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문예상 소설부문 우수작
학술문예상 소설부문 우수작
  • 최아영(국문.02)
  • 승인 2003.11.23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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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쓰기에 대한 고찰

시 쓰기에 대한 고찰

 
 내가 그 때 바랬던 건, 그냥 아주 단순하고 유치한 것이었다. 그냥, 좀 뭐랄까, 작은 파장이라고 해야하나, 뭐 말하자면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나의 환상을 와장창 무너뜨려 주었다. 고민이 없었다는 둥, 이런 걸 시라고 봐야하느냐는 둥,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내가 그 '시'를 위해 몇일 밤을 고민하고, 괴로워했는데, 그럼 내가 그냥 휘갈겨 써왔다는 말인가. 하긴, 합평이라는 자리가 그런 것 아니겠나. 어떤 비판이라도 감수하고 묵묵히 들어야 하는, 하지만 나는 서서히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고, 나의 동공도 심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참아야 한다. 내 꼴이 더 우스워 지면 안된다, 내가 여기서 발끈해 버리면. 하지만 나도 신체의 변화는 막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런 나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았는지, 서서히 합평을 끝내가는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작자의 변이 무슨 소용이람, 당신들 눈에는 하찮게 보였겠지만 난 진정 아파하면서 썼다. 그게 그렇게 보인다면 내 능력 탓이겠지, 나는 화를 낼 것만 같았다. 아, 유치하게 이런 자리에서 화를 내다니, 여유롭게, 아주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해야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하지만 늘 가슴은 머리보다 더디어서, 머리로는 다 알지만 가슴으로는 정작 그렇지 못하다. 내가 늘 느끼는 한계가 이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 이런 상황에서 나는 영락없이 유치해지고 만다. 내가 과연 더 시를 들고 올 수 있을까.     
 이렇게 와장창 깨진 날에는 어느 시인의 말이 생각난다. 아니 대부분의 시인이 그랬다. '나에게 시가 왔다'고. 왜 시를 쓰냐고 물어봤을 때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가 내게로 와 주었다고. 얼마나 시적인 대답인가. 그래, 시인이라는 건 타고나는 것이라는 얘기군. 잘났다, 정말. 아주 철없을 때는 진정으로 시가 오는 것인 줄 알았다. 그렇군, 시는 쓰는 것이 아니군, 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것이군. 시가 와서 이제부터 당신 '시인'하시오 하면 시인이 되는 거구나, 이런 순진한 생각까지 했다. 나는 막연하게 나에게 왠지 시가 올 것만 같은 생각을 하곤 했다. 나에게도 시가 성큼성큼 걸어 올거야, 그럼 나는 시인이 되겠지, 그렇다면 너무 행복할 것 같아. 어서, 나에게도 '시'가 왔으면. 하지만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시'라는 것의 머리카락조차 보이지가 않는다. 고등학교 시절 나갔던 모든 백일장에서 나는 단 한번도 수상을 하지 못했고, 숱한 응모에도 나는 어김없이 낙방하곤 했었다. 그 때부터 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아직 나에게 시가 오지 않아서 내가 시를 못쓰는 것일까, 아니면 원래 나는 시를 쓸 사람이 아닌 걸까, 그렇다면 이렇게 명백한 증거 앞에서 나는 앞으로도 계속 시를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너무 오랫동안 시를 짝사랑해왔는데, 그리고 이렇게 그 '시'가 오기만을 한번도 한눈 팔지 않고 기다렸는데, 시는 나에게 오지 않을 것인가. 나는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시가 진짜 오기는 오는 것일까. 

