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문예상 소설부문 응모작
학술문예상 소설부문 응모작
  • 승인 2003.11.23 15: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행복

 행복
        
                                                             

 정처 없이 걷고 또 걸었다. 미친 듯이 불어대는 모래 바람 때문에 걸음을 제대로 뗄 수가 없다. 이곳이 어디인가? 나는 두려워졌다. 자세히 살펴보니 고향집이 보이는 언덕 같기도 했다. 그러나 어디인지 모르겠다. 바람은 불어대는데 볕은 따사롭다. 지친 다리를 쉬고 싶어 누군가의 무덤 앞에 앉았다. 남의 무덤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으려니 어쩐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래 바람이 계속 불지만 나는 적막한 하늘을 볼 수 있다. 그 때, 무언가 내 다리를 싸하게 스친다. 차갑고 따듯한 그 오묘한 감촉. 움찔 놀라서 발 밑을 보니 뱀 한 마리가 날 쳐다보고 있다 예쁜 뱀이다. 빨갛고 노란 예쁜 뱀이다. 뱀이 내 다리를 감으려는지 내게로 다가온다. 예쁜 뱀이어서 안아주고 싶었으나 동시에 나는 아주 무서워졌다. 나뭇가지가 눈에 띈다. 어디서 그런 살기가 생겨났는가. 힘껏, 아주 힘껏 나뭇가지를 내리친다. 아! 잘려나간 예쁜 뱀의 예쁜 꼬리. 눈물이 흐른다. 이제 저만큼 뱀은 사라져간다. 저만큼 사라져 가는 뱀의 모습을 보니 내 가슴이 시려온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요란스레 시계 알람이 울린다. 그 순간 눈을 떴다. 알람이 조금만 늦게 울렸으면 지금 내가 숨쉬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꿈일 뿐인데 차갑고 따듯한 그 오묘한 느낌이 아직도 내 다리를 간질이는 것 같아 괜히 다리를 끌어 당겨 만져본다.
 꿈속에서 나는 너무 지쳐있었다. 뱀의 꼬리를 잘라서인가? 나는 더욱 쉬고 싶다. 꼼짝없이 누워만 있고 싶다. 그러나 그런 바램을 누르고 손을 뻗쳐 머리맡에 있는 시계를 잡았다.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시계의 야광 바늘이 보인다. 5시 반. 아직 이불의 따뜻한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 2월의 날씨는 봄이 온다고 하나 여전히 춥다. 차가운 냉기가 코끝에 머무른다.
 '일어나야 돼.'
 주문처럼 금새 허리를 일으켜 앉았다. 옆자리의 동생은 아직도 자고 있다.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는 그 애를 바른 자세로 눕힌 다음, 더 자라고 토닥이고 싶다. 그렇지만 그 애도 곧 일어나야만 한다. 지난번처럼 지각을 해서 매니저에게 한소리를 듣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그 애의 인생은 더 남루해 질 테니까.
 "일어나. 6시가 다 되간다."
동생은 오래 뒤척이지 않는다. 그게 늘 마음에 걸린다는 걸 동생은 알까? 응석을 부리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살아가기 위한 불문율이다. 금새 일어나 앉는 얼굴이 힘겹게 부어있다.
 "또, 물먹고 잤니?"
 "또 부었어? 큰 일이네. 화장발 안 받겠다."
동생은 신장이 안 좋은 자신의 몸보다 자기 관리를 못 하면 안 된다는 매니저의 핀잔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지배받고, 신경 쓰지 않으면 이 애와 나는 살아갈 수 없는 그런, 그런 것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생각이 잘 나질 않는다. 1년 전? 2년 전? 아니면 5년 전? 또는 태어났을 때부터?
 "언니, 언니 먼저 씻어. 내가 밥할게."
생각의 사슬이 툭, 눈물방울처럼 툭, 끊어진다. 생각은 부질없다. 이 아침을, 거룩한 이 아침을 우울하게 만드니 말이다.
 
