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의 새로운 집단, 준문맹
현대사회의 새로운 집단, 준문맹
  • 최석재 고려대학교 국어소통틍력연구센터 선임&
  • 승인 2010.03.02 11: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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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대학에서 글쓰기 관련 강의를 했을 때의 일이다. 학기 초였던 그날은 본인이 겪었던 일을 글로 써보는 시간이었다. 주제는 이전 시간에 미리 알려주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글을 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15분 쯤 지나서 돌아보니 적지 않은 학생들이 글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 지 몰라 몇 줄 못쓰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학생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어떤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데 설명 방법을 찾지 못하여 약도를 그리듯 사각형과 화살표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 학생은 글쓰기와 관련이 깊은 국어국문학과 학생이었다. 하지만 본인은 그림으로 설명을 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최근 텍스트를 읽고 자신의 생각을 쓰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이른바 ‘준문맹(準文盲, Functional Illiteracy)’에 속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텍스트를 읽을 수도 있고, 쓸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일을 ‘깊이 있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텍스트를 읽기는 하되 문장과 행간의 의미를 충분히 읽지 못하고 글자와 단순 정보만을 볼 뿐이고, 글을 쓰기는 하되 주장과 논리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단편적인 사실을 떠오르는 대로 쓰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들은 과제로 내준 텍스트가 조금만 어려워도 읽기를 포기하고, 어렵게 보고서를 썼다고 해도 이해하기가 어려워 읽는 이가 맥락을 추측해야 한다. 실제로 이러한 학생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각 대학에서는 고전 텍스트를 다루는 소위 핵심 과목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가고, 그 자리를 학생들이 이해하기 쉬운 실용적인 과목들이 대신하고 있다. 학생들의 요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대학의 수준이 낮아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그렇다면 준문맹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시험 위주의 교육 방식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겠다. 중고등학교의 모든 교육은 거의 시험을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시험은 평가가 객관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객관식 선다형 또는 짧은 단문으로 답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훈련만으로는 사고력과 문장력이 늘어나기 어렵다.

둘째, 정보의 습득이 대부분 인터넷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인터넷의 글들은 적은 분량을 선호한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읽는 포털사이트의 뉴스 기사는 3분 이내에 읽을 수 있는 양으로 써진다.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종이 신문과 서적을 다양하게 읽어야 하는데 단편적인 인터넷 정보가 주요 지식 창구가 되어 그러지 못하는 것 같다.

셋째,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과거 대학생들은 대개 무게가 있는 철학서를 보며 인생을 고민하였고, 문학과 예술 작품들 속에 빠져들곤 하였다. 그들의 손에는 늘 그러한 인문학 책들이 함께 하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 손에 주로 시험용 서적만이 들려 있는 것 같다. 깊은 생각과 풍성한 문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동서양의 깊이 있는 글과 생각을 많이 접해야 한다. 결론만이 아니라 결론에 이르게 된 과정을 같이 생각하며 따라갈 때 우리의 사고와 표현도 넓어진다.

무한 경쟁 시대에 이른 지금, 시간을 많이 요하는 사고력과 문장력 향상 노력은 어울려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말 무한 경쟁에서 앞서 나가기를 원한다면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지식의 생산력은 깊이 있는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여 자신의 생각으로 표현하면서 커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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