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회 학술문예상 소설 우수 당선작 - 와크와크 섬
<제36회 학술문예상 소설 우수 당선작 - 와크와크 섬
  • 박경진(국어국문 07)
  • 승인 2010.11.22 16: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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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느다란 소녀의 다리는 벌어진 열매 사이로 축 늘어져있었다. 뭉개진 발톱은 그 흔적을 잃은 지 오래였다. 탄력을 잃은 무릎에서 뜨거운 김이 새어나왔다. 살결은 수분이 빠진 비곗덩어리였다. 소녀는 곧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마른 모래더미 위에 떨어졌다. 와크 와크. 소녀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소녀는 죽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사체가 된 소녀의 형체는 빠르게 일그러져갔고 피부에서는 썩은 생선냄새가 났다. 나의 시선을 즐기기라도 한 듯 모래는 소녀의 몸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소녀를 뱉어낸 열매에서는 탐욕스런 회갈색의 진액이 흘렀다. 나는 그 곁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태오도 나의 뒤에서 그저 와크와크 나무를 바라보기만 했다.

J회사에 면접을 보고 돌아온 날, 나는 태오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석 달 만에 다시 만난 우리는 가벼운 안부 인사를 나눈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그가 얘기를 꺼낼 때 까지 기다렸다. 태오는 몇 번의 말을 삼킨 후 나에게 말을 걸었다. 바로 그날, 태오가 입을 연 순간부터 새벽이 떠날 때 까지 우리는 와크와크 섬에 머물렀다.
태오는 취업 스터디에서 만났던 남자였다. 취업 커뮤니티 사이트에는 스터디 모임을 만들자는 A의 게시글이 올라와 있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신청 댓글을 남겼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데도 A는 나와 동갑내기였다. 그녀는 회사 취업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스터디를 만들게 되었다고 했다. 경영학을 전공한 G군과 L군은 같은 학교 친구였다. 가장 늦게 합류한 회원은 태오였으며 영문과 사학년 학생이었다.
그렇게 모인 인원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스터디 모임은 매주 월, 수, 금요일에 진행되었다. 우리들은 커피 값이 저렴한 카페를 전전하며 만났다. 그 곳에서 취업에 관한 자료를 공유했다. 공인 영어 시험 일정이 가까워지면 함께 모의시험을 쳤고 공채입사 시기에는 면접 준비를 도왔다. 때로는 D기업의 면접 패턴을 분석하거나 J회사의 인·적성 시험 후기까지 우리들은 쉴 새 없이 정보를 쏟아내었다. 그들과의 대화는 그렇게 목적이 정해져 있었다.
태오는 스터디 모임이 몇 차례 진행 된 후 찾아온 친구였다. 더위와 불안에 지친 여름밤에 그는 차가운 얼굴로 자신을 소개했다. 영문과 학생이며 취업 준비를 하고자 스터디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그저 너무 흔한 말이었다. 나는 스터디 친구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이 서로에게는 부담이었다. 그래서 나는 태오에게도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우리들은 약속한 듯이 필요한 만큼만 알았고 효율적인 대화에만 집중했다.
상반기 취업준비가 끝날 무렵 경영학을 전공한 G군이 먼저 취업을 하게 되었다. 한 명의 인원이 줄어든 것뿐인데도 스터디는 점차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약속 시간을 어기거나 모임에 나오지 않는 친구도 많았다. 그런 일이 한두 달 더 반복될 즈음 태오는 A에게 스터디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스터디 친구들은 연이은 취업 실패와 자심감 부족이 태오가 그만둔 이유라며 수군거렸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단 한번 태오와 가까워지게 된 계기가 있었다. 작년, 하반기 채용이 끝나가는 시기에 스터디 회원들과 가졌던 술자리에서였다. 각자 면접을 보러 다니느라 지쳤던 그 날, 우리들은 G군이 다녔던 대학교 근처의 삼겹살집에 모였다.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은 회사를 제외하고는 모두들 취직이 안 된 상태였다. 속상한 마음을 달래며 우리들은 서로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며칠 전 공무원 시험을 치른 A양은 부족한 점수 탓에 이번에도 합격이 어려울 거라며 힘들어 했다. G군과 L군은 이번에 합격한 사람들의 스펙을 나열하기에 바빴다. 태오는 우리의 넋두리를 듣고도 타들어 가는 고기를 바라만 보았다. 나는 취기에 빠져 대화에 끼지 못했다.