 그가 나를 부른다.
 "신민주 씨. 내 방으로 와요."
태연한 척 하고 있지만 그는 몹시도 흥분되어 있다. 피곤에 찌들 저녁도 아닌데 그의 넥타이는 이미 목에서 느슨해져 있고 신경질적으로 볼펜을 잡았다 놓았다 한다. 완벽한 방음 시설이 되어 있는 사무실인데도 소리를 낮춘다.
 "어제는 미안했어. 갑자기 찾아올 줄은 몰랐지."
 그 얘기라면 듣고 싶지 않다. 그의 변명은 그를 초라하게 보이게 한다. 더불어 내 자신을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나락으로 민다. 그는 그것을 알아야만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모르고 있다. 가여운 사람이다.
 그의 부인은 그와 내가 내 생일을 맞아 저녁 식사를 하려던 날에 회사로 찾아왔다. 그 날이 무슨 날인지 아는 것처럼 찾아왔다. 입사한 지 3년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날, 나는 처음으로 그의 아내를 봤다. 중키에 아담한 체구를 가진 치아가 고른 따스한 여자였다. 그 여자가 나를 향해 가벼운 목례를 하며 웃을 때 그 여자의 눈은 한없이 따뜻했다. 눈 꼬리에 한 가닥 주름이 잡히는 여자. 그 주름은 그 여자를 아주 평온하고 행복하게 보이게 했다. 남편의 건강을 염려하고, 아이의 성적을 걱정하는 좋은 아내이자 좋은 어머니로서의 그녀의 삶이 보였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내 눈에 들어온 왼손 약지에 단단하게 끼여 있는 결혼 반지. 반지의 묘한 광채는 여자의 결혼 생활을, 동시에 안락한 그의 결혼 생활을 뽐냈다.
 "여보, 제가 갑자기 찾아와서 방해가 됐나요?"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의 얼굴은 곤혹으로 물들었고, 그 곤혹을 살필 새도 없이 그는 아주 찰나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아니, 천만에. 신민주 씨. 그 서류는 내일 처리합시다."
나는 문을 닫고 나왔으며 사무실과 연결되어 있는 그의 사무실 불투명 유리 사이로 그가 그의 부인 어깨에 손을 올려 어루만지는 형태가 보였다. 그는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오느라 고생했지?"
그는 자상한 사람이다. 상대에게 늘 미소와 품위를 보여주는 다정다감한 사람. 그런 그를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날 나는 어떻게 집으로 들어왔던가? 아득한 일처럼 희미한 기억이 남는다.
 "듣고있어? 미안해. 그렇지만 정말이지 난 갑자기 올 줄 몰랐어."                     
 그의 목소리에는 찐득한 민망함이 배어 있다.
 "알아요. 이해해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걸요."
 안도가 어린다. 한 번도 불안을 겪지 않았을 사람이다. 유년의 행복한 시간의 끝을 보내고 청년의 즐거운 시기를 보내고 장년의 안락함 속에서 나와의 짧은 유희가 있다. 나와의 끝이 보이는 이 놀이만이 그의 일생에 걸친 유일한 사건이 될 것이다. 단 한 번의 일탈.
 "그럼, 이따가 보자구."
그가 암호를 대듯이 눈을 찡끗 한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린다.
 "그럼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신민주 씨."
예의 사무적인 목소리로 눈이 시릴 정도의 환한 미소를 지며 말한다. 그런 그가 정말 눈이 시려 눈물이 날 것 같다.

 아버지가 노름으로 남긴 빚은 오천 만원이 조금 넘었다. 그 빚 때문에 농약은 아버지의 목을 타고 흘러 온 방안을 피로 물들게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원망했다.
 "그 인간은 하여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사람이야. 지가 그렇게 일을 벌려놨으면 지가 해결해야지. 그 빚은 다 어쩌고 저 혼자만 죽는다니. 어이구, 큰애야. 어쩌면 좋니. 엉? 우리가 그 빚을 어떻게 해야한다니."
어머니는 우리가 어떻게 그 빚을 갚냐고 아버지의 붉은 시신이 빨갛게 타오르기도 전에 목을 놓고 울었다. 울고 싶은 건 나였다. 나는 내 스무 살을 아버지의 붉은 시신이 있는 방에서 고양이처럼 그르렁거리는 어머니의 한탄을 들으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 때문에 난 울 수가 없었다.
 "어쩌면 좋을까? 어쩐다니? 아이구, 난 못 한다. 오천 만원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장례를 치르고 계속 되는 어머니의 푸념은 내 살을 갉아먹고 내 뼈를 부서트리며 빚을 갚는 것만이 내 삶의 이유가 되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정말 동생과 내가, 우리 둘이서 빚을 갚아야만 했다. 그건 벗어날 수 없는 의무가 되었다.
 어머니는 떠났다.
 "나는 궁민핵교 졸업장도 없지만 여지껏 손가락질 받을 짓은 안 하고 살았다."
고 노름하던 아버지를 비난하던 어머니는 비난받을지도 모르는 자신을 위해 평생 써 본적 없을 편지를 쓰고 떠났다. 서툰 글씨로, 모든 절절함으로 '미안하다' 라고. 그 한마디로 어머니는 가벼워질 수 있었다. 나도 동생도 그런 어머니를 찾지 않았다. 어머니는 미안하다라고 썼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빚을 갚아야 할 의무가 남아 있지 않았다.