 내가 국문과에 가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애가 무슨 희귀한 말을 하나, 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었다. 하지만 난 옛날부터 누누히 말해 왔었다. 엄마, 아빠, 나는 국문과에 갈거야, 다른 과에는 관심도 없어. 그러니 우리 다른 집들처럼 괜한 싸움하지 말자. 난 엄마, 아빠가 딸의 의사를 존중해주는 굉장히 센스 있는 부모님이기를 바래. 그러니까 나를 설득할 생각은 마. 하지만, 엄마도 아빠도 결코 나의 의견을 존중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냥, 할 말을 잃어서, 너무 기가막혀 하려던 말도 들어가 버렸을 뿐이지, 결코 내 의견에 동의하기 때문에 아무 말도 안하신 건 아니었다. 난, 듣지 않아도 무슨 말이 나올지 다 알고 있었다. 국문과는 무슨 국문과냐, 애가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네, 너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아니, 뭐해서 먹고 살래? 세상은 동화 속 나라가 아니야, 이 병신아. 나의 담임은 그 때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렸다. 내가 그 말을 꺼냈을 때, 국문과 갈껀데요, 라는 말을 했을 때, 자청해서 국문과에 가겠다는 말을 했을 때, 선생님은 교사경력 20년에 이런 황당한 애는 처음 본다는 표정으로 말을 더듬거렸다. 하지만 난 내 주위의 어른들을 놀래키려고 재미있는 쇼를 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진정으로 국문과에 가고 싶었다. 난 시를 쓸건데 그렇다면 국문과에 가야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나는 그 때 장난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장난을 할 만큼 재치있지 못하다. 하지만 어른들은 내가 국문과에 가겠다고 하는 것이 마치 바보온달에게 시집가겠다고 떼를 쓰는 평강공주처럼 보였나 보다. 애야, 그건 너가 자꾸 울어서 그런 말을 한 거지, 진짜 시집가라고 한 건 아니었어, 아니에요, 전 바보온달에게 시집가겠어요, 이런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주위의 어른들은 나를 달래기도 하고 혼내기도 하면서 나를 다른 길로 인도하려 했다. 마치 사탄의 꼬임에 속아서 악의 구렁텅이로 빠지려는 어린 양을 인도하듯, 자, 이것 봐, 이렇게 괜찮은 과들이 숱하게 많은 데 왜 하필이면 국문과를 가겠다고 생고집이니, 너가 지금은 이래도 나중에 나에게 고마워 할 거다. 자, 여기서 골라봐, 여기 맛있는 사탕이 많이 있잖니, 왜 하필이면 제일 맛없는 사탕을 먹겠다고, 아직 네가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구나. 정 그렇다면, 그렇게 협조해주기 싫다면 안 해줘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나는 여태껏 입혀주시고 돌보아 주신 부모님의 정을 생각해서 원서 몇 개는 엄마가, 아빠가 원하는 전망 좋은, 소위 잘 나가는 과를 썼다. 하지만 나는 면접에서 보기 좋게 떨어졌다. 그런 과는 나말고도 갈 애들이 많은 것이다. 괜히 엄한 애를 합격시킬 만큼 교수들도 바보는 아니었으므로. 당연한 결과 아니겠는가, 국문과 갈 학생에게 경영학과 질문이, 혹은 관광학과 질문이 먹히겠는가. 마지막 하나 남은 발표, 아무도 몰래 썼던, 국문과, 그 학교가 당연히 합격이 되었다. 이 정도면 정말 유난스럽게 국문과에 오게 된 것 아닐까, 그리고 그 때부터 나는 시를 써보겠다고, 아니 나에게 시는 온다, 온다하면서 주문을 걸고 있었다. 그런데 이 젠장맞을 시가, 좀처럼 오지를 않는 것이다. 에잇, 이 젠장맞을 시, 왜 오지 않는거야.

  동아리에서, 모두 다 시를 쓰기는 하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그녀의 시를 제일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은 누구의 시는 어떻고 저떻고들 말이 많지만 나는 다른 사람의 시는 잘 모르겠다.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어떤 상징이 있는 건지, 방법론적으로도 어떤론적으로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의 시는 그냥 좋다. 그녀의 시를 좋아하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시를 잘 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의 시를 보는 것이 즐겁고 그녀가 꼭꼭 숨겨 놓았다가 나만 보여주는 그 순간이 너무 설레고 가슴이 벅차다. 하지만, 그녀의 시는 철저히 아프다. 상대방을 철저히 아프게 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느낌일 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의 시를 본 후에는 한참을 가슴을 부여잡아야 한다. 그녀가 어떤 얘기를 쓰든 아무리 우스운 얘기를 써도 나는 참 아프다. 왜 나는 그녀의 시를 읽으면 좋으면서도 아파서 다시는 보기 싫은 느낌이 드는 걸까. 그러면서도 나는 그녀의 시를 기다린다. 하지만 그녀의 시를 읽고 나면 뺨을 맞은 듯 얼얼하고 못 볼 것을 본 듯이 고개를 돌리게 된다. 마음이 잠잠해진 후에야 나는 찬찬히 다시 한번 그녀의 시를 읽어본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의 시는 오래도록 보고 싶은 시가 된다.