술자리는 길지 않았다. 오랜 수험생활에 지쳐버린 A가 일어서자 G군과 L군도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태오와 나만 삼겹살집에 남아 식은 된장찌개를 앞에 두고 앉아있었다. 고기의 비린내에 속이 안 좋아진 나는 밖으로 나가자고 말했다. 태오는 기다린 듯이 나를 따라 나왔다.
거리는 한산했다. 좀 전에 북적거리던 삼겹살집에서 벗어나자 우리 앞에는 적막한 길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밤의 세계는 둘로 나뉘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지나가는 택시가 없었다. 우리는 큰 길로 나가기 위해 조금 더 걸었다. 나의 구두 소리가 빌딩의 벽에 부딪쳐 울렸다. 태오에게 말을 걸고 싶었던 나는 발걸음 소리로 그를 자극시켰다. 하지만 겨울밤의 한기는 나의 발을 조금씩 붙잡아 두었다. 발걸음은 서서히 아득해졌다.
택시가 오길 기다리면서 태오는 처음으로 나에게 자신의 얘기를 했다. 어디든 떠나있고 싶어. 내가 머무르고 있는 이곳에서 나는 더 이상 흘러가는 시간을 용기 있게 바라볼 수가 없어. 겨울바람은 그렇게 그의 몇 마디를 전해 주었다.
아마도 태오가 탈퇴를 결정하게 된 이유는 그날 밤에 흘렸던 말 속에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벌써 두 번의 가을을 지나쳤다. 그렇다. 나는 아직까지 직업을 구하지 못했다. 무엇이 나의 바람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건, 나는 매일 시간을 마주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하루가 지나갈 때마다 나의 뺨을 조금씩 할퀴어댔다. 그래서인지 나의 얼굴은 항상 생기가 없었다.
나는 하루가 시작되는 공간은 자취방이다. 대학 입학을 하자마자 구한 이 방은 노부부의 거실과 벽 하나를 두고 나눠져 있다. 가끔 노부부의 무료한 대화가 들릴 때면 나는 이불을 걷고 대문 밖으로 나가곤 한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천 원짜리 김밥으로 밥을 때우기도 하고 분식집 옆 과일가게에서 사과 몇 개를 사오기도 한다. 그렇게 나만의 시간을 보낸 후에는 어김없이 이 눅눅한 방에 돌아와 내일을 기다렸다.
정오가 지날 무렵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유어 리포트 - 한 건의 리포트가 신청되었습니다.」 나는 메시지를 확인한 후, 컴퓨터를 켰다.
‘유어 리포트’는 내가 대학교 삼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사이트다. 이곳에서는 일정한 금액을 내기만 하면 대학 수업에 필요한 보고서를 구할 수 있다. 메인 화면에는 리포트를 제공하는 사람들을 전공별로 분류한 게시판이 있다. 그 중에서 나는 국어국문학과 란에 ‘so you’이라는 아이디로 올려져있다. 나의 아이디를 클릭하면, 그동안 작성했던 리포트가 종류별로 제시되어 있으며 간단한 이력과 함께 프로필이 입력되어 있다. 이 사이트의 회원들은 각자 필요한 자료를 얻기 위해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한 후, 최종 선택을 한다. 나는 그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 리포트 몇 가지를 선별하여 삼 페이지 가량의 미리보기를 할 수 있게 해 두었다. 만약 어느 회원이 나에게 보고서 작성을 의뢰하고자 한다면 주제와 거래 가격을 적은 쪽지를 보낸다. 나는 그가 제시한 보고서의 분량과 금액을 확인한 후 수락여부를 결정 한다. 체결이 이뤄지면 기한 내에 나는 그들이 필요한 문서를 작성한다. 그러면 며칠 후 내 통장에는 수수료 삼십 프로를 제외한 금액이 들어온다.
내가 처음 일한 곳은 집과 가장 가까운 편의점이었다. 편의점은 집의 거리만큼 내가 접근하기 쉬운 곳이었다. 물건을 정리하고 계산을 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장의 과도한 감시와 의심 때문에 그곳에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그 후, 나는 그 편의점에서 지하철로 삼십분 거리에 있는 백화점 의류 코너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손님을 향해 웃으며 응대하는 나의 얼굴이 매장의 거울에 비칠 때면, 나는 마치 영원히 그 가면을 떼어낼 수 없을 것 같은 불안에 휩싸이곤 했다. 아름다운 옷과 화려한 사람이 그득한 그 곳에서 나는 다시 움츠러들었다.
