사기념관 | ||
발길을 돌려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었던 비넨호프 왕궁의 기사홀(현 ‘드 리더 쟐’ 상원의사당 건물) 앞에 도착했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기에 세 특사는 끝내 회의장에 들어오지 못했으리라. 그래서인지 100년 후 찾은 이곳은 그 동안 탐방했던 어떤 곳보다도 발길이 무거웠다. 회의장 문 앞에서 입장을 제지당하자 울부짖으며 호소문을 읽어 내려갔을 이위종을 생각하니 마음이 더 시려왔다. 일본의 방해와 열강들의 냉소로 들어가지 못해 분통했던 그들의 마음이 이렇게나마 전해지고 있었던 것일까?
# 큰 죽음 1000년을 기억하리!
14일 탐방 7일째, 드디어 ‘헤이그 특사
100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뜻 깊은 날이다. 이른 아침부터 미리 진행 준비를 돕기 위해 기념식이 열릴 뉴베 케르크(Nieuwe Kerk·신
교회)로 향했다. 행사 시작까지 시간이 꽤 남아 여유로울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이미 수백명의 교민들과 지한파 네덜란드인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이 날이 탐방 일정 중에 한국인을 가장 많이 본 날일 것이다. 마당에선 한국과 네덜란드의 현대 예술가들이 평화와 미래를 주제로
퍼포먼스를 펼쳐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마치 한국 같았다. 낯선 타국에서 기념식이 열렸지만 이 날 헤이그는 태극기로 물들고 애국가가 흘러나오는
한국 같았다. 어제 느낀 시린 마음은 점점 오늘의 화창함만큼 따뜻해져 왔다.
헤이그시는 7월 14일을 ‘이준 평화의 날’로 선포하고 이준 문화유적지를 지정한다고 한다. 100년 전 서러움 속에 순국한 이준 열사의 추모의 열기가 타국에서도 숭고하게 기려진다는 것에 감동이 밀려왔다. 동시에 역사에 무관심한 대학생들에게 헤이그 특사 사건을 재조명하여 만천하에 고하겠다는 초심을 되새겼다. ‘여러분, 자랑스러워하십시오! 우리에겐 100년 전 유럽의 한복판에서 국권회복을 위해 국제 사회를 향해 일침을 가한 세 명의 특사들이 있습니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 그들을 기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