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장자
  • 박원재
  • 승인 2003.11.08 22: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미국 몬태나 주를 배경으로 한 가족의 이야기를 말 그대로 흐르는 강물처럼 녹여낸 이 영화에서 목사인 아버지가 끝 부분에서 했던 대사가 생각난다. 자신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자유분방한 삶을 살다 젊은 나이에 비운에 죽은 둘째 아들을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았던 아버지는 마지막 설교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통하여 그 둘째의 삶과 화해한다. ― “누군가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해도 완벽하게 사랑하는 것은 가능하다.” 누군가를 제대로 알지 못하더라도 그를 완전하게 사랑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누구를 완전하게 사랑하지도 않고도 그를 완벽하게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 말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삶은 타자와의 끊임없는 만남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취하는 삶의 태도는 통상 두 가지이다. 하나는 타자가 내게 오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타자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이 가운데 앞의 태도는, 칸트의 인식론에서도 보듯이, 타자를 내가 설정한 이해의 틀 속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하든 원치 않든 이 방식의 만남에서는 타자에 대한 왜곡이 수반된다. 그것은 객체인 타자를 주체가 설정한 인식의 틀로 편집하여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여 뒤의 태도는 그 틀 자체를 비워버림으로써 내가 타자에게 다가가려는 시도이다. 비유하자면, 주체가 스스로 거울이 됨으로써 모든 타자가 있는 그대로 비춰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주체가 객체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을 통하여 공명(共鳴)함으로써 그 객체의 존재지평과 소통한다. 이런 점에서 이 방식은 본질적으로 심미적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서 이 두 가지 태도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근본적일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심미적인 태도이다. 앞의 영화 대사는 우리의 삶에서 심미적 태도가 인식론적 태도보다 더 근본적이라는 사실을 바로 그 삶에서 터득한 진솔한 경험을 통하여 일러주는 명대사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런 진실과 무관하게 우리의 일상은 언제나 주체와 객체의 진정한 소통을 가로막는 인식론적 태도에 의해 휘둘러지곤 한다.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는 여러 가지이다. 개인적 선입관에서부터 인간 종(種)의 선험적 인식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학습을 통하여 세뇌되는 각종 가치관에서부터 인간이 세계를 그려내는 필수적인 화구(畵具)인 언어에 이르기까지. 그러므로 타자와의 완벽한 소통을 꿈꾸는 삶에서 이런 문화적 장치들의 억압적 속성을 간파해내고 그로부터 부단히 탈주하고자 하는 시도는 언제나 중요하다.
 2,300여년 전에 살았던 장자의 생각이 지금도 유효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신이 나비가 된 꿈을 꾸고는 자기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자기가 된 것인지 모르겠다고 한 그의 독백이 스스로 거울이 됨으로써 세계와 진정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원초적인 바람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주체의 해체야말로 그 주체의 절대적인 자유를 보장하는 길임을 천명하고 있는『장자』는  이런 점에서 전근대에서 태어나 탈근대를 겨냥한  역설의 책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도봉구 삼양로144길 33 덕성여자대학교 도서관 402호 덕성여대신문사
  • 대표전화 : 02-901-8551, 8558
  • 청소년보호책임자 : 고유미
  • 법인명 : 덕성여자대학교
  • 제호 : 덕성여대신문
  • 발행인 : 김건희
  • 주간 : 조연성
  • 편집인 : 고유미
  • 메일 : press@duksung.ac.kr
  • 덕성여대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덕성여대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duksung.ac.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