또다시 나는 그 백화점에서 버스로 여섯 정거장 떨어져 있는 보습학원에서 중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쳤다. 몇 달이 지나자 원장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월급을 주지 않으려 했다. 나는 결국 석 달 치의 급여를 받지 못한 채 그곳을 그만두었다.
학원을 나온 다음에는 학교 근처의 S보험회사에서 사무보조 일을 했다. 육 개월 계약직이었다. 기간이 만료된 후에는 부족한 생활비를 걱정하며 학교를 다녔다. 그러던 중 나는 ‘유어 리포트’의 채용 공고를 보게 되었다.
‘유어 리포트’의 사무실은 강남에 있었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인사 담당자의 메일로 보냈다. 이틀 뒤, 회사 측에서 면접을 보자는 연락이 왔었다. 담당자는 면접을 보러 올 때  직접 작성한 보고서와 성적 증명서를 출력해오라고 했다. 나는 회사의 자세한 위치를 묻고 전화를 끊었다.
‘유어 리포트’의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내 또래의 대학생들이 면접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자는 생각보다 많았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한 시간 가량 기다린 끝에 나는 회사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준비한 자료를 전달했다. 직원은 간단하게 내가 앞으로 하게 될 일에 대해 알려준 다음 나의 리포트를 몇 번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직접 작성한 게 맞는지 재차 물었다. 서류 검토가 끝나면 연락을 주겠다고 담당자는 말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유어 리포트’에서 전화가 왔다. 그렇게 나는 이곳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유어 리포트’에 접속한 나는 새로 온 쪽지를 확인했다. 쪽지의 발신자는 릴리투였다.
릴리투는 매학기 마다 나의 보고서를 구매한 회원이었다. 그 기간이 어느새 삼년 가까이 되었다. 그가 이번에 부탁한 것은 국문과 학사 졸업 논문이었다. 지난번에도 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같은 요청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거래는 무난하게 이뤄졌다. 릴리투는 논문 작성에 대해 적지 않은 가격을 제시했다. 나는 수락 버튼을 누른 후 그에게 답문을 보냈다. ‘릴리투님, 구체적인 완성 날짜와 논문 주제를 알려주세요.’ 나는 답변이 올 때까지 우선 기다리기로 했다.
내가 릴리투에 대해서 아는 사실이라고는 나와 같은 국문학을 전공한 학생이라는 것뿐이다. 나는 보고서를 사는 이들이 누구인지 알 필요가 없다. 혹은,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거래의 과정은 간단하다. 필요한 자료를 쓰고 완성한 파일을 요청자의 메일로 보낸다. 그러면 ‘유어 리포트’ 측에서 결제과정을 확인 후 나의 계좌로 돈을 입금해준다. 통장에 새겨진 숫자들이 나에게 큰 의미를 주었던 적은 없다. 나는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 일을 놓지 않았다.
나는 이런 일 외에도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거나 수정하는 일도 한다. 타인의 자기소개서를 수정할 때면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성장과정과 이력을 엿봐야만 한다. 그 순간마다 나는  검은 글자위에 위태롭게 서있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들의 얼굴은 까만 잉크로 뒤덮여 있었다. 그래서 뚜렷한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만은 선명했다. 나는 조용히 그들이 남긴 부스러기를 쓸고 남은 먼지를 닦았다.
