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18년간의 외침
끝나지 않은 18년간의 외침
  • 이경라 기자
  • 승인 2009.09.12 15: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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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흔들리는 건 뿌리가 얕은 갈대일 뿐

50m 전방 차가운 얼굴, 함께하는 우리
 시위가 시작되기 20분 전, 벌써부터 주한일본대사관 앞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모두가 오래된 친구처럼 악수도 나누고 환한 웃음으로 서로를 맞이한다. 길 건너편에서는 경찰들이 방패를 들고 대열 맞추기에 열중이다. 눈 꼬리는 아래로, 입 꼬리는 위로 휘어진 시위단과는 달리, 반대편 그들의 모습은 박제 부엉이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모여들었고 길을 가던 시민들도 멈춰 서서 관심을 보이며 함께 12시를 기다렸다.  
 자리가 어느 정도 정리되고 정오가 되자 사회를 맡은 ‘진실과 미래-국치100주년사업공동추진위원회(이하 100추위)’의 서우영 운영위원이 제880차 수요시위의 간략한 설명을 인사와 함께 곁들였다. 주최는 항상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에서 하지만, 주관은 다른 시민단체와 연대들에서 돌아가면서 하고 있다. 이번 시위는 100추위가 주관했다. 제880차 수요시위에는 강일출, 이순덕, 길원옥, 이옥선, 박옥선 할머니,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연세대학교 영자신문반, 예수성심수녀회, 한국아나베스트, 진실과 미래-국치 ‘100년사업공동추진위원회’(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민족문제연구소,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의원회, 정신대문제연구소, 흥사단, 성남주민교회, 우리마당, 진실과 정의 토론회, 역사문제연구소) 등이 참석했다.

어느덧 99주년, 내년이면 100년 째
 인사말을 전하기 위해 100추위 상임공동대표인 이해학 목사가 가운데에 섰다. 그는 “우리 할머니들은 일본의 어느 것 하나 욕심내지 않았는데, 일본은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며 우리에게 저지른 죄를 반성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임진왜란 때를 반성하라는 것도, 그 때 가져간 도자기 값을 내놓으라는 것도 아닌, 지금 살아계신 할머니들의 생존을 보장하라는 것”이라며 안타까운 심정을 전했다. 또한 할머니들은 우리나라의 자존심을 살려가고 있는 큰 주춧돌이니 이 자리를 잘 지켜서 하늘의 큰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기원하는 기도를 했다.
 이해학 목사의 힘찬 발언으로 시위단의 열기는 달아올랐고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환호에 보답하듯 사회자는 아시아의 평화와 우리나라의 자존심을 위해 끊임없이 이 자리를 지키겠노라 굳은 다짐을 외쳤다. 며칠 뒤인 29일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합해서 식민지로 삼았던 경술국치(한일합병 이하 국치) 99주년. 내년이면 벌써 100년째다. 내년 국치 100년을 맞기 전에 하루 빨리 일본이 사죄하여 가시적이고 확실한 문제 해결 대책을 마련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단되지 않는 목소리, 다시 서는 역사
 이어 경과보고를 하기 위해 강주혜 정대협 사무처장이 나섰다. 그는 서글서글한 웃음으로 오늘은 날씨가 선선해서 다행이라며 안부 인사를 전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난 18년 동안 이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나? 할머니들이 이렇게 맞서 싸워왔는데? 우리가 진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겠다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 자리는 18년 동안 결코 패배하지도 않았고, 승리하지 않았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고 당찬 목소리를 내고 있다.
 강 팀장은 “깨우치고 달래어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비춰 주는 것이 이웃이라는 생각으로, 때문에 일본을 바른 길로 가게 하는 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언급했다. 또 이 운동이 이제는 할머니들, 아시아의 피해 여성들, 아시아의 시민 단체들만의 운동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18년간 끊임없이 쌓아온 전 세계의 정의와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 시위에 동참하고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대신해서 외쳐주었던 것을 상기시켜주는 말이었다.
 얼마 전인 7월 말 쯤부터 UN에서 열린 <여성차별철폐위원회> 회의에서  위원회에 포함된 각국의 여성인권 사항을 점검했는데 이번에 일본이 검토 대상 국가였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정대협에서도 그동안 일본이 이 문제를 계속 회피하기 위해 어떤 활동들을 해왔는지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일본에서 할머님들과 연대했던 단체들 역시 보고서를 제출했고 일본이 이 문제를 하루 속히 해결할 수 있도록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서 함께 해달라는 활동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서는 각각의 문서를 검토하고 발언들을 경청한 후 지난 20일, 최종 결과 보고서를 발표했다. 결국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서 다시 한 번 할머님들에게 손을 들어주면서 일본이 이 문제에 대해 아직도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고,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하라는 강력한 권고를 다시 한 번 내렸다는 메시지 역시 전해졌다.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단지 허공 속에서 되돌아오는 메아리가 아니라, 곳곳의 사람들의 심장을 울리고 마음을 움직여 이 문제에 함께 동참하게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일본 자민당의 장기 집권이 끝나고 민주당이 집권할 가능성이 높아진 현재, 민주당이 스스로 약속했던 위안부 관련 해결 법안은 공약에서 제외됐다. 일본의 우경화 기조에 맞추어 마땅히 해결해야 할 한일과거사 관련 정책은 민주당 정책에서 거의 실종된 것이다. 민주당을 포함한 일본의 정치세력이 일본 사회의 민주화와 동아시아 평화 공존을 위해 식민지 침탈과 침략 전쟁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사죄, 그리고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한 걸음, 두 걸음 아름다운 동행
 박한용 100추위 운영위원장 겸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부끄러운 99년을 보낼까봐 걱정이 되는 동시에 이렇게 100년을 맞이할까 두렵다. 개인의 목소리는 약하고 들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목소리가 합해지면 함성이 된다”며 “그 함성으로 내년에는 경술국치 100년을 부끄럽지 않게 맞이했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덧붙였다.
 이어서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와준 계명대학교 타카시 교수 외 2명의 일본인들은 일본국민으로서 대한민국에 부끄럽지 않게 응원하고 있다며 발언을 이어갔다. 또한 일본 정부가 위안부에 대한 태도를 확실히 해, 일본 국민들도 모두 알고, 정책도 바뀌어 피해자에 대한 보상도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소망도 함께 내비쳤다. 마지막 발언은 한국아나베스트의 외국인 참가자가 나왔다. 그는 “세상에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소리 높여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여기 계신 할머니들은 당당히 목소리를 내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는 소감을 밝혔다.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학생들은 민중가요 ‘우리 하나 되어’에 맞춘 문화공연을 선보였다. 공연을 하는 동안 학생들과 할머니들을 비롯한 모든 시위 참가자들이 ‘이제 결코 멈출 수 없는 우리 거침없는 사랑으로 해방의 바다 열어가리 우리 하나 되어’ 라는 가사처럼 사랑으로 뭉쳐 하나가 된 듯했다.

