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개혁 이념과 화성 건설
정조의 개혁 이념과 화성 건설
  • 한상권(사학) 교수
  • 승인 2009.03.02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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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학기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생기발랄한 인문학 여행’ 현장수업은 수원 화성으로 정했다. 화성은 1997년 12월 4일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됨으로써 세계적 문화재로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수강생들이 화성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답사 시작 전 “화성하면 제일먼저 떠오른 것이 무엇이죠?” 하고 물으니, “화성연쇄살인사건이요”라는 대답을 하여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경기도에 위치한 화성은 수원과 오산 사이에 있는 평범한 농촌으로 반월공단과 시화공단이 들어서기 전에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그런데 1986부터 14년 동안 10건의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하면서 많은 이들의 뇌리 속에 살인사건이 일어난 끔찍한 곳으로 기억됐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은 영화 ‘살인의 추억’으로 만들어지면서 유명해졌다. 그러나 우리가 답사하려는 화성은 현재의 농촌마을이 아니라 200여 년 전 건축된 성곽이며, 끔찍한 살인사건이 발생한 곳이 아니라, 조선후기 개혁군주 정조의 꿈과 야망이 서려있는 곳이다.

 

조선 4대 도시로 부상한 수원

▲ 당시 화성전도

1789년 7월 11일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영우원을 수원으로 천장할 것을 명하였다. 고모부 금성위 박명원의 상소가 있던 바로 그날, 사도세자의 묘소를 ‘용이 여의주를 희롱한다’는 형국의 화산(花山) 아래로 옮기는 일과 천장을 담당할 관원 및 비용을 결정했다. 공사를 시작한지 3개월 만인 10월 7일, 사도세자의 묘역이 조성되었다. 정조는 아버지를 천장하면서 묘소의 이름도 영우원에서 현륭원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수원을 군사적 요충지로 만들기 위해, 개성처럼 옛 도읍지나 강화· 광주처럼 군사적 요충지에 두는 정2품 외관직 유수부를 1793년 수원에 설치하였다.


수원은 현륭원이 들어서면서 개성· 강화· 광주와 함께 4유수부의 하나가 되어 행정적 위상이 높아졌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수원에 *장용외영을 두어 서울 외곽 방어의 핵심기지로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친위군단인 장용영의 강력한 군대와 재정을 여기에 집결시켰다. 서울 남쪽의 큰 도회지로 부상한 수원 유수부는 어느 지역보다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자 행정적 중심도시가 되었다. 이제 남은 작업은 현륭원 참배 시 거처할 행궁과 여러 도시 기반시설을 갖추는 일이었다.

 

팔달산 아래 새로 건축된 행궁·관아와 성곽


수원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국왕이 현륭원 참배를 오면 반드시 묵을 장소가 필요하였다. 이처럼 임금이 외부로 거둥할 때 임시로 머무는 장소를 행궁이라고 한다. 수원 옛 관아는 화산 아래에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 사도세자의 묘역인 현륭원을 조성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1789년 7월부터 대대적인 관아와 민가 철거작업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관아는 팔달산 기슭 아래에 조성되었다. 팔달산 아래는 이미 200년 전 남인 실학자 반계 유형원이 수원부 관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 지역이었다.


이전 공사를 시작한지 2개월 뒤인 1789년 9월, 행궁 등 관아 건물이 들어섰다. 행궁은 평상시에는 수원부유수가 집무하는 지방행정의 관아로 사용하다가 국왕이 현륭원 참배를 오면 왕의 거처로 이용되었다. 행궁과 관아건물이 들어서니 이제 이를 보호할 성곽이 필요하였다. 성곽을 쌓는 공사는 1794년 봄에 시작하여 1796년 가을에 전체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당초 10년을 계획했던 축성은 1794년 2월 28일에 착공하여 1796년 9월 10일까지 2년 6개월(30개월)의 짧은 기간에 완공되었다. 그리고 성곽 이름을 화산의 ‘화’ 자를 따서 화성이라 하였다. 화성은 지역 이름이 아니라 수원성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이다.

 

▲ 지난 2학기 10월 한상권 교수가 진행한 '수원화성 답사'에 참가한 수강생들의 모습

화성 건축에 반영된 정조의 개혁이념


화성 건축은 계획단계에서부터 정조의 주도적인 의지와 추진에 의해 이루어졌다. 화성 건설 과정에서 드러난 특징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인부들에게 품삯을 지불하고 성을 쌓았다는 점이다. 정조대 이전까지는 국가가 무상으로 노동력을 징발하여 성곽을 쌓았다. 태조 때 쌓았다가 세종 때 대대적으로 보수한 서울 성곽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반면 정조는 수원성을 쌓으면서 공사에 참여한 연 인원 70여만 명의 인부들에게 품삯을 반나절까지 계산하여 지불하였다. 그리고 축성공사를 시작하면서 내린 교서에서, “백성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백성들의 수고로움을 가볍게 하는데 힘써라. 혹시라도 백성을 병들게 한다면 비록 공사가 빨리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나의 원하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즉 화성에는 백성들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착취하지 않고 정당하게 평가해주려는 정조의 개혁이념이 잘 드러나 있다.


다른 하나는 돌과 벽돌을 적절히 배합하여 쌓았다는 점이다. 화성 성역은 우리의 전통적 성곽 건축법인 석축을 기본으로 하며 필요한 부분에는 중국의 성곽 쌓은 방법인 전축 즉 벽돌을 사용하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화성은 조선 고유 성곽제도의 장점과 중국 성곽제도의 장점을 종합한 조선성곽의 결정체였다. 즉 화성은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현실에 맞도록 새롭게 재창조한다는 정조의 법고창신(法古創新) 이념이 구현된 건축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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