이주일 전부터 하반기 채용 모집이 시작되었다. 나는 카피라이터를 모집하고 있는 W광고회사에 지원서를 냈었다. 모집인원은 단 한명이었다. 삼십분 후면 회사의 홈페이지에 일차 서류합격자가 발표된다. 나는 남은 시간을 확인한 후 창문을 열었다. 어젯밤에는 비가 왔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골목길에는 갈 길을 잃고 쓰러진 빗물들이 아스팔트 위에 고여 있었다. 나는 창가를 벗어나 눅눅한 이불 위에 엎드렸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오후 세시. 나는 W회사의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일차 합격에 관한 안내문이 공지사항에 올라와 있었다. 결과를 알기 위해 주민번호와 이름을 입력했다. 화면은 빠르게 넘어갔다. 흰 화면위로 ‘서류전형 합격’이라는 붉은 글자가 떠 있었다. 나는 기뻐할 여유도 없이 이차 전형에 관한 공지문을 읽었다. 첫 면접은 프레젠테이션으로 선별하며 발표시간은 최대 삼십분이었다. 최종 선발은 삼차 전형인 심층면접에서 결정이 난다. 당장 준비해야 할 면접의 주제는 기존의 광고물을 토대로 새 카피 문구를 세 편 작성해 오는 것이었다. 일주일간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일차 합격을 확인한 다음, 나는 취업 정보 카페에 접속했다. 이곳에서는 오늘의 채용공고를 한눈에 알 수 있으며 취업에 성공한 사람들의 글이 가득하기로 유명하다. W회사의 일차 서류 전형 합격자가 발표되자마자 카페의 접속인원이 많아졌다. 합격한 사람들은 다음전형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바빴고 불합격자들은 그들의 스펙을 묻기에 분주했다. 빠르게 올라오는 글을 외면한 채 나는 로그아웃을 했다. 
나의 책상에는 낡은 탁상달력이 있다. 그 달력에 선명했던 숫자들은 거듭된 낙서로 가려져있었다. 매달 십이일, 십사일, 십칠일은 학자금 대출의 이자를 납입해야 하는 날이다. 나는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매번 꼼꼼히 달력위에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그동안 봐왔던 면접에 관한 메모는 어느새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달력에 엉겨있었다. 매달 기억해야 할 날짜와 지나버린 기회들은 종이위에 피어난 곰팡이로 그 흔적을 대신했다. 나는 습기로 눅눅해진 달력의 귀퉁이를 습관처럼 찢어내었다. 종이는 더 이상 하얗지 않았다.
다음날 릴리투에게서 답장이 왔다. 특별한 요구사항은 없었으며 논문 주제도 무엇으로 하든지 상관이 없다고 했다. 그는 논문을 제때 제출할 수 있게끔 정확한 기한만 지켜 달라고 했다. 그가 부탁한 날은 27일이었다. 나는 언뜻 그 다음날이 W회사의 최종 면접일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나는 논문에 필요한 참고문헌을 빌리기 위해 이년 전에 졸업한 대학교 도서관으로 갔다. 졸업생의 대출제한 권수는 세권이다. 논문을 쓰기에는 부족했기에 나는 아직까지 졸업을 유예하고 있는 친구 D에게서 학생증을 빌렸다.
책은 각자의 자리에서 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여러 번 들춰보면서 비어있는 책의 공간을 바라봤다. 나는 빈 공간을 매우기 위해 제자리에 책을 꽂아두었다. 도서관에 머문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머리카락 사이로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필요한 서적을 찾았다. 대출이 힘든 책은 필요한대로 복사를 했다. 친구의 학생증으로 빌린 책을 안고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책은 내 품에서 위태롭게 안겨 있었다.
지난 몇 년간 나는 이곳에서 다른 학생들의 리포트를 작성했었다. 수업을 마치면 나는 곧장 도서관으로 갔다. 신청 받은 보고서의 주제에 따라 책을 찾고 논문을 읽었다. 그 대가로 얼마를 받든 나는 그들의 과제에 열중했다. 그렇게 도서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나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학교 문을 나섰다. 가방 속에 가득한 책과 복사물은 내 곁을 따라 함께 버스에 올랐다.
 
태오는 약속한 모임장소에 늘 먼저 나와 있었다. 그날은 나도 예정보다 일찍 카페에 도착했었다. 내가 그의 곁으로 다가갔을 때, 태오는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책에 빠져있던 그를 방해할 수 없었기에 살며시 맞은편에 앉았다. 그가 나를 바라볼 때 까지 기다리면서 책의 제목을 읽었다. 『그 세계의 흔적은 중세의 지도에 있다』나는 ‘중세의 지도’를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그 사이 태오가 책을 내려놓았다. 내가 온 것을 이제야 안 그는 멋쩍은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나는 무슨 책을 읽고 있었는지 물었다. 그는 흥미로운 섬을 알게 되었다는 말로 책의 내용을 대신했다. 커피를 주문한 후 태오에게 그 섬에 대해 알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때, L군이 커피숍 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태오는 언젠가 얘기해 주겠다며 미소를 남겼다.