붉은 핏대와 하나 된 함성
 마지막 순서인 성명서 낭독은 역사문제연구소의 이정은 사무국장과 흥사단의 문성근 기획국장이 맡았다. 성명서에는 청산되지 않은 한일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문제도 많지만 대한민국의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었다. 일본에게 더 큰 목소리와 치밀한 논리로 가해국의 책임을 물어야하는데, 오히려 한일과거는 잊어버리고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로 나아가자고 엇장단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사가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데 어떻게 미래를 향해 갈 수 있다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정부가 나서도 부족할 텐데 오히려 정부가 한일과거사 청산의 걸림돌이 되는 현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한국 정부는 일본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반성과 사과를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이 빚은 비극의 역사를 규명하고 일본 정부에 대해 사죄와 배상, 재발 방지를 위한 교육 등을 요구하고 실현시켜야할 것이다.    

당당히 걸어 들어갈 그날까지 
 성명서 낭독이 끝나고 ‘바위처럼’을 부르며 시위단은 해산했다. 모두들 할머니들과 정대협의 손을 잡으며 ‘모진 비바람이 몰아친대도, 어떤 유혹의 손길에도 흔들림 없는 바위처럼 살자꾸나’라는 가사처럼 서로를 격려하고 다음을 기약했다.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억해야 한다. 그 기억이 잊혀 지지 않도록 할머니들은 매주 쉬지 않고 이 자리에 서왔다. 하지만 시위가 끝날 때까지 일본대사관의 문은 역시나 굳게 닫힌 채 말이 없었다. 검은 렉서스만이 높은 담장 사이를 유유히 지나갈 뿐이었다. 언제쯤 우리는 일본대사관 건너편이 아닌 문 앞에 가서 두드릴 수 있을까. 이런 바람과 함께 9월 2일 수요일 12시. 881번째 외침이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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