 빚은 생각보다 갚기가 힘들다. 내 월급과 동생의 월급은 다 합치면 2백 만원이 조금 넘었다. 방세로 얼마간의 돈을 내고 생활비를 쓰고 나면 계절이 바뀌어도 옷 한 벌 마음대로 사 입기가 힘이 든다. 열 아홉 살이 되면서부터 취업 전선에 뛰어든 동생은 그래도 매일 계산을 했다.
 "백 만원이야. 백 만원씩 5년만 갚아 나가면 빚을 다 갚을 수 있어."
 빚을 다 갚으면 그 애는 스물 다섯 살이 된다. 그러면 그 때는 그 애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이제 스물 두 살의 동생의 꿈은 여행가이드였다. 새학기 초만 되면 늘 적어내는 장래  희망란에 한 번도 다른 것을 적어 낸 적이 없던 그 애의 꿈을 안다. 여행 가이드를 꿈꾸던 그 동생은 지금 백화점에서 화장품을 판다. 큰 상자 안에서, 그 안에서만 움직이며 산다.
 "사람들이 얼마나 신물나는 줄 알아? 사람들은 허영을 사러 와."
그 애가 판매하는 수입 화장품 코너에는 늘 사람들이 북적댄다고 치를 떨며 말했다. 생활에 지쳐 창백하기 그지없는 그 애의 피부를 보면서 사람들은
 "무슨 미백 화장품 써요?"                                                          
라고 묻는다고 했다. 동생은 샘플로 나온 립스틱을 조심스레 펴 바르면서 힘껏 입술을 뒤틀며 말한다. 화를 내려하는 것 같은데 우는 모양이다.
 "있잖아. 그럴 때면 언니, 나는 사는 게 아주 우스워."
새빨간 립스틱이 칠해진 입술이 좀처럼 그 애와 친해지지 못하고 둥둥 떠다닌다.

 요 며칠 새, 속이 좋지 않다. 메스꺼운 게 소화제를 먹어도 쉽사리 낫지를 않는다. 불안하다. 막연한 이 불안감은 쉽사리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이 불안의 근원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지 알고 싶지 않을 뿐이다. 무심하게 시간이 흘러가면 알겠지, 나는 정말이지 생각하고 싶지 않다.
 "신민주 씨, 3월이라 봄바람 났나? 요새 부쩍 우울해 보여요.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옆자리의 이 대리가 걱정스레 농을 건다. 다른 사람 눈에도 나의 불안이 보이는가 싶어 조바심이 났다. 아무렇지 않은 척 눈을 흘기고 달력을 살펴본다. 3월 15일 ㄱ 은행 카드 결제, 3월 28일 ㅈ 은행 카드 결제. 꼬박 꼬박 갚아야 할 빚들이 눈에 들어온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땅 속으로 꺼지고 싶다. 카드 빚을 갚으려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데.... 숨이 막혀온다.  다시 한 번 달력을 살핀다. 생리 예정일이 지난 지 한 달이 지났다. 이제 내 불안을 알 것 같다. 아니, 인정하겠다. 임신이다.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사무실을 살피니 열심히 일하고 있는 그가 보인다. 그의 삶에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장애가 생겼다. 그러나 그건 내 탓이 아니다.