어쩌면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약속이었다. 그가 취업 스터디에 더 이상 나오지 않았을 때 나는 이미 그 기대를 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태오는 그때의 짧았던 대화를 잊지 않은 채 나를 다시 찾았다.
벗어둔 옷깃에 피곤이 녹아있던 그 저녁에 나는 태오의 전화를 받고 대학로에 있는 맥주바에 나갔다. 그간 연락이 없었던 그를 본 순간 나는 하염없이 숨 가쁨을 느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그에게 나는 사사로운 질문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맥주바의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주문한 술이 나오자 태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부탁했던 거 알려주려고 만나자고 했어. 나는 먹지도 않을 팝콘을 자꾸만 만지작거렸다. 그러고는 그를 바라보지도 못하고 꺼져가는 맥주거품을 응시했다. 그의 얘기를 듣게 된다면 나는 왠지 모르게 돌아오지 못할 기억으로 끌려갈 것 같았다. 두려운 마음을 누르고 나는 대답했다. 그래. 얘기해줘.
 
와크와크 섬을 둘러싼 바닷물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이들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선 낯선 존재였다. 섬 곁으로 밀려오는 파도 때문에 우리의 발에는 소금기가 묻어있었다. 나는 태오의 안내를 받으며 어느 나무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이곳에 여러 번 다녀갔던 사람처럼 섬의 지리에 익숙했다. 스산한 공기는 나의 어깨를 죄었고 그럴수록 나는 몸을 움츠렸다. 그 모습을 본 태오는 나의 손을 움켜잡았다.
이곳은 아침이었다. 와크와크 족은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냥을 나가는 한 무리 곁을 지나쳤다. 그 중 한 남자와 나는 눈이 마주쳤지만 의심의 눈초리 없이 우리를 스쳐갔다.
숲속으로 가는 길은 지루했다. 그만큼 나는 쉽게 지쳐버렸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혼란에 빠져갔다. 나는 가던 걸음을 멈췄다. 나무가 뿜어내는 역한 냄새 때문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태오는 나를 달래며 조금만 더 걷자고 했다. 그러나 작은 풀무더기마저 내 걸음을 붙잡았다. 나는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주저앉은 자리에서 정오의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태오는 가만히 나를 기다렸다. 나는 흙투성이의 차림으로 쓰러져 있었다. 따가운 햇살에도 이 혼돈은 증발하지 않고 있었다. 깊어가는 메슥거림으로 더욱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어딘가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와크와크. 소리의 정체는 나와 가까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일어나 태오의 뒤를 따랐다. 
숲의 한 가운데에는 와크와크 나무가 있었다. 멀리서 지켜보기만 해도 두려울 만큼 거대한 나무였다. 풍성한 나뭇잎이 햇볕을 모두 가려버린 듯 주변은 어두웠다. 나무의 열매는 퇴색한 고무처럼 중력을 향하여 늘어져있었다. 가지 사이로 매달린 열매는 빼곡하게 각자의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열매들은 모두 소녀를 토해내었다. 열매 안에서 성장한 소녀는 천천히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또 다른 열매는 소녀의 발부터 성기까지만 뱉어내었다. 소녀의 머리가 완전히 나오게 되면 그녀는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열매에서 분리된다. 열매에서 벗어난 소녀는 그 어떤 저항도 없이 ‘와크와크’ 라는 소리를 끝으로 빠르게 썩어간다. 이제 막 모래위로 떨어진 그녀는 뼈와 비늘을 잃은 물고기였다. 끈적한 과육의 찌꺼기가 소녀의 등에서 반짝였다. ‘와크와크’라는 말 한마디에 소녀의 삶은 멈춰버린다. 물컹한 살덩이만이 소녀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무 주변에는 오래전에 죽어버린 그들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것은 흉물스런 잔재였다. 와크와크 나무에 맺힌 열매는 셀 수 없이 많았다. 두터운 과육으로 살이 오른 열매는 한시라도 먼저 소녀를 내보내기 위해 경쟁하며 자신을 살찌웠다. 그들은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섬 안의 공기와 햇빛, 토양의 영양물을 닥치는 대로 빨아들였다.
