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회 학술문예상 소설 가작 당선작> 시간이 가는 약을 삼키고
<제36회 학술문예상 소설 가작 당선작> 시간이 가는 약을 삼키고
  • 양아름(국제통상 09)
  • 승인 2010.11.22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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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은 대중이고, 신의 피조물인 너는
 자신의 의지가 존재한다고 믿는 엄숙한 바보일 뿐.

“모른다...?”
“응. 몰라. 그러니까 더 이상 묻지 마. 따라오지도 말고”
말을 끝낸 K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겁게 가라앉았던 실내공기가 살짝 흔들리며 그의 백단향 냄새도 아찔하게 흔들렸다. K는 아직도 온 몸에 향수를 들이 붓듯 뿌리는 버릇은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의 움직임과 함께 철제의자가 바닥과 기묘한 마찰음을 내며 미끄러졌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웃기게도 최대정지마찰력을 떠올렸다. 그는 똑똑한 남자였다. 지금 이 순간의 그와 나의 미묘한 삐그덕거림은 일정한 시점이 지나면 곧 잠재워지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지 몰랐다. 그의 이끌림대로 고집스럽게 움직이지 않으려 바닥을 긁어대고 있는 내게 관성이 붙는 그 순간이 언제쯤일지 이미 계산이 끝나버렸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새삼 내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없을지도.
더 할 말이 남았냐는 듯 K는 자리에 선 채 미동도 하지 않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 두 눈동자는 싸구려 회색 벽지에 묻어 있는 노란색 얼룩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모든 신경은 그에게로 쏠린 채였다. 구지 그를 쳐다보고 있지 않아도 그가 느릿느릿 내 구석구석을 훑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벽에 얼룩을 바라보고, K는 나를 바라본 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신경질적 침묵이 이어졌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더 흘렀을까, 둔탁하게 방문이 닫히는 소리에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던 침묵에 균열이 생겼다. 무겁게 감긴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자 K가 서있던 자리가 텅 비어있었다. 내 시선은 붙어있을 곳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배회하다가 다시 내 오른쪽에 위치한 회색 벽지 속 노란색 얼룩으로 굴러가 정지했다. 누군가 벽지를 긁어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유감스럽지만 K의 경고를 어겨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방문을 등지고 걸어 나올 때 툭-하고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복도는 눈이 아플 정도로 새하얗게 늘어서 있었다. 방문을 열자 하얀 빛 번짐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갑작스런 빛에 반사적으로 눈을 가린 채 더 이상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그러나 꽤 오랫동안 눈을 감고 기다려도 빛의 잔영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힘주어 눈을 감아 봐도 마찬가지였다. 답답한 마음에 손으로 눈꺼풀 위를 지그시 누르다가 불현듯 아침 약을 걸렀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빌어먹을-. 낮게 읊조려보지만 속은 더욱 메스꺼워질 뿐이었다. 차가운 식은땀이 손에 베어났다. 세차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울렁거리는 배를 부여잡은 채 복도에 미세하게 남아있는 K의 잔향을 따라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화이트 아웃-.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머릿속이 조금씩 표백되어가는 것 같았고, 휘청휘청 걷던 걸음마저 곧 무너질 듯 위태로워졌을 즈음 남자화장실에서 무표정으로 칫솔질을 하고 있는 K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는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쳤지만 K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약을 거른 모양이네.”
 서로 눈이 마주치고 한참만에야 기계적인 칫솔질을 멈춘 거울 속의 K가 세면대에 하얀 거품을 뱉으며 지껄였다. 
 “내가 물었던 말에······ 대답이나 해.”
 이런. 목소리가 갈라져버렸다. 태연자약한 표정의 K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현실이 왠지 모르게 서글퍼졌다. 거울 속 K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K는 입가에 하얀 거품을 그대로 묻힌 채 거울을 통해 날 바라보며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은 모양인데.”
 나는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K는 즐거워 보였다.
 “재밌어.”
 K는 손등으로 입가에 묻어있는 하얀 거품을 훔쳐내며 다시 웃었다. 잔잔히 귀청을 울리는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속에선 화장실 바닥의 푸른 타일들이 뱅글뱅글 회오리치고 있었다.