 그녀는 괴로운 것 같다. 시를 써내는 것이 괴로운 것 같다. 그녀는. 하지만 나는 그녀의 시를 좋아한다. 그리고 분명 그녀는 시를 잘 쓴다. 한 때 그녀같이 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시들을 놓고 따라 해보기도 했지만 역시 시가 흉측해질 뿐이었다. 그리고 내 시에서 그런 느낌도 나지 않았다. 아무리 흉내를 낸다고 해서 내 시가 그녀의 시처럼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의 시를 보고 있으면 나는 더 시를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그녀에게는 시가 온 것이다. 그런 것이다. 시가 성큼성큼 걸어가 이봐, 나 왔소, 하는 것 같은데 그녀는 자꾸 저리 가, 저리 가, 라고 한다. 그녀는 자기가 시를 잘 쓴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그건 시가 왔는데 자꾸 내쫓기만 한다. 왜 그럴까. 다른 사람들은 특히나 나 같은 사람은 제발 나에게 와라해도 오지 않아서 이렇게 끙끙되고 있는데 그녀는 시가 제 발로 걸어갔는데 영 반기지 않아 하는 것 같다. 왜 그러는 걸까. 그녀는.
 그녀는 늘 시를 써내고 나면 내 앞에서 다짐을 한다. 이제 시 안 쓸거야. 그녀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두렵다. 그녀가 시를 안 쓰겠다니, 아니, 왜 그렇게도 그녀는 시라는 녀석을 냉대하는 건지, 나 같으면 극진하게 대우했을 텐데. 그녀는 막무가내다. 그녀는 '시'가 싫은가 보다. 하지만 그렇게 내쫓을 수도 없지 않은가. 아무튼 나는 그녀가 그 말을 하는 게, 그 말을 듣는 순간이 너무나 두렵다. 제발, 이라는 간절한 눈빛을 보내도 그녀는 단호한 눈빛으로 나의 눈빛을 반사시킨다. 차갑다. 하지만 그래도 여태까지는 늘 다시 시를 써내곤 했다. 그리고 역시 그녀의 시를 읽고 나는 철저히 아팠고 그녀의 시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녀, 지금까지 6개월동안 단 한편도 써내고 있지 않다. 아, 나는 두렵다. 정말 그녀는 시를 쓰지 않을 작정인가. 이렇게 힘들게 발걸음 한 시를 그냥 내보낼 건지, 제발 그녀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나는 그녀가 부러운 건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시샘하고 질투했다. 하지만 어쩌겠나. 나에게는 시가 오지 않는데. 나는 그렇게 쓰고 싶어해도 시가 오지 않아서 쓰지 못하는데 그녀는 시가 떡하니 와서 나 여기 있소, 라고 추근덕거리는데. 난 그녀가 부럽고 그녀의 시를 보고싶다. 그런데 그녀,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입을 꼭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요즘요지부동의 그녀를 보고 있으면 내가 알던 그녀 같지가 않다. 에이, 모르겠다. 그래도 한 번 그녀를 택한 시가 그녀가 꼼짝 않는다고 해서 그녀를 버리고 가겠나. 어떻게 좀 해 봐. 시.
 
 나 역시 기형도를 좋아한다는 걸 알아버린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너는 왜 기형도를 좋아하니? 왜냐고? 음……그건 시가 좋으니까 좋아하지, 그리고 또……그 사람의 알 수 없는 죽음도 좋아하고, 그 사람의 우울했던 인생도 좋아하고, 그냥, 좀 다르잖아 기형도는. 만약에 말이야, 기형도가 오래 오래 살아서 시도 많이 써내고, 그랬다면 난 기형도 안 좋아했을 것 같아. 그리고 그랬다면 기형도 시는 많이 변했겠지, 그 사람이 그 나이에 죽었으니까, 그 만큼의 시를 남기고 죽었으니까 좋아하는 거지, 뭐. 그리고 그 기이한, 약간은 소름끼치는 죽음도 나를 자극시켜. 근데, 있잖아. 우리 엄마가 나보고 죽은 사람 좋아하지 말래, 왜? 글쎄 그건 내가 물어도 대답 안 해주더라고. 아무튼 우리 엄마는 내가 죽음의 '죽'자만 꺼내도 자살의 '자'자만 꺼내도 날 째려봐. 그래서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해. 그녀가 피식 웃는다.