섬의 실체를 알게 된 순간 나는 이 작은 세계에서 현기증을 느꼈다. 나무 곁을 영원히 벗어나지 않는 한 이 역한냄새는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메슥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나무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해가 기울 무렵, 부족들은 와크와크 나무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시체더미를 보고도 그 죽음을 외면했다. 소녀의 얼굴은 한결같은 아름다움을 지녔지만 그녀에게서 뿜어 나오는 냄새 때문에 그 누구도 그녀에게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나무의 세계와 떨어져 사는 사람들은 초저녁의 구름보다 더 푸른 눈으로 시체를 노려보았다. 소녀들은 그 시선의 무게만큼 모래 속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밤이 섬 가운데로 찾아오고 있을 때 태오는 이제 그만 돌아가자고 말했다. 어둠은 그 날의 깊이만큼 발자국을 남기며 우리를 불안하게 했다. 어서 일어나. 더 이상 여기에 있는 건 무리야. 태오는 바람처럼 떨며 말했다. 그런데… 이곳을 떠나도 난 여기서 벗어 날 수 없을 것 같아. 상처 난 내 입술이 움직였다.
우리는 구름이 완전히 걷혀질 때 까지만 있기로 했다. 얼마 후, 아득한 구름이 밤공기에 녹아들자 태오와 나는 그 섬을 떠났다.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여행이었다. 새벽의 기억은 내게 몇 마디의 말보다 경험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날의 짧은 여행을 끝으로 나는 더 이상 그를 만날 수 없었다.
와크와크 섬에서 돌아온 우리는 새벽녘에 맥주바에서 나왔다. 이제 곧 첫 열차가 운행될 시간이었다. 나는 태오를 배웅하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가던 중에 나는 편의점에 들러서 그에게 우유 하나를 사서 주었다. 그는 우유를 단숨에 마시는 걸로 그 고마움을 대신했다.
지하철역에 도착하자 첫 열차가 오고 있다는 안내음이 울렸다. 그때, 나는 푸른 새벽과 함께 그를 안았다. 태오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마음을 내색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느끼고 있을 아쉬움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빈 우유 곽을 가볍게 쥐고 텅 빈 전철에 올랐다. 떠나는 열차는 불투명하게 아른거렸다.

W회사의 첫 면접일이 돌아왔다. 나는 매번 같은 화장과 머리손질을 한 후, 두벌의 정장 중 하나를 골라 입었다. 집을 나서기 전에 새벽까지 수정한 발표 자료와 출력한 문서를 챙겼다.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내내 초겨울의 아침은 나를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면접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나와 같은 눈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회사의 로비에 서있었다. 나는 그들 사이를 헤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큰 거울 앞에서 화장을 수정하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는 단정하게 다시 묶었다. 
엘리베이터는 팔층에 멈췄다. 나는 다섯 명의 사람들과 함께 내렸다. 사무실 내부로 들어가자 인사담당자로 보이는 여자가 서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내가 ‘면접’이라는 단어를 꺼내자마자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기실 안으로 안내했다. 대기실에 들어선 나는 창에서 쏟아지는 한낮의 햇살에 얼굴을 찡그렸다. 내가 시선을 돌렸을 때 이미 도착해 있던 두 명의 눈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의식하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았다.
면접 시간이 가까워지자 대기실의 좌석은 가득히 채워졌다. 나는 가슴에 단 수험표를 매만지며 내 차례를 떠올렸다.
아홉 번째의 사람이 면접을 마치고 나왔다. 김정연 씨, 대기해 주세요. 인사 담당자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연습해 둔 자기소개를 빠르게 떠올리며 면접실에 들어갔다.
그곳은 어두웠다. 조명이 모두 꺼지고 스크린의 불빛만 오롯했다. 오 분 간의 발표 준비 시간 동안 나는 면접관에게 준비한 문서를 전달했다. 그런 다음 컴퓨터 프로그램을 실행한 후 첫인사를 했다.
그들은 넓은 테이블에 서로를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정 가운데에 스크린이 있었고 나는 오른쪽에 서서 발표를 했다. 화면이 넘어갈 때 마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와 간간히 기침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맞은편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발표 시간을 조절했다. 떨리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 큰 목소리로 말하려 노력했다. 발표가 끝나자 W회사의 임원들은 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었는지, 기존의 광고 문구를 비판한 근거는 무엇인지, 본인 스스로 창의적인 인재라 생각하는지 등의 일관성 없는 물음이었다. 나는 최선의 대답을 하기위해 집중했다.
어느 면접관은 적당한 시점에서 내게 수고했다는 말을 했다.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린 나는 정중히 인사를 하고 나왔다.