 익숙한 K의 미소가 먹물처럼 눈꺼풀 안으로 번지고, 눈물샘을 비집고 나온 따뜻한 액체가 소리 없이 푸른 타일 위로 추락하고 있었다.
 .......
 .......
 아마, 나는 울고 있었던 것 같다.

2.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화장실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고꾸라진 채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의식과 함께 엄청난 메스꺼움과 두통이 그의 정수리부터 온몸을 타고 진동하기 시작했다. 
 쏴아-. 문득 들려오는 물소리에 그는 눈동자를 굴려 화장실을 훑기 시작했다. 불안한 기색으로 정신없이 화장실 안을 헤집던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세면대였다. 수도꼭지의 손잡이 부분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군데군데에서 물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세면대와 이어지는 수도관도 손상되었는지 화장실 곳곳에서 물이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무성영화 필름처럼 지지직거리는 소리만이 물소리와 함께 고요 속에서 간헐적으로 울려 퍼지고 있을 뿐이었다.
 쏴아-. 세면대에선 물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는 K가 거울을 통해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음 짓던 모습을 기억해내다가 괴롭게 신음하며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생각하기 싫다. 생각을 하면, 더 이상 생각을 하다간 정말 머리가 깨져버릴 것 같았으니까. 사고를 정지해야 한다고 그는 스스로에게 뇌까리며, 그러나 그러한 중얼거림조차 사고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에 그는 끝내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려야 했다.
 그는 푸른 타일의 빗금을 타고 자신의 벌려진 입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가느다란 물줄기를 바라보며 여동생을 떠올리고 있었다. 한 손에는 커다란 풍선을, 다른 한 손에는 하얀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들고 천진하게 웃음 짓던 모습이 그의 눈에 아른거렸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여동생에 관한 기억은 단 한 토막의 이미지밖에 없었다. 그가 생각해내려 애써도 더 이상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옆으로 고꾸라져 있던 몸을 가까스로 돌렸다. 철벅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과 맞닿은 그의 등으로 기분 나쁜 축축함이 번져오기 시작했다. 온몸의 뼈가 다시 맞춰지는 기분과 함께 그의 시야에는 얼룩 한 점 없이 깨끗한 천장이 나타났다.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엄습하는 차가운 기운을 느끼며, 어쩌면 K가 이 화장실에 수챗구멍이란 수챗구멍은 다 막고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둔탁한 무엇인가로 세면대와 수도관을 미친 듯이 내려치는 K의 환영이 정신없이 화장실 안을 헤집다가 이내 사라졌다. 
『어차피 자유는 존재하지 않아. 실존하지 않기 때문에 영원히 빛날 수 있는 거야. 자유라는 존재는 신과도 같아. 객관적인 실체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대중의 맹목적인 추앙을 받을 수 있으니까.』
 그는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의 머리 밑에 죽은 자의 몸뚱이를 봉합시켜놓은 듯 이질감만 느껴지던 그의 몸이 흐느낌으로 인해 가늘게 떨려왔다. 물은 점점 더 차오르고,  그의 눈물을 감추고 있던 손과 차가운 타일 위에 얹혀 있던 손이 서로 다른 액체에 의해 젖어갔다. 점점 더 짙어져가는 흐느낌 소리와 함께 비식비식 새어나오던 입김도 차츰 온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의 의식마저 몽롱해져가는 그때 어디선가 지포라이터 뚜껑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담배에 불이 붙여지고, 필터가 타들어가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누..누구야?”
 “...누..누구야?” 
 누군가 그의 더듬거리는 말투를 흉내 내며 나지막하게 웃었다. 끼긱거리는 쇳소리를 닮은 웃음소리에 그는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어내고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문이 활짝 열려있는 첫 번째 칸 변기뚜껑 위에서 한 소녀가 샐쭉하게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지? 어쩌면 그가 K를 따라 이 화장실 안에 들어왔던 순간부터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안녕, 10년만이네.”
 다시 끼기긱거리는 쇳소리가 들려왔다. 기껏해야 10댓살 정도 보이는 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웃음소리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늙은 목소리였다.
