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작가와의 대화 황석영 강연회 초록
제3회 작가와의 대화 황석영 강연회 초록
  • 김민정 기자
  • 승인 2003.11.08 22: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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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문학
 저는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났어요. 해방 된 이후에는 어머니의 고향인 평양에서 살다가 3·8선을 넘어 남하했죠. 6·25당시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좌, 우의 대립과 거기서 발생되는 수많은 희생자들 즉,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많이 봤고 고등학교 때는 시청에서 4·19시위 도중 경찰이 쏜 총알이 옆 친구의 관자놀이를 뚫고 지나가는 사건도 목격했죠. 그 이후 5·16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했고 동국대 시절에도 여러 시위에서 보병과 같은 역할을 하는 등 나라의 큰 사건마다 그 현장에 있었어요. 그 시절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한 적이 있었는데 이러한 바탕으로 씌어진 소설이 ‘객지’나 ‘삼포 가는 길’입니다. 소설이 나온 것은 70년대이지만 그 바탕이 되었던 것은 노동자들과 오징어 배를 타는 등 떠돌아  다니는 생활을 했던 60년대의 경험이었어요. 그 후 광주 항쟁의 현장에도 함께 있었는데 그 때 희생된 사람들과 함께 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마음의 빚을 극복하는데 10년은 더 걸린 것 같아요. 방북을 한 이후 베를린과 뉴욕에서 5년 간 망명 생활을 하기도 했죠. 지금 생각해 보면 내 나라가 아닌 타국에 있었던 망명 시절이 몸은 편할지 몰라도 마음만은 가장 괴로웠던 것 같아요. 귀국이후 감옥 생활보다 망명의 생활이 더 힘들었습니다.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와 5년 6개월의 수감 생활을 마친 뒤에는 부지런히 작품 활동에 전념했어요. 장편 ‘오래된 정원’이랄지 ‘손님’ 그리고 최근의 삼국지까지 쉴새 없이 일했죠.
 사람 황석영과 작가 황석영은 엄연히 다르게 존재합니다. 개인 황석영의 삶은 완전하다고 할 수 없거든요. 두 번의 이혼으로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상실되었고 좌·우의 대립이나 여러 사회적 모순으로 상처를 많이 받기도 했죠. 하지만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가로서 제 삶과 작품은 자부할 수 있어요. 아직도 전 작가로서 할 일이 너무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습니다.
■이데올로기의 대립 그리고 그 속의 잔인성
  최근 송두율 교수의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는데 저는 이것을 남·북의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인한 개인의 희생이라고 생각해요. 정작 송두율씨 자신은 남·북의 차이를 문화적 충돌이라는 관념적 분단으로 볼 뿐인데 남과 북이 거기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어느 한 사람을 남·북이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 거죠.
  현재 국가 보안법은 한 나라의 헌법으로서 인권 유린과 같은 문제점이 많아요. 실제로 이 법의 모법은 일제 치하 당시 우리나라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한 치안 유지법이었으며 동병상련의 6·25당시 반공법으로 바뀐 뒤 후에 국가 보안법으로 그 이름만 변한 것이라 할 수 있죠. 개인의 자유를 침범하는 데 있어 그 의미는 같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분단은 어떨 수 없는 현실이지만 거기에 휘말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번에 또 부각되고 있는 전향, 비 전향의 문제는 논란조차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위대한 국가나 체제도 몇 십 년씩 지녀온 사람의 가치관과 생각들이 한 순간에 바꿀 수는 없어요. 또 어느 국가가 한 사람의 개인의 생각과 속마음을 바꾸는 끔찍하고 야만적인 행위를 무슨 권리로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냉전의 유물일 뿐이에요. 흔히 말하는 좌·우의 대립도 사실상 저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립이라고 생각해요. 과거의 일제 치하시절 행정, 치안, 경제 등의 사회 곳곳에서 고위급에 있었던 친일 세력들이 독립 후에도 세력을 유지하고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것이고 이후 군사 정권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자꾸만 정치적 의미를 부여시키는 거죠.
■이 시대의 학생들에게
 시대가 지나도 사회의 모순이랄지 여러 가지 본질적인 문제들은 변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변화가 불가능 한 것은 아니죠. 6월 항쟁이후 근대적 의미의 시민이 탄생했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민 단체가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활동하고 있으니까요. 변화는 충분히 존재합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하는 변화는 중요한 것 같아요. 작년 ‘붉은 악마’의 경우 그 행동 양식은 조직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젊은이들 개개인의 현실에 대한 진보적 생각이나 변화의 갈구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어요. 지금 유럽의 젊은 세대들은 아나키적 요소가 강해서 개인 그리고 개인의 자유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요. 따라서 어떠한 체제나 이데올로기가 아닌 존엄한 개인의 해방을 강조하고 있죠.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이들은 전후세대로 더 이상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자유분방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자연스러워요. 저는 이렇듯 어떤 사상이라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학생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대학 문화를 살리는 일입니다. 문화의 힘은 무한한 것이기에 그 경쟁력 또한 어느 무엇보다 뛰어날 수밖에 없어요. 최근 대학이 취업과 같은 경제적 논리에 의해 상업화되는 경향이 없지 않은데 무엇보다도 인문적인 대학 문화를 설립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지식인은 인문적 윤리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외국에 나갔을 때 느낀 것인데 외국 대학생들은 자신의 전공도 전공이지만 책을 정말 많이 읽더군요. 우리 학생들도 많은 책을 접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황석영 약력

1962년 경복고교 재학 중 ‘입석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 수상
1970년 동국대학교 철학과 졸업, <조선일보>에 단편 ‘탑’, 희곡 ‘환영의 돛’ 동시 당선
1989년 방북하여 귀국하지 못하고 베를린예술원 초청 작가로 독일에 체류
1993년 귀국, 방북사건으로 7년형 선고
1998년 사면 석방
2001년 <손님>으로 제9회 대산문학상 수상


주요서적

장길산
창작과 비평사 1995년

 

 

객지
창작과 비평사 2000년

 

 

오래된 정원 2000년 5월 창작과 비평사

 

 

삼포가는길
창작과 비평사 2000년

 

손님
창작과 비평사 2001년

 

삼국지
창작과 비평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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