내가 문을 열고 나왔을 때 내 앞에는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실에서 내 옆에 앉았던 지원자였다. 그녀는 준비해 둔 자기소개를 몇 번이고 되뇌며 떨고 있었다. 나는 흘끗 그녀의 모습을 봤다. 그녀는 나와 같은 진주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이차 전형의 합격자 발표 일을 인사 담당자에게 들은 후 나는 빌딩 밖으로 나왔다. 버스를 타러 가던 중 갑자기 풀린 긴장감 때문에 발목이 시큰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길가의 벤치에 앉아 좀 전에 마주친 여자를 생각했다. 그녀도 나처럼 합격을 간절히 원하겠지… 혹은 나보다 발표를 더 잘했을 까… 하는 괜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돌았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곧장 컴퓨터를 켜고 릴리투의 졸업논문을 썼다. 그동안 이렇다 할 수입이 없던 나는 그에게서 받게 될 돈이 간절했다. 그럴수록 나는 그가 만족할 만한 논문을 작성해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지금쯤이면 취업 커뮤니티 사이트에 W회사의 면접 후기가 올라왔을 것이다. 나는 그곳에 들어가 로그인을 했다.
사이트의 면접 후기 게시판에는 W회사에 대한 글이 없었다. 다만 오늘의 면접이 어땠는지를 궁금해 하는 사람의 질문은 있었다. 나는 어떤 답변도 남기지 않고 로그아웃을 했다.
태오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나는 이따금씩 태오의 소식이 궁금했다. 와크와크 섬에서 그는 나처럼 두려워했다. 그 두려움은 소녀의 죽음도, 우리의 고립도 아니었다. 그 섬의 존재를 태오와 나밖에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우리는 두 손으로 서로의 얼굴을 감쌌다.
숲 속에서 태오의 손을 잡고 한없이 걸었던 그 날 이후로 나는 줄곧 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탄생과 동시에 죽음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소녀들의 외침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의미를 듣고 싶었다. 
우리는 분명, 중세 속에 있었다. 한 순간도 머물지 못할 그 순간에 우리는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곳이 내가 있을 수 없는 세계라 여기지 않았다.
뒤섞인 논문과 낡은 책들은 숨을 쉬지 않았다. 나는 작성하던 논문을 그만 두고 벽에 기대어 앉았다. 이 순간 나는 그저 태오의 손마디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 그에게 다가가 또다시 그 섬으로 데려다달라는 부탁도 하고 싶었다. 추악한 소녀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응시하던 태오의 모습이 어느새 내 손 끝에 닿아 있었다. 나는 그렇게 잠이 들었다.

나는 작년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서류 전형에 통과한 회사에 면접을 보러 다녔다. 그러던 중 W회사에서 이차 전형에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게 되었고 나는 서둘러 최종 면접을 준비했다.
W회사의 마지막 전형일은 이제 일주일도 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사이 나는 릴리투에게서 논문의 완성 일에 대해 물은 메일을 받았다. 나는 그에게 졸업 논문의 진행 상황을 알려주었고 며칠 내로 파일을 보내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마지막 면접은 수차례 경험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어렵게 최종 면접에 도달하더라도 결과는 항상 좋지 않았다.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면접이었지만 지금의 상황 뒤에 기다리고 있을 그 순간을 위해 나는 쉬지 않고 지원했다. 그런데 만약 태오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W회사의 마지막 면접일이 가까워질 때쯤 릴리투의 논문은 최종 검토만 남겨두고 있었다. 나는 논문의 오타를 수정하고 어색한 문장을 고쳤다.
며칠 후 릴리투의 논문은 완성되었다. 내일 입을 정장을 세탁소에서 찾아온 후 그에게 메일로 논문을 보냈다. 릴리투에게서 답장은 오지 않았다.
나는 내일 있을 면접을 위해 취업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몇 가지 정보를 알아 두었다. 제 작년에 W회사의 카피라이터로 취직을 한 사람의 글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그 글에서 당시의 면접이 어떠했는지 자세히 남겨두었다. 나는 그 글을 출력해서 몇 번이고 읽어두었다.
다시 찾아간 회사의 로비는 지난번보다 한산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은 팔층에서 열렸고 내린 사람은 나 혼자였다.