 “그동안 별로 많이 변한 건 없는 것 같지? 아, K는 좀 나이를 먹어 보이던가?”
 소녀는 발을 굴리며 씩 미소 지었다. 소녀의 발이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세라믹 변기에 닿아 통통 거리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소녀의 풍성해 보이는 다갈색 머리는 단정하게 양 갈래로 묶여있었다. 그는 소녀가 입고 있는 빨간색 원피스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를 내려다보며 장난스럽게 미소 짓고 있는 소녀가 10년 전과 똑같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약을 거른 모양이지?”
 소녀는 분홍빛이 도는 작은 입술을 오므려 담배 연기를 뱉었다.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담배연기 속에 소녀의 얼굴이 잠시 흩어졌다. 그는 문득 몇 시인지 묻고 싶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다시 손으로 눈을 가리며 짧게 한숨을 토해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단지, 오늘 아침 눈을 떠서 약을 거르고 나왔다는 사실만이 명확했다. 그 외에 모든 사실들은 존재하긴 했으나 그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답답함을 느끼며 손가락으로 눈꺼풀을 꾹 눌렀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왜 나는 돈이 필요했던 거지?
 다시 딸각거리는 지포라이터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이래서 대화가 되겠나.”
 소녀는 주머니를 뒤적여 누런 종이로 꼼꼼하게 싸여있는 조그마한 성냥갑크기의 물건을 그에게로 던졌다. 순간, 그는 물건이 작은 포물선을 그리며 그의 몸통 옆에 떨어지기까지 찰나 동안 공기 중으로 번져온 미세하고도 익숙한 냄새에 그의 몸 속 기관들이 벌떡거리며 요동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유난히 크게 들려오는 심장소리와 함께 그는 물위로 떠오른 물건을 집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움직임과 동시에 물이 흥건하게 차오른 화장실 바닥에는 커다란 물보라가 일었다. 그는 행여 내용물이 물에 젖을까 부르르 떨리는 오른손목을 왼손으로 꽉 부여잡은 채 포장 안에 들어있던 노란가루를 허겁지겁 입 안에 털어 넣기 시작했다. 가루가 그의 입 속으로 자취를 감출수록 미세한 경련은 더욱 심해져갔다. 그는 가루날림 때문에 비식비식 새어나오는 기침을 참기 위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숨을 죽였다. 물에 젖은 와이셔츠가 몸에 달라붙어 불안정하게 숨을 몰아쉬는 그의 모습은 더욱 작아보였다.
 실험실의 쥐새끼를 관찰하는 표정으로 묵묵히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소녀는 다 타들어간 담배꽁초를 손가락으로 짧게 튕겨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여동생의 수술은 잘 끝났나?”
 “....... 수술?”
 “지금쯤은 건강하게 팔랑거리면서 뛰어다니고 있을려나. 혹시 모르지. 제 오빠 얼굴도 기억 못할 수도. 벌써 10년이나 흘렀으니.”
 단 한 장 존재하는 여동생의 이미지가 다시 의식의 수면위로 떠올랐다. 기억 속의 여동생은 5살 정도 되어보였다. 6살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보다 더 어릴지도. 그는 자신이 돈이 필요했던 이유가 여동생 때문이었음을 기억해냈다. 아니, 솔직히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단지 지금 자신의 앞에서 요상한 쇳소리를 내며 그보다 그의 과거를 잘 기억하고 있는 누군가에 의해 그랬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을 뿐.
 “뭐 어쨌거나, 네가 이렇게 멀쩡한 걸 보니 됐어. 역시 K는 천재야.” 소녀의 웃음소리가 화장실 안에 울러 퍼졌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소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요란스럽게 웃어댔다. K는 천재야...라고 연신 웅얼대며. 
 그는 다시금 몰려오는 한기에 있는 힘껏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가 뚜렷하게 기억하는 10년 전 마지막 장면은 단 하나였다. 10년 전 그 날, 그가 ‘시간이 가는 약’을 삼켰던 그 순간.