 "입맛에 안 맞아? 왜 통 못 먹고 그래?"
 다정한 그가 걱정스레 묻는다. 주말에 서울에서 조금 벗어난 한정식 집에 가자고 한 건 나다. 그와 처음 만났던 장소가 이 한정식 집이었기 때문이다. 벽면 전체가 투명한 유리로 둘러 쌓여 있기에 밖을 볼 수 있는 집이다. 건물 전체가 각종 나무로 뒤덮여 있어서 마치 산 속에서 그 사람과 나만이 밥을 먹는 듯 한 기분이 들던 곳이다. 처음 이곳을 오던 제 작년에도 바로 이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며 내리는 눈을 봤었는데. 그는 기억하고 있을까? 기억을 그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기억이란 자신이 간직하고픈 그것이므로 나는 그에게 그것을 상기시킬 필요가 없다. 그가 재차 묻는다.
 "괜찮아? 어디 아픈 거 아냐?"
 "아까 오는 내내 말도 별로 없고.... 왜 그래?"
 그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알 수가 없다. 가장 단순해 보이는 사람의 속은 되려 알기가 어려운 법이다. 뜸을 들일까, 말까? 나는 망설임 없이 뜸들이지 않는 후자 쪽을 택하기로 했다. 무언가를 망설인다고 해서, 더 신중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다. 그러기엔 너무나 많은 상념들이 생긴다. 
 "임신했어요."
 수저를 들다 말고 영화의 정지 장면처럼 멈추고 있는 그를 보기가 싫어 고개를 돌린다. 투명한 유리 사이로 벚꽃이 소리 없이 지고 있다. 하나, 둘, 셋. 더는 셀 수 없을 만큼 우수수 떨어진다. 아무래도 바람이 불고 있는 것 같다. 가지의 움직임이 느껴질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불고 있다. 벚꽃 가지가 크게 휘청거리고 꽃잎이 눈 오듯이 떨어진다. 아름답다. 가만히 눈감으면 잡힐 것 같다.

 "미안해."
 그의 눈에 눈물이 차 올랐다. 그의 눈을 찬찬히 살핀다. 마주치는 눈동자, 어긋나는 시선. 그는 고개를 숙여버린다. 그는 정말로 미안한 듯하다. 그런 그에게 이상하게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다. 너무 메말라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마흔이 넘은 그의 눈에 벚꽃처럼 하얀 눈물이 차 오를 수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미안해."
 이제 그는 코끝까지 빨개졌다. 그가 이러는 게 나에게 무슨 위안이 될 수 있을까? 나는 그에게 무슨 위로를 할 수 있을까? 서로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음을 느끼자 내 하늘거리는 하늘색 스커트 위로 뜨거운 무엇이 떨어졌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니?"
 그의 질문에는 간절한 바램이 담겨 있었다. 제발 나의 안락함을 깨트리지는 말아 줘. 그것만 아니라면 뭐든지 할게. 그의 그 간절한 바램은 뜨거운 것의 떨어짐의 속도를 더욱 빠르게 했다. 그리고 그 뜨거운 것은 금새 내 무릎을 차갑게 적셨다. 아주 차갑게, 차갑게.
 등줄기를 타고 오싹함이 흘렀다. 이제 그와의 유희는 흩날리는 벚꽃처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 가벼웁게 금새 지고 만다.

 이 대리는 좋은 사람이다. 그는 늘 왼손 검지에 묵주 반지를 끼고 있으며 시골에 계시는 홀어머니에게 일주일에 한 번은 전화를 걸 줄 아는 사람이다.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응큼하게 달라붙지도 않을 뿐더러 회식 자리에서는 가장 술을 많이 마시고도 택시를 잡아 사람들을 태워 보낼 줄 안다. 신변상의 병을 이유로 갑작스레 퇴직을 하던 날, 이 대리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벌받는 아이처럼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체.
 "민주 씨. 이제 못 봐서 어떡해요? 보고 싶을 것 같은데...제 연락처 알죠? 몸 괜찮아지고 편안해지면 꼭 연락해요.... 아니, 내가 할까?"
 키는 좀 작지만 우직하게 생긴 이 대리가 주섬주섬 말을 꺼내는 게 안쓰럽다. 이 대리에게 이런 면이 있었던가? 건실한, 통통한 저 손을 잡고픈 마음이 울컥 치민다.
 "예, 제가 연락 드릴게요."
 출장을 핑계로 떠난 그의 사무실은 텅 비어 있다. 물끄러미 불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는 보이지 않는 그의 사무실을 마지막으로 훔쳐보고 뒤돌아 선다.

 동생은 조금 얼떨떨한 표정이다.
 "돈이 갑자기 어디서 났어?"
 "퇴직금이야."
 "무슨 회사가 퇴직금을 이렇게 많이 줘?"
 "......"
 동생은 더 묻지 않는다. 동생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애는 왼손 엄지 손톱으로 오른쪽 검지 손가락을 손톱 자국이 나도록 누르고 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 애의 얼굴에서 얼핏 눈물 비스무레한 것이 보인다.
 왜 우는거니? 나는 우는 그 애가 보기 싫다. 그러지 말아. 그러지 말아. 나는 우는 그 애가 보기 싫다.