지난 번 봤던 인사담당자는 역시나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다시 ‘면접…’ 이라는 말로 그에게 다가갔고 담당자는 나를 예전의 대기실로 안내했다. 십 분쯤 지나자 지난번에 마주쳤던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나와 같은 최종 면접자였다. 곧이어 낯선 남자가 마지막으로 대기실에 도착했다.
W회사의 이차 면접에 합격한 사람은 나를 포함한 세 명이었다. 여기서 한 명의 합격자가 나오게 된다. 나는 괜스레 그녀를 경계하며 익숙한 불안을 느꼈다.
세 명이 나란히 앉은 채로 심층면접이 진행되었다. 면접관은 하나의 질문을 던진 후 각자의 답변을 비교하며 들었다. 그녀는 가운데 앉아 있었다. 그녀의 답변은 매번 명쾌했으며 글에 대한 감각도 풍부한 것 같았다. 나는 그녀 못지않은 실력을 발휘하기 위해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려 했다. 그동안 쌓아온 경험을 부각시키며 면접관의 시선을 끌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숨이 막혔다. 이번에도 실패하는 게 아닐까 하는 허탈감이 벌써부터 나의 살갗을 베어내고 있었다.
면접은 모두 끝났다. 그녀는 여전히 나와 같은 진주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진주 귀걸이를 변기에 버렸다.

나의 하반기 면접 일정은 W회사가 마지막이었다. 최종 합격자가 나올 때 까지 나는 취업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라오는 글을 천천히 읽었다. 이따금씩 ‘유어 리포트’에서 보고서를 요청하는 회원이 생기면 그것을 작성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것마저 지루해면 태오와 걸었던 밤거리를 상상했다.
오늘이 바로 W회사의 최종 합격자 발표일이다. 그런데 오후 여섯시가 되어도 회사에서는 연락이 없었다. 홈페이지에서 합격자를 조회해 볼 수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그만두고 싶었다.
나는 머뭇거리는 마음을 내가 자주 가던 취업 사이트에 붙잡아 두었다. 이 시기쯤 되면 취직을 한 사람들의 합격수기가 매일같이 올라온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W회사이름을 검색했다. 몇 개의 글이 화면에 떴다. 그 중에서 이제 막 올라온 글을 클릭했다.

오늘 W회사 카피라이터 직, 최종 발표가 났어요. 오후 두시 쯤 담당자분이 연락을 주셨구요, 최종 합격했습니다.

문장 위에는 그녀의 얼굴이 함께 새겨져 있었다. 분명 합격자는 그녀였다. 순간 먹먹해진 나는 더 이상 글을 읽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로그아웃을 하려던 도중에 ‘릴리투’라는 아이디가 화면에 멈춰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글의 작성자는 바로 ‘릴리투’였다.
그 순간 와크와크 섬에서 만났던 소녀들의 음성이 방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다급한 소리에 놀란 나는 컴퓨터도 끄지 못한 채 몸을 웅크렸다. 나의 자취방은 그것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거대한 열매가 되어 나를 집어 삼키기 시작했다. 내 살결은 그 안에서 점차 물컹해져갔다.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태오는 아마도 그 섬으로 다시 돌아간 것 같았다. 내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면 와크와크 나무의 곁을 지키고 있던 그와 만나게 될 것이다. 그동안 태오는 이제 막 태어난 소녀의 몸을 닦아주거나 따가운 모래를 피해 좀 더 부드러운 곳에서 그들을 잠재우고 있을 것이다.
나는 과육 속에서 점점 무력해져 갔다. 와크와크. 나는 세상에 내뱉을 한마디를 그렇게 준비하고 있었다. 

<소설 우수 당선작  수상소감 - 방황하는 문장들의 조각들

문장이 있었습니다. 발자국 베인 낙엽에, 흙을 안은 잔디에, 조각난 분필에, 낡고 물컹한 책에, 자판기 커피의 따듯한 위로 속에, 학교 정문의 그림자에, 이름 모를 친구의 눈동자에, 표정 있는 당신의 뒷모습에 그 문장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모아 각자의 자리를 찾도록 안내해 주었습니다. 부끄럽게도 문장들의 방황이 끝나자 소설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지나칠 수도 있었던 그 순간을 일깨워준 덕성여대 학우들과 많은 가르침을 주신 국문과 선생님들께 고맙습니다.
침묵 속에서 정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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