 그날도 지금처럼 빨간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그의 앞에 경쾌하게 발을 까닥거리며 앉아있었다. 소녀의 양 갈래 머리에 묶여있던 실크리본도 그대로였다. 소녀에게선 미세하게 달달한 캐러멜 냄새가 났었다. 하지만 소녀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섞인 중저음의 늙은 목소리였다. 캐러멜 냄새와 끼긱거리는 나지막한 웃음소리. 소녀는 그에게 약속한 금액이 찍힌 영수증과 함께 하얀 알약 하나를 내밀었었다. 그도 준비해온 알약을 소녀에게 건네주었다. 그가 건넨 알약을 삼키며 천진하게 웃는 소녀의 얼굴에서 순간 100살도 더 된 것 같은 노파의 모습을 본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 역시 알약을 삼켰다. 그리고 악몽에 시달리던 그가 눈을 떴을 때, 창밖의 풍경은 사뭇 달라져있었다. 거래는 완벽히 성공적이었던 것이다.
 그의 코끝에서 씁쓸한 피 비린내가 번져왔다. 뜨거운 액체가 그의 인중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그가 코 밑을 손등으로 훔쳐내자 검붉은 피가 묻어났다. 닦아내고 닦아냈지만 계속 뜨거운 코피가 쏟아졌다. 이번에 그는 다른 손을 이용해 피를 훔쳐냈다. 툭- 투둑-. 미처 닦아내지 못한 피들이 그의 허리춤까지 차오른 물속으로 다투어 원을 그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물의 경계의 맞닿은 붉은 액체는 짧막하게 물의 표면을 부유하다 투명하게 희석되어 갔다.
 끼기긱거리는 기계음 섞인 쇳소리와, 붉은 원피스, 어디선가 풍겨오는 익숙한 캐러멜 냄새, 물속으로 추락하는 붉은 액체....... 그리고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수돗물 소리.
 그는 자신이 금지되었음을 느끼고 있었다.


3.
 엄숙한 바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바보는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다. 다신 눈을 뜨고 싶지 않다고도 생각했다. 바보는 짧게 한숨을 뱉으며 그의 코끝을 비릿하게 맴돌던 피 냄새가 말끔하게 가셔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축축하게 물에 잠겨가던 바보의 몸도 더 이상 끈적이지 않았다. 다만 눈을 아무리 꽉 감아도 가시지 않는 하얀 빛 번짐이 여전히 바보를 괴롭히고 있었을 뿐이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오는 초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바보는 느리게 몸을 뒤척였다. 바보의 움직임에 침대 스프링이 폐렴 환자의 낮은 기침소리처럼 삐걱 거리는 소리를 토해냈다.
 “일어났군.”
 바보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가늘게 눈을 떠 소리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K......."
 K는 바보를 내려다보며 씩 허물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K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바보는 K를 바라보다 이내 다시 질끈 눈을 감았다.
 “너는 날 죽이려했어.”
 바보의 말에 K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이제 그만 정신 좀 차려. 경비실 호출 받고 화장실로 가보니까 세면대고 수도관이고 모두 박살을 내놨더라. 내가 처방해준 약은 잘 챙겨먹고 있는 거야? 네 모든 기관들은 꼬박 10년 동안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관리가 중요하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잖아.” 
 바보는 K의 말끄트머리에서 입에 노골적인 비웃음을 물었다.
 K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넌 지금 멀쩡하지 않아. 정신 분열증 초기 증상이 나타나고 있단 말이야. 깨어나서부터 뭐가 현실이고 뭐가 환영인지 구별도 못하고....”
 K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보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순간적으로 바보의 머릿속이 출렁거렸으나 다시 눕진 않았다. 하지만 바보의 귀 속 어디선가 삐-하는 기계 경고음 같은 것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바보는 달팽이관이 찢어질 듯한 이명에 짧게 신음하며 양쪽 귀를 틀어막고 고개를 휘저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차츰 초점을 회복한 바보의 눈에는 블라인드도 쳐져 있지 않은 병실 창문이 들어왔다. 바보는 새삼스러운 감정으로 유리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낯설고, 익숙한 풍경.
