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힐의 역사는 그 의미를 좁히면 15세기 중세 유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의 모양과는 달리 그 당시에는 바닥 가운데에 통굽이 위치한 모양인 ‘초핀(choppin)’을 착용했는데, 길거리에 널린 오물들을 피하기 위한 것이 시초였다. 그러다 프랑스 왕실에 시집간 카트린 데 메디치(Catherine de Medici)가 결혼식에 키가 커 보이기 위해 하이힐을 신었고, 그 시도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온 유럽이 하이힐을 스타일 아이콘으로 취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이힐의 의미가 서서히 변질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패션의 일부로 포함된 하이힐은 신분을 나타내는 도구로서 사용되다, 점차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모양이 바뀌고 여성미, 섹시미를 남성에게 표출하는 수단이 된다. 이 변화의 종착역이 당시 패션에 민감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매춘부들이 하이힐 유행의 선두주자가 된 것이다. 자신의 몸을 상품으로서 내건 매춘부들에 의해 현재 하이힐의 모양이 정착되다시피 하고, 남성이 중심이 되던 사회에서 그녀들에게 밀릴 수 없었던 상류사회의 여인들이 그 유행을 좇았다. 원래의 용도에서 완전히 벗어난 하이힐은 남성에게 자신의 성적인 가치를 어필하는 보조수단으로 정착된 것이다.
수많은 입소문을 남긴 사드 후작의 입을 빌리면 ‘에로티시즘의 등가체 이자 고전적인 페티시즘, 팜므파탈의 상징’이 바로 하이힐이다. 이런 시선을 내포한 하이힐이 키가 커 보이고 다리라인을 예뻐 보이게하며, 배와 엉덩이 부분의 살집을 일시적으로나마 감춰주는 ‘효능’을 지녔다고 해서 현대에 와서까지 여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마땅한가? 프랑스의 68혁명 당시 들불처럼 일어난 페미니즘 운동에서 가장 먼저 벗어던져진 것이 바로 하이힐이란 것에서부터 우리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 ‘신발을 신고 걷는다’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에서조차 발목골절을 감안해야 하는 ‘족쇄’를, 우리는 페미니즘 적 기치가 곳곳에서 휘날리는 현재까지도 패션의 이름으로 정당화 시키고 있지는 않는가. 익숙해진 나머지 아무렇지 않게 옆에 있는 물건이라도 새로운 시선으로 조망하는 것이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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