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궁중회화와 궁중문화
조선시대의 궁중회화와 궁중문화
  • 박은순(미술사) 교수
  • 승인 2009.07.06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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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중회화는 궁중에서 제작, 감상, 배포된 그림으로 왕실과 국가, 관청이 주관하여 제작되었다. 유학을 지배이념으로 삼아 출발하고 경영된 조선왕조는 유학적인 本末論을 근거로 회화를 賤技로 여기는 관념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회화는 국가를 경영하거나 국가적 이데올로기를 전달하는데 중요한 수단이 되었기에 그림은 여전히 유효한 문화로서 수긍되었다. 그러나 국가적인 경영을 위하여 그림이 필요하였고, 사회적인 공리성과 효용성을 가진 한에서는 그 제작과 사용이 인정되었다.

 공적인, 국가적인 배경에서 수요, 제작, 배포된 회화의 제작은 도화서라고 하는 관아에서 담당했다. 도화서에는 화원畵員이라고 하는 궁중화가들이 국가적인 시험을 통해 선발되어 있었다. 화원들 가운데서도 가장 우수한 2~30명 정도가 정식자리에 임용되었는데, 이들은 대개 10여 년 이상 수련생으로 훈련을 받은 전문화가들이었다. 화원들은 중인층에서 선발되었고, 국가가 공인하는 최고의 화가로서 명예와 안정된 삶을 보장받았다. 화원들은 국가적으로, 공적으로 요구되는 그림을 그렸는데, 화원이 궁중에서 그린 그림을 궁중회화라 하고, 이들이 구사한 화풍을 원체화풍 院體畵風이라고 한다.

 궁중회화는 기능과 주제, 화풍 등을 감안하여 다섯 유형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각 유형은 ▲효용성과 공리성을 강조한 감계화 ▲궁중의 주요한 행사를 기록하여 후세에 귀감이 되기 위하여 제작한 기록화 ▲직접적인 공리성은 아니지만 삶의 상서로움과 길상을 기원하는 효용성을 가진 장식화 등이다. 또한 궁중에서 제작된 감상을 위한 회화와 불화, 회화식 지도 등 다양한 그림들이 제작되었다.

 첫 번째의 감계화는 교훈적인 주제를 다룬 그림을 가리킨다. 궁중에서는 국왕과 공신 등 주요한 인사를 그린 영정, 백성들의 일상적인 삶을 묘사한 풍속화, 교훈이 되는 고사故事를 다룬 고사화, 오륜행실의 유학적 가치를 그려낸 삼강오륜행실도 등이 늘 수요되었다. 그림을 통해서 사람들을 계도하고, 성리학적인 가치를 정립시키며, 왕과 왕세자에게는 통치자로서의 자질을 함양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기록화는 왕과 왕세자, 왕비, 대왕대비 등 왕실의 주요한 인사들과 관련된 생일축하, 관례, 혼례, 상례 등 의미깊은 행사를 기념하고 기록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이런 경우 행사의 가장 중요한 장면을 표현하는 관례가 형성되었다. 기록적인 성격이 강한 그림이기 때문에 좌우대칭의 엄정한 구도를 선호했고, 의례의 과정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을 중시했다.

 세 번째, 장식화는 생활 공간을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하면서 상서로운 행복과 장수, 기복을 기원하는 그림이다. 장식화는 궁궐이라는 대규모의 건축물을 장식하는 기능을 하였기에 규모가 크고, 화려하고 위엄이 넘치는 공간을 만들어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여야 했기에 대개 화려한 채색과 정교한 표현을 중시했다. 모란, 연꽃, 화조화, 문자도 등 궁중 장식화는 이후 민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궁중에서는 내면의 성정性情을 수양하고, 심사心思를 은유적으로 담아내는, 우의寓意적인 감상화도 제작되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궁중회화는 공적이고, 효용적인 기능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어서 개인적인 취향과 감상을 위한 그림을 제작하는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비판이 따랐으므로 그다지 선호되지 않았다. 회화식 지도란 서양의 기호식 지도와는 구별되는 조선 고유의 지도다. 조선시대 동안 지도는 기본적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작되고, 관리되었다. 국방상, 행정상 중요한 사실들을 지도 속에 수록하는 독특한 방식 때문이다. 또한 회화적인 표현을 중시하여 산줄기와 강줄기 등을 표현하였으므로 지도를 제작할 때에는 늘 해당지역에 화원을 파견하여 실경을 관찰하도록 했다. 이처럼 뛰어난 화원이 제작한 지도는 서양지도와 구분되는 한국적인 지도로서 가치가 높다.   

 궁중회화는 국가적인 권위와 위력을 표상하고, 궁중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제작되었다. 따라서 규모와 주제, 화풍, 재료, 미감이 민간의 회화와 다른 점이 적지 않았다. 원체화풍은 궁중회화의 독특한 특징과 성격, 기능을 드러내는 화풍으로 민간에서 그려진 그림과 구분되는 면모가 나타났다. 화원은 나라 최고의 화가들로서 화가로서는 가장 영예로운 지위이지만, 실력이 모자라거나 태만하면 관직에서 쫓겨나는 등 끝없는 수련을 요구하는 어려운 자리였다. 따라서 최고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와 개인적인 노력이 존재하였고, 그 결과 궁중회화는 항시 당대를 대표하는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궁중에서 제작된 그림에는 화가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거나, 화가의 개성이 자제된 경우가 많다. 그림을 천시하는 사회적 관념상, 특히 궁중 안에서 화가의 존재는 미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궁중회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작품을 주문, 수요한 왕이나 관료들의 사상과 예술관, 취향도 작용하였다. 위대한 화가들과 까다로운 감평자들의 활약으로 조선시대의 궁중회화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경쟁력을 갖춘 높은 수준을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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