 한참 만에 2, 3겹으로 진동하던 창문이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 바보가 10년 만에 다시 마주한 하늘은 다정한 회색빛으로 얼룩져있었다. 무표정한 구름들은 구르릉- 앓는 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고, 우중충한 회색 낯빛들을 한 채 서로를 우두커니 지켜보고 서 있는 도시의 빌딩들 위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보는 갈증을 느꼈다.
 말끔히 닦여있는 창문 덕분에 창밖 풍경은 바보 뒤에 서 있는 K의 모습과 오버랩 되어 비쳐졌다. 유리창 속 K는 하얀 의사 가운을 걸친 채 주머니에 두 손을 푹 찔러 넣고 바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유리창 속 K의 얼굴을 바라보며 바보는 왜 이 병원에선 K 밖에 볼 수 없었던 건지 갑작스레 궁금해졌다. 내내 이 빌어먹을 병실에만 갇혀있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바보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섰다. “아직 일어나면 안 돼.” K는 바보를 만류하려고 하는 듯 보였으나 정작 K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서있었다. 여전히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바보는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엉거주춤한 걸음걸이로 느릿느릿 창가에 다가서야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었다. 병실과 현실의 경계의 틈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흙냄새가 바람을 타고 짙어져왔다.
 “언제부터 비가 내렸지?”
 현실 속으로 하얀 손을 내밀며 바보가 낮게 중얼거렸다.
 “뭐, 새벽부터야.” K가 대답했다.
 이어지는 K의 짤막한 한숨 소리는 조금 더 굵어진 빗소리 때문에 흔적 없이 묻혀버렸다.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바보의 손가락 사이로 빗줄기가 스쳐 지나갔다. 바보는 자신의 손바닥위로 동그랗게 맺혀지는 빗방울들을 바라보며 문득 행복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의 10년의 세월을 팔았다. 그것이 현실이다.
 빗방울들은 제 몸이 부서지는 것은 개의치 않는 다는 듯 거침없는 기세로 쏟아지고 있었다. 회색 건물들 사이로, 바쁘게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의 우산 위로, 눈부시게 번쩍이는 화려한 광고판들 사이로, 가로등 사이로, 간헐적으로 울려 퍼지는 자동차 경적 사이로,
 “K, 나 밖으로 나가고 싶어.”  
 K의 한숨소리인지 나지막한 웃음소리인지 분간할 수 없는 작은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지만 바보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타박타박.......
 현실 속에선 비가 내리고 있었고.
 바보가 있는 이곳은. 비가 내리고 있지 않은 지금 이 공간은.
 “그런데.. K. 너와 나는 무슨 사이지? 아니.. 무슨 사이였어? 친구? 환자와 의사? 동료?...... 네가 낯설지 않은데.. 나는 왜 네가 낯설지 않은지 모르겠다. 웃기지. 네 말대로.. 10년간의 공백은 너무 길었을지 몰라.”
 바보는 창문에 손을 가져다대고 의미 없는 문자들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K는 창문에 비친 바보의 울 듯한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K, 내 여동생이 수술을 했어. 그런데.. 무슨 수술이었지? 내 여동생이 왜 아팠는지.. 나는.. 내 시간을 팔아야만 했을 정도로 돈이 없었는지... 아니.. 솔직히.. 솔직히 말이야.... 난 내 여동생의 이름도 기억이 안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도시의 건물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던 바람은 허공의 빗방울들을 싣고 병실 안으로 흩어져 들어왔다. 그 바람에 바보의 얼굴에는 빗방울들이 맺혀있었다.  
 “나, R을 봤어. 10년 전 그 모습 그대로 하나도 변하지 않았더라. R은 여전히 어린 여자아이 모습이었어. 난.. 이렇게 하룻밤 꿈에서 깨니 10년이나 나이를 먹어버렸는데도 R은 하나도 자라지 않은 모습으로 10년 전 빨간 원피스를 그대로 입고 있지 뭐야....... 이렇게 의학이 발달했는데도 그 빌어먹을 노인네 목소리는 어떻게 안 되는지 말이야....... K 넌.. 내가 R을 다시 만난 것도.. 환영이라고 하겠지? 하지만 정말 봤어. 내 시간을 사간 그 망할 노인네 말이야. 정말이야....... 그 나이를 먹지 않는 괴물 같은 년은 네가 천재라고 계속 지껄여 대더군.......”
