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사라지고 우리만 남았다
모두가 사라지고 우리만 남았다
  • 김두진(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 승인 2010.09.18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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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사람과(Hominidae)에 속하는 4속 7종의 동물 중 하나이다. 사람과에는 고릴라, 침팬지, 오랑우탄, 사람(Homo) 등이 있다. 사람이 이들 유인원과 분리된 시점은 대략 250만 년 전후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모두 10여 종의 사람이 있었는데, 오늘날 지구에 창궐한(?) 우리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종을 제외한 나머지 종은 모두 멸종했다. 멸종한 인류들에는 최초로 도구를 사용한 호모 하빌리스를 비롯하여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키가 1m가 채 안 되며 1만 년 전에 멸종한 것으로 추정되는 호모 플로레시엔시스 등이 포함되어 있다.
   흔히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호모 에렉투스로 진화하고, 그것이 다시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했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실은 서로 다른 인간들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단적인 예로 네안데르탈인(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은 15년 전만 해도 호모 사피엔스의 직계 조상으로 여겨졌으나, DNA 연구 결과 우리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와는 2세를 낳을 수 없는 관계임이 밝혀졌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인간 중 가장 강인한 육체를 가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쩐 일일인지 2만 년 전에 멸종하고 만다. 이들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우리와 함께 강의를 듣거나 서로 사랑에 빠지는 상상을 영화로 만들어도 재미있을 것 같다.

인간은 어떻게 남게 된걸까
진화의 과정 속에서 인류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뇌의 용적이 커지고 직립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나무 위에서 살다가 숲이 초원으로 바뀌는 격변을 체험하며 어쩔 수 없이 들판으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멀리 볼 수 있는 시력이 중요해졌다. 다른 동물과 달리 눈이 정면을 향하게 된 것도 이후 인간이 주위 환경을 지각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 허리를 펴고 걷게 되면서 다리가 튼튼해졌고, 반대로 출산이 어려워졌다. 여러 종류의 인간들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과정에서 집단을 이루고 소통 능력을 발전시킨 종들이 오랜 기간 생존했다. 동물적인 본능과는 구분되는 ‘문화’를 발전시킴으로써 인류의 진화는 더욱 빠르게 진행된다.
   십여 명 단위로 수렵과 채집을 하며 떠돌던 생활에서 정착을 하고 무리를 이루어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전에 없던 질병들에 노출된다. 농사라는 것이 대개 물이 있고 여름이 무더운 곳에서 하기 마련인데, 식물이 잘 자라면 다른 생물들도 번성하기 마련이다. 농경은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므로 인구는 불어났지만 그만큼 다양한 생물들과 지속적으로 접촉하게 했다. 그들 중 일부는 심각한 전염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숙주인 인간이 모두 죽으면 당연히 자신들도 살 곳이 없어지게 되므로 세균들은 스스로 인간과 공존하는 길을 택한다. 인간은 내성을 갖게 되고, 병원균은 스스로의 독성을 누그러뜨리는 공진화(co-evolution)의 과정을 걷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문명을 이루는 과정에서 다른 동물들과 달리 포기하게 된 능력도 많다. 단적인 예로 인간은 외부 세계의 정보 중 약 80% 이상을 시각에 의해 인지한다. 이는 후각이나 촉각, 청각 등이 점점 둔해진다는 뜻도 된다. 또 땅의 울림이나 지구의 자기장을 느끼는 능력도 잃어버렸다고 한다. 중세 유럽의 뱃사람들은 대낮에도 별자리를 보고 배가 가야 할 방향을 찾았으나 이제 우리에게 그런 능력은 사라졌다. 대신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여 생물학적 능력 이상의 능력을 갖게 되었다. 멀리 있는 것을 잘 보기 위해 안경이나 망원경을 만드는 식인데,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숨겨진 차원>에서 ‘연장물 extension’이라는 개념으로 그것들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들은 약 4만 년 전에 등장했다는 것이 통설인데, 이는 4만 년 동안 우리의 몸에 축적된 유전자의 변화가 새로운 종의 탄생에 이를 정도는 아님을 의미한다. 즉 우리 몸과 생물학적 능력은 4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다. 생물학적으로는 다를 바 없는 몸이지만 4만 년 전 인간과 오늘날의 인간은 크게 다른 점들이 있다.
   먼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종의 한계 수명이 어느 정도인가라는 문제가 있다. 생식능력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오랜 기간 살아남는 동물들이 있지만 인간은 유독 잔여 수명이 길다. 의학의 발달 때문인 것 같지만 기원전에도 80세를 가뿐히 넘겨 산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의학 발달은 평균 수명 연장에 도움을 줬지만 한계 수명의 연장에는 그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듯하다. 종 자체의 한계 수명과 평균 수명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사회를 어떤 식으로 움직여 나갈 것인지와 관련된다. 기술 발전을 통한 종의 형질 변경을 노릴 것인지, 아니면 가혹한 형벌이나 전쟁 등을 피하고 자연 상태에 근접한 삶을 살 것인지 논쟁이 필요한 시점이다.

인간의 존재란
   인간 진화의 과정에서 다른 궁금증을을 가져 볼 수도 있다. 생태계 최고의 포식자가 된 인간은 으레 포식자가 그러한 것처럼 점점 포악해지고 있는 중인가, 아니면 사회제도와 교육 등을 통해 점차 유순해지고 있는 중인가. 수만 년 동안 인간들이 벌여온 온갖 짓거리들(?)을 머릿속에서 그려보아야 할 문제인데, 이는 의외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과 맞닿는다. 이와 관련하여 진화생물학이나 사회생물학(진화심리학)에서는 이타적 행위조차 종 자체의 존속을 위한 이기적 행위로 해석을 한다. 이를 테면 리차드 도킨슨의 <이기적 유전자>나 매트 리들리의 <이타적 유전자>가 이러한 주장의 대표적 저서이다.
   그러나 사회과학자들은 생물학의 원리로 인간의 사회를 설명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에 의구심을 갖는다. 흔히 사람들은 현재 살아남은 생물들은 ‘강인’한 생명력을 가졌기에 진화의 경쟁에서 ‘승리’했으며, 자연을 지배하는 인간이야말로 진화의 정점에 오른 존재라고 믿는다. 오로지 생존만을 목표로 보는 시각에서는 생존이 곧 정의요, 도덕이다. 이 시각에서는 '승리'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를 허용하지 않는다. 번식을 잘 해서 개체 수가 늘어나는 것이 기준인지, 아니면 다른 생명을 잘 죽이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인간의 수가 이렇게 늘어나고 있음이 ‘승리’의 기준이라면, 반대로 점점 줄고 있다는 ‘백인종’은 도태 중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 현실이 그러한가.
   사회생물학(진화심리학)이 비판을 받는 이유가 그것이다. 언제나 현 상태를 ‘진화’의 정점으로 간주하기에 사회를 개혁할 필요가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구를 지배한다는 인간이 점점 다양한 신체적 능력을 잃어가고 있고, 바이러스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쾌감 이외의 감각을 몸 바깥으로 밀어내며 자연을 끝없이 착취하도록 상호 경쟁시키는 이 과정을 결코 진화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생명 진화의 조건 중 하나가 유전자 조합임은 수많은 인류 중 우리가 아직 멸종하지 않은 이유가 상호 경쟁의 원리 보다는 협력과 공생의 원리로 살아온 데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 앞에 놓인 미래를 어떻게 헤쳐갈지 이로써 답은 분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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