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는 나의 은사님
기억에 남는 나의 은사님
  • 이소연(문헌정보) 교수
  • 승인 2008.09.28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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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한 아이였던 적이 없었다. 시키지 않은 일은 나서서 해도, 누가 시키는 일이라면 왜 해야 하는지 꼭 짚어보는 아이였다. ‘공부하니?’ 방문을 열면 공부를 하다가도 연필을 놓고 책을 덮어버리는 못된 입시생이었다. 언제쯤인가부터 부모님도 형제도 내가 뭔가 하겠다고 나선 일을 말리거나, 하지 않겠다는 일을 강권하지 않게 되었다. 이쯤이면 권위적인 학교와 선생님들께 적응하지 못한 건 당연하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아무도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는 상태에 적응하며 신입생 시절을 보내고 나서야 학교가 즐거울 수도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문헌정보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고 난 2학년 때, 정작 전공과목보다는 철학, 영문학, 사회학 같은 과목들을 이것저것 들어보면서 공부가 재미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노선생님을 만난 건 3학년 때였다. 참고봉사니 연구전문도서관 같은 과목을 들으면서 문헌정보학에 대한 확신이 섰다. 배운 내용도 좋았지만,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최상의 버전으로 가진 분이셨으므로 선생님이 계신 곳에 나도 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책임감, 따뜻함, 쉼 없는 지적 탐구, 인간에 대한 예의 같은 것들. 학생을 ‘동료’라고 불러 주시는 선생님을 만났으니 권위적인 학교라는 것은 이제 기억도 안 나는 희미한 옛 추억이 되어버렸다.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데는 엄중하셨지만, 제자의 판단에 대한 신뢰만큼은 항상 흔들림이 없으셔서 자존감과 책임감을 함께 키우게 해 주셨다.

대학원을 마치고 나서는 선생님이 관장님으로 계신 도서관에서 실무자로 일할 수 있었는데,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선생님은 또 다른 모습이셨다. 수업 전 두 시간 정도는 두문불출하시며, 이미 여러 번 강의하신 자료라도 다시 읽고, 새롭게 준비하시던 모습. 도서관에 들어오는 단행본과 정기간행물 신간자료를 쉬임없이 모니터링하시던 모습. 관장실에서 서가로 돌아가는 자료들을 8년이나 엿보면서 주요 동향이나 쟁점에 대한 선생님의 지적 연상을 몰래 훔쳐보는 불경을 저질렀다. 그리고 그것이 유학을 가기 위한 연구계획서의 기반이 되었다. 문제를 크게 전체적으로 보면서도 큰 문제에 가려진 세부사항을 놓치지 않으시는 선생님의 정신적 긴장감과, 그 긴장감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당장의 해결책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조급한 열의의 함정을 경계하시는 신중함을 더 배우지 못하는 것이 유학시절 내내 아쉽고 불안했다.

선생님과 같은 길을 가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사회인으로서의 나를 키워 온 빛이자 꿈이었다. 사서로, 학자로, 도서관 경영자로, 여성으로, 인간으로, 그리고 교육자로서의 선생님의 모습과 그 모습을 모방하려는 노력이, 혼란스러울 때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하는 힘이었다. 어느 새 나도 선생님처럼 연구하고 가르치는 자리에 와 있다. 나는 우리 학생들에게 선생님이 내게 되어주셨던 그런 선생님일까. 겉보기에는 별다른 관련이 없어 보이기도 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찬반이나 외연과 내포 관계로 일목요연하게 풀어 주는 강의, 앉아서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들과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는 강의를 하고 있을까. 왜 사서직이 봉사직인지, 문헌정보학이 어떤 방식으로 지식사회 전반에 기여할 수 있을지를 알려주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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