 빗줄기는 조금 더 거세어 졌다. K는 조용히 바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와 활짝 열려진 창문을 닫았다. K는 초점 잃은 눈동자로 자신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바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바보의 귓가에 속삭였다.
 “........”
 가스등처럼 희미한 병실 조명이 위태롭게 몇 번인가 깜빡거렸다.


4.
 12월 28일 生, [G] Time, 5년부터 10년 사이 급구
 그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한참동안 그의 발밑에서 요란하게 움직이고 있는 광고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낡아빠진 구두 밑에선 귀여운 동물의상을 입은 소년소녀들이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G-Time!!'을 외쳐대고 있었다. 말없이 내려다보던 그가 허리를 구부려 손을 내밀자 토끼 의상을 하고 있던 소녀가 그의 손바닥 위로 올라왔다. 잠시 그의 손바닥 위를 천방지방 뛰어다니던 소녀는 잠시 후 점프를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며 짧게 거수경례를 했다. 순간, 전파에 문제가 있었던지 소녀의 모습이 지지직거리며 잠시 흩어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안녕하세요! G 병원입니다! 지금 병원에서는 21~24시 사이, 즉 [G] Time에 태어나신 고객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거래 시간은 5년에서 10년 사이이구요, 연당 180마인으로 계약 조건이 잡혀있습니다! 금액은 의뢰인과의 협상을 통해 조정될 수도 있으며 저희 G 병원에서는 거래 기간이 끝난 뒤에도 고객님의 원활한 신체기능 회복을 돕기 위한 최상의 시스템을 제공.......”
 어느새 소녀의 옆으로는 지난 24년간 G병원을 통한 누적 거래량을 보여주는 그래프가 떠 있었고 소녀의 말이 진행됨에 따라 병원 내부 시설과 계약 조건이 연신 사방에서 팝업창으로 튀어나왔다.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말을 청산유수로 읊고 있는 소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도망치듯 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쫓기듯 허둥대다가 몇 번이고 그대로 고꾸라질 뻔도 하였으나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사방에선 화려한 광고들이 바삐 지나치는 사람들의 오감을 자극하고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광고만 보고서도 짧게나마 그 제품의 맛과 향기를 느낄 수도 있었다. 신차의 탑승감을 거실 소파에서 그대로 느낄 수도 있었고 CF속 태양이 작열하는 열대 해변의 신선한 미풍이 시청자의 머리칼 사이로 흩어지기도 했다. 그는 넋을 놓고 매스 미디어에 심취해있는 좀비 같은 사람들의 숲을 헤쳐 어두컴컴한 골목에 들어서고 나서야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넌 나의 리트머스 시험지야.』
 이 목소리, 미치도록 익숙한 K의 음성.
 그의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빨리 뛰기 시작했다. 그는 오른손으로 가슴을 움켜쥐며 부들거리는 손으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손목시계 안에선 19:00란 아라비아숫자가 푸른빛으로 깜빡거리고 있었다. 시계보다 정확하게 반응하는 생체시계에 그는 쓴 웃음을 입에 물며 점퍼 속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믿으면 바로 그 순간 진실이 생겨나는 거야. 그게 바로 진실이지.』
 그의 손끝에 부스럭거리는 종이가 맞닿았다. 종이꾸러미의 존재를 확인하자 나른한 안도감이 그를 덮쳐왔다. 그는 허공에 짧게 한숨을 그으며 종이를 꽉 움켜쥔 채 벽에 등을 맞대고 천천히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또 다시 오한이 시작됐다. 와들와들 떨고 있는 그를 구겨진 종이가 희번덕거리며 노려보았다. 어쩔 수 없지 않냐며. 그는 잠시 멍하니 종이꾸러미를 내려다보다 더러운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어쩔 수 없지 않냐고......? 어디서부터? 생목이 올라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그는 천천히 종이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결국, 그 누구도 널 속이지 않은 셈이지.』
 가로등 불빛을 받은 노란 약 가루들이 금가루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아름답다. 금가루보다 아름답다. 그는 머릿속을 휘저으며 메아리치는 익숙한 목소리에 머리속이 다시 화이트 아웃 되는 것을 느끼며 금가루를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 뚜..뚜...뚜..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골목 끝 어디선가 곧 끊어질 듯 들려오는 위태로운 전화벨소리에 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몸 속 미세한 세포하나하나에까지 미치던 오한은 멈춰있었다. 뒤집힐 듯 울렁거리던 메스꺼움도, 두통도 말끔하게 가셔있었다. 그는 손등으로 코 밑의 피를 한번 훔쳐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이곳에 K는 없다. 빨간 원피스의 소녀도, 가물거리는 기억 속 여동생도, 그 누구도 없었다. 그는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골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인파와 웅성거림 속에 다시 몸을 섞으며 그는 와이셔츠를 걷어 올렸다. 그리고 왼 손목에 흐릿한 글씨로 프린팅 되어 있는 조악한 문자들을 확인했다.