 그러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은 한결같이 행복하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또 젊은 나이에 죽었거나, 자살했거나, 어떻게 죽은 건지 알 수 없는, 아직까지 아무도 모르는 그런 죽음, 그렇게 죽은 사람을 좋아한다. 한번도 즐거웠던 적 없이, 매일 매일 우울해 하다가 너무 일찍 죽어 버린 시인들, 나는 왜 그런 시인을 좋아하는 걸까. 밝고 명랑하고 돈 많으면 시인같지 않아서 그런가.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하니,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한테 조금 미안하다. 그렇게 우울하고 불행하게, 얼마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렸는데, 난 그런 그들의 시를 읽으며 좋아하고 있으니, 너무 모순적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도 시인이 되려면, 불행하게 살다가 일찍 죽어야 나중에 내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텐데. 하지만 난 몸이 튼튼하기 때문에 일찍 죽을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온종일 굶고 술만 마셔볼까. 하지만 나에게도 약간 우울한 면은 있다. 그럼, 절반의 가능성은 있는 걸까. 하지만 우리 엄마가 이걸 알면 내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리려고 할텐데. 엄마는 내가 죽음이나 우울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나타내면, 어디서 그런 싸가지 없는 소리를 하느냐며 진심으로 화를 내신다. 몇 번의 시도를 해 보았지만 나는 말도 못 꺼내고 내 방으로 쫓겨났었다. 시인이 되려는 딸한테 엄마가 이러면 안 되는 데 말이다. 예술가는 죽음과 가깝고, 악마적인 것과는 친하고, 우울은 태생인데 말이다. 그것도 몰라주는 우리 엄마 때문에 시가 더 내게 안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뭐, 말을 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엄마는 내게 이러신다. 정 시가 쓰고 싶으면 밝고 명랑하게 쓰란 말이야, 우울하면 장땡이냐, 시는 반드시 그렇게 써야한다는 법 있어? 그렇게 안 쓴 좋은 시도 많아 라고. 엄마, 그게 잠언이지, 시야? 내가 왜 기형도를 좋아하는데. 에이, 알지도 못하면서.
 
 하루는 그녀가 다짜고짜 나를 보고 묻는다. 그녀가 내민 건 기형도의 '빈 집'이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넌 이 시를 왜 좋아해? 왜냐고? 이것 좀 봐. 사랑을 잃고 쓴데. 짧았던 밤들, 잘 있으래. 창 밖에는 겨울 안개들이 떠돌고 아무것도 몰랐던 촛불들에게도 잘 있으래.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 우와. 눈물들이 망설임을 대신 했다잖아. 아,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까지 이제 잘 있거라. 나 혼자 감탄에 감탄을 하고 있다. 그녀가 피식 웃는다. 그 웃음의 의미는 뭘까. 하긴 좋아하는 이유를 말하라는데 그냥 시를 똑같이 외고 있으니 웃음이 나기도 하겠지. 그럼 너는 이 시를 공감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거구나. 그런 샘이지 뭐. 아무튼, 말로는 잘 못하겠지만 참 좋아. 처음 봤을 때부터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어. 너무 좋아. 나는 합리적이도 않고 논리정연 하지 않게 그냥 엉성하게 좋아한다고 말했다. 나는 왜 '빈 집'을 좋아하는 걸까. 왜?