 하루 종일 누워 있는다. 멍하게. 정말 멍하게 아무 생각 없이 죽은 듯이 누워 있는다.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를 받을 이유가 없다. 나는 속으로 세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전화벨이 열을 다 셌는데도 울린다.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혹시. 불이라도 난 것처럼 벌떡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말라버린 입을 연다.
 "여...보...세요?"
잠시 주저하는 듯한 한숨이 들린다. 빠르게 심장이 뛰고 얼굴은 달아오르고 숨쉬기가 힘이 든다. 그래도 수화기만은 놓치지 않으리라.
 " 민주 씨? 저, 이 대리입니다." 
  아, 아! 그는 그가 아니라 이 대리다.

 양가라고 해 봐야 나는 나와 내 동생뿐이지만, 이 대리는 이 대리와 이 대리의 어머니뿐이지만 양가 상견례가 있는 날이다. 집을 나서기 전 동생은 묻는다.
 "언니, 정말 결혼 할 꺼야?"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스타킹을 신으려다 고개를 동생의 얼굴을 본다. 그리고 또박또박한 어조로 분명하게 말해준다.
 "나, 결혼할거야."
 주문처럼 다시 한번 말한다.
 "나 결혼할거야."
 그래, 난 결혼할거야. 정말이야. 그래, 나는 한 남자의 아내가 될 거야. 그 남자의 하얀 와이셔츠를 다리고, 그 남자가 좋아한다는 김치찌개를 끓이고, 그 사람의 아이를 낳아 학교를 보낼 거야. 아마 아이는 아빠를 닮는다면 키가 좀 작겠지. 그러면 좀 어때? 내 아이니까 난 그 아이를 위해 맛있는 간식도 만들고 동화책도 읽어주겠지. 가끔 부부 싸움을 할지도 몰라. 그래도 지금보다는 낫겠지. 안 그래? 주말에는 가까운 야외로 놀러 갈 거야. 더 이상 남몰래 숨어서 만나지 않아도 돼. 그 하나만으로도 난 너무나 좋은걸. 적금을 붓는다면 언젠가는 작은 아파트도 장만할 수도 있을 거야. 그러면 내 인생에 있어 부족한 게 무엇이 있겠니? 난 너무나 행복에 부풀어서 풍선처럼 터져 버릴지도 모를 일이야. 그 뿐인 줄 아니? 이제 너는 더 이상 상자 안에 있지 않아도 돼. 네가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라도 갈 수 있어. 다시 이 곳에 돌아오지 않아도 되고 언니 이름조차 잊어버려도 돼. 그래도 나는 아무 일 없단다...
 그 애의 어깨가 들썩인다. 너무 좋아서 춤이라도 추고 있는 것일까? 그 애가 좋아하는 걸 보니 내 어깨도 따라 들썩여진다.

 결혼식 날은 일기 예보와 달리 화창하지 않고 비가 내렸다. 사람들은 날씨의 얄궂음을 탓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다.  그런 것쯤은 중요하지 않다.
 이 대리는, 아니, 내 남편은 내 손을 잡고 들어갈 아버지 대신 나의 손을 잡고 입장 해 준다.
 딴딴따단 딴딴따단 딴딴다단.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남편과 나는, 왈츠를 추는 사람들처럼 두 손을 살포시 잡고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식장 안으로 걸어들어 간다. 내 웨딩드레스는 너무나 새하얘서 때가 묻을 것만 같지만 아름답기 그지없다.   
 서울 외곽에 있는 작은 결혼식장 안에는 성스러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지고 엄숙한 남편 측 인사의 주례가 있었으며 하객들의 기쁜 박수 소리가 있다. 직장 다니던 시절의 몇몇 낯익은 사람들의 얼굴도 보였는데 내 눈을 시리게 했던 그의 얼굴은 보이지가 않는다. 다정다감한 사람이라 남의 경조사에는 늘 잊지 않고 참석하던 그 사람인데. 이상한 일이다.
 
 "신랑. 신부 측 직계 가족들! 사진 찍게 어서 서세요!"
사진사가 목청껏 외쳤는데도 남편의 어머니만 서 있자, 남편의 작은 아버지 내외가 내 옆으로 와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사진을 찍는 것을 끝으로 나는 결혼했다. 이제 나는 행복하게 살 것이다. 
  <끝>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도봉구 삼양로144길 33 덕성여자대학교 도서관 402호 덕성여대신문사
  • 대표전화 : 02-901-8551, 8552, 855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전유진
  • 법인명 : 덕성여자대학교
  • 제호 : 덕성여대신문
  • 발행인 : 김경묵
  • 주간 : 조연성
  • 편집인 : 전유진
  • 메일 : press@duksung.ac.kr
  • 덕성여대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1 덕성여대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duksung.ac.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