 2154. 09. 11. [E] Time. Blood Type: AA. No.900910356
 

 
5.
 “저.. 주민등록증을 잊어버렸습니다. 다시 재발급 받고 싶은데요.”
 “...네?”
 창구에 앉아있던 여직원은 바보를 바라보며 약간 당황한 미소를 지었다.
 “주민등록증을 분실...”
 바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직원이 말을 가로챘다.
 “.....인체에 주입된 ID카드도 분실될 수 있나요?”
 “네?”
 “ID카드로 인증되기 전에는 이곳에 출입하실 수도 없으신데요.”
 “..전 인증 받은 적이...”
 박물관에 박제된 오소리라도 본 듯한 표정의 여직원이 잘 다듬어진 손끝으로 출입문을 가리켰다.
 “들어오실 때 ID 스캔 되셨잖아요. S씨.” 어느새 여직원의 목소리에는 살짝 짜증이 묻어있었다. 바보는 더 이상 묻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아직 더 궁금한 점이 남았냐는 표정으로 바보를 올려다보는 직원에게 짧게 목례를 한 뒤 바보는 돌아섰다. 터덜터덜 빈 의자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바보는 여직원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이름을 떠올렸다. 그녀는 자신을 S씨라고 불렀다. 바보는 입 속으로 그 이름을 되뇌어보았다. 그리고 퇴원하기 전 K가 자신에게 해줬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의 이름을 물어본 바보에게 K는 상냥한 미소를 입가에 띠우고 대꾸해 주었던 것이다.『No.900910356. 이게 바로 네 이름이야. 사람들은 널 이렇게 기억하거든.』
 바보가 의자에 앉은 뒤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웅성거리며 바쁘게 이동하는 사람들 사이로 또 무언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미세한 소리였지만 바보는 그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바보는 고개를 돌려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낡아빠진 구두 끝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 이름은 S다.
 바보는 자신의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해보고는 쿡-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내 이름은 No.900910356다.
 이번에는 웃음이 나지 않았다. 바보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이내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커다란 기계 앞으로 다가섰다. 바보는 이 요상하게 생긴 기계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 기계에서 지문과 홍채 인식을 거치면 자신의 ID가 확인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까부터 숱한 사람들이 바보의 앞을 지나쳐 이 기계를 이용했으므로. 바보는 한 걸음 더 기계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기계에서 상냥한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서 오세요. 신분증명서를 보낼 공공기관 또는 회사명을 입력해 주세요. 잠시 망설이던 바보는 띄엄띄엄 병원을 나오면서 확인한 병원이름을 입력했다. 확인버튼을 누르자 다음 화면이 나타났다. 상냥한 여성의 지시대로 바보는 지문과 홍채를 스캔했다. 단 몇 초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났다. 곧 바보의 눈앞에 인식 결과가 나타났다.
 이름: S
 주민등록번호: 1540911-5076129
 생년월일: 2154. 09. 11. [E] Time. 
 혈액형: AA
 가족관계: 부- oo, 모-pp
 최종학력: 없음
 특이사항: 2155년 12월 18일 자로 G 병원 x연구실로 소속이 옮겨짐.
          2156년 1월 8일, 호적신고의 의한 정리로 K의 양자로 입양.