 그 시를 좋아한다는 건 단지 그 시에 공감하기 때문일까. 공감만 하면 무조건 좋은 시가 되는 걸까. 하긴 생각해보면 내가 좋아했던 시들은 전부 내가 공감했던 시들이다. 한 구절, 한 구절, 그대로 내 마음이었다. 그래서 왜 좋아하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사람들은 내 시에 전혀 공감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내 시는 좋은 시가 되지 못하나 보다. 합평할 때 제일 많이 듣는 소리가 '공감할 수 없어'다. 뭐, 나도 공감하라고 쓴 건 아니다. 그냥, 쓴 것뿐이다. 사람들은 그럼 내 시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이건 시가 아니라, 너의 일기나 수업시간에 잠깐 낙서한 것에 불과하다고. 이걸 시라고 말할 수 있니, 물론 일기도 시가 될 수 있어. 하지만 너의 일기는 시가 될 수 없어, 라고. 그래, 일기가 어떻게 시가 되겠나. 더구나 내 일기는 시가 될 수 없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이니까.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억지를 부린다. 다른 사람의 일기는 시가 되는데 왜 나의 일기만 시가 될 수 없다는 거지? 기성시인들의 시에도 그런 시들은 얼마든지 많다고. 하지만 우린 그걸 시가 아니라고 하지는 않잖아. 기성시인들이 써내면 전부 시가 되고, 우리는 아직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시가 안 된다는 건가. 그럼 일단 시인이 되기만 하면 어떻게 끄적이든지 간에 전부 시가 된단 말이야? 하지만 일단 말을 해 놓고 나면 참 허탈하다. 분명, 그건 아닌데. 하지만 기성시인들의 시집에 실린 몇몇 시들은 내가 보기에도 정말 허접하기 짝이 없는데. 하지만 그것도 시라고 버젓이 시집에 실려있다. 그런 것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사실을 고백하자면 가끔, 도저히 시가 써지지 않으면 나는 내 일기장을 뒤적거려 시가 될 만한 것이 없나하고 찾아본다. 몇 장을 들추다 보면 괜찮다 싶은 구절도 있고 마음에 드는 부분도 있어 나는 그것을 조금 손 봐 합평 할 때 졸랑졸랑 들고 간다. 그럼 여지없이 사람들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또 이런 걸 가지고 왔냐는 식으로 나를 쳐다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시로 내놓아도 영 손색이 없는 것 같은데, 나도 나름대로 고민하고 고치고 지우고 해서 흐뭇한 마음으로 시를 들고 가면 그들은 어김없이 일격을 가한다. 이러는 것도 한 두 번이 아닌데 난 또 시를 썼답시고 가져가고 사람들은 눈을 부라린다. 마음은 만신창이, 엉망진창이 돼서 일단은 소주로 응급처치를 하지만 그건 그저 응급처치에 불과할 뿐 아무것도 수습되지 않고 치유되지 않고 그렇다고 내 시가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이쯤이면 포기할 때도 되었는데, 나는 왜 아직도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시에게 이다지도 마음을 못 버리고 또 이렇게 웃으면서 실실거리면서 수작이나 한 번 걸어볼까 하는 건달 심정으로 기웃거리는 걸까. 나도 쿨하게 시를 훌훌 털어 버리고 어디든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하지만 하는 마음이 나를 놓아주지 않고, 혹시나, 혹시나 하는 마음이 나를 이렇게 붙잡는다.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이다.

 이번 학기에는 큰마음을 먹고 시창작론을 수강했다. 그래, 어떤 수업인지 한번 들어나 보자. 그런데 선생님은 자꾸 엉뚱한 소리만 하신다. 시 쓰는 방법에 대해서는 가르쳐 주지 않으시고 시인들의 사생활이나 말해주고는 수업을 끝낸다. 수업 이름은 '시창작론'인데 어째서 이렇게 쓸데없는 소리만 하시는 건지. 뭐, 나는 좋다. 가벼운 마음으로 수업을 들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듣다보니 그것도 다 공부겠거니, 하는 마음이 생긴다. 뭐, 나쁘지는 않다. 하루는 시창작론 시간에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하신다. 시인은 별 다른 취미생활이 없는 사람이라고. 시인은 오로지 글로 표현해내는 것이 취미고 낙이고 삶의 이유란다. 어디 들어본 적이나 있나, 시인이 내 취미는 수상스키요, 스킨스쿠버라고 하는 것을.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 시인이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라고 하신다. 하긴, 기형도가 테니스를 치고 있는 모습이란 전혀 상상이 안 된다. 시인은 할 줄 아는 건 하나도 없고 오로지 글로 써내는 것, 이것이 시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란다. 또 배부르고 등 따스우면 시가 안 나온단다. 배부른 돼지가 어디 시를 쓰겠느냐고 하신다. 생활이 풍족하면 시는 나오지 않는 거란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는 선생님. 날 봐. 이제 선생님은 시 못쓰신다는 얘기인가.