 바보는 여동생의 이름이 궁금했었다. 어쩌면 K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퇴원을 서두른 것은 여동생을 만나보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유감스럽게도 바보는 영원히 여동생의 이름을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으니까.”
 자신에게 존재하던 단 한 장의 이미지마저 현실이 아니었다. 단지 그에게 약간의 온정을 베푼 K의 세심한 배려일 뿐.
 바보는 천천히 기계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평소보다 훨씬 느린 걸음으로 회색 서류뭉치 같은 건물을 빠져나왔다. 건물 밖은 때 아닌 폭설로 하얗게 뒤덮여 있었다. 건물 입구에서 주변을 둘러보던 바보는 문득 건물 유리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바보는 한참이나 그대로 선 채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내가 그랬었지, 과거란 기록과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그렇다면 기록과 기억이 수정되면, 과거도 수정되는 거 아니겠어? 그것뿐만이 아니야. 다시 새롭게 만들어낼 수도 있어.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처럼, 존재하지 않았던 일을 존재하는 것처럼. 시간을 지배하게 되면, 과거도 지배할 수 있게 되는 거야. 어차피 진실은 언제나 날조되고, 은폐되고, 고의로 잊혀 지며, 왜곡될 뿐이니까.』
 유리벽 안에는 30살 남짓 되어 보이는 한 남자가 바보를 바라보며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제야 바보는 깨달았다. 자신에게 30년 동안 과거는 없었다고. 단지, 조작된 기억과 기록들만이 존재하고 있었을 뿐. 나는 스스로가 상품이라는 자각을 하고 있는 인간의 생체시간을 파는 상품에 불과한 거라고. 친부모가 병원에 자신을 팔아넘겼을 때부터. 인간이라기보다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해버린 거라고. 부유한 사람들의 수명과 젊음을 연장시키는데 사용되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었던 거라고.

 -K, 왜 날 퇴원시키는 거야?
 -네가 원하니까.
 -난 아직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았다면서.
 -상관없어.
 -.......솔직히 말이야, 나.... 퇴원해도...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르겠어.
 -어디로든.
 -어디로든?
 -그래. 어차피 과거는 끝났어.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건 지금뿐이잖아.
 -......그런데, K. 내 이름이 뭐지?
 - No.900910356. 이게 바로 네 이름이야. 사람들은 널 이렇게 기억하거든.
 -......
 -하지만 이젠 필요 없어.
 -......
 -다른 누군가 너에게 임의로 붙여준 고유명사일 뿐이야. 이제부턴 네가 불리고 싶은 게 바로 네 이름이 될 거야.
 
 바보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폭설이 지나간 자리에 최초의 발자국이 남겨지기 시작했다. 비록 지금 바보의 발자국이 시작된 곳까지 이어졌던 발자국들은 없지만 이제부터 남겨지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발자국일 것이라고, 바보는 생각하고 있었다.

<소설 가작수상소감- 22살의 여대생의 모습이 남아 있는 글>

먼저 여러모로 부족한 제 글을 뽑아주신 덕성여대신문사 관계자와 심사자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당선소감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꾸준히 글을 써 오는 것을 다정하고도 혹독한(?) 비평으로 격려해주는 정아언니와 제 하는 일은 뭐든 다 좋아해주는 My Sunshine 홍근 오빠, 마지막으로 글을 쓰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는 제 자신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비록 저의 필력이 아직은 많이 미흡하더라도, 미래의 그 어느 날엔가 제 이름 석자가 꾹 박혀있는 소설책이나 에세이집이 출판되리라는 사실에는 의심을 품어본 적은 없습니다. 그 순간을 위해 끊임없이 더 많이 읽고, 써보고, 경험을 쌓아 나가겠다고 새삼 다짐해 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교내 신문에 제 당선소감이 실릴 수 있어 정말 기쁩니다. 제가 졸업을 하고 여러 해가 지난다 하더라도 오늘의 일자가 찍힌 기사를 찾아보면, 글을 읽는 것과 쓰는 것을 좋아하는 22살의 여대생인 제가 그 속에 남아 있겠네요. 좋은 추억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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