 그럼 내가 시를 쓰지 못하는 이유는 아니, 시가 내게 오지 않는 이유는 내가 배부르고 등 따습기 때문인가. 그럼 이제부터라도 억지로 굶어볼까. 그럼 시가 올까. 가난해야 비참해야 너무 너무 사는 게 고달파야 시가 오는 것이라고 하면 그렇다면 그렇게 상황을 만들면 과연 내게도 시가 올까. 그럼 이제부터 시를 오게 하기 위해서 상황연출 해볼까나. 자, 나 한 3일은 족히 굶었고, 너무 사는 게 괴롭다. 시여, 어서 오라. 나에게 오라.

 이제는 만성이 되어서 아무렇지도 않지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못이 박혀버린 그 소리. 너 시 써서 어떻게 먹고살려 그러니, 네가 아주 가난을 작정을 하는 구나. 시를 쓴다는 게 그렇게 희귀한 일인가, 왜들 그렇게 난리법석을 치는지. 우리 아빠는 내게 딱 한마디만 하셨다. 죽을 때까지 너 밥 못 먹여주니 네 밥벌이는 알아서 해라. 그러니 시 쓰지 말라는 얘기다. 시 쓰면 밥 못 먹고 그러면 당연히 집에 손 벌릴거고, 그렇다고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남자한테 시집을 빨리 갈 것 같지도 않고, 그러면 학교 졸업하고도 집에서 시라는 걸 쓴다고 밥이나 축낼텐데 아빠는 그 꼴 못 보시겠다는 거다. 빈대처럼 부모님한테 붙어서 사는 꼬락서니는 절대 못 봐주겠다 이거다. 나도 그건 싫다. 나라고 뭐 생각이 없는 줄 아나. 사실은 나도 약간 불안하다. 이대로라면 절대 내가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지는, 아니 시가 내게 올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면 난 지금부터라도 일명 취업준비라도 해야하는 데, 그래도 여태까지 기다린 시간이 있는데 지금 포기하기는 그 시간이 너무 아깝고.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 토익인가 토플인가 하는 것도 하기 싫을 뿐더러 난 자격증 같은 것도 하나도 없고 특별한 재능이라곤, 공상하면서 시간 죽이기와 그저 끄적이는 것뿐인데, 어떻게 나 같은 애가 취업을 하겠느냔 말이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시라는 녀석이 내게 와주어야 할 텐데, 그걸로 어디 당선이라도 되면, 그렇게 눈치 주던 아빠한테 이것 보시오 하며 당당해질 수 있는데. 이 녀석은 어디서 무엇을 하느라고 이리 더디 오는지. 아, 정말 나에게 오지 않는 건 아닌가. 정말 시라는 녀석은 나에게 오지 않을 참인가.
 엄마도 한마디했다. 네가 좋아하는 거랑 잘하는 거랑 착각하지 마라. (실로 난 잘하는 게 없다.) 너는 글 쓰는 걸 좋아하는 것뿐이지 너에게 그 재주가 있는 건 아니야. 넌 단지 좋아하는 것 뿐이야. 아, 이 말은 나에게 굉장히 충격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부모는 고슴도치 사랑이라고 하는데 엄마에게 나는 고슴도치가 아닌가 보다. 세상 사람들이 전부 나에게 아니라고 말해도 엄마는 기라고 해주기를 바랬는데, 우리 엄마는 나에게 냉정히 말한다. 넌 잘 못써. 하지만 현실을 위해서 우리 엄마처럼 사실을 말해주는 게 더 좋은 것 같기도 하다. 우리 엄마 말에 의하면 난 아직도 공상의 세계에 있지만 그래도 가끔 그 공상의 세계에서 나와 그 안에서 즐거워하고 있는 나를 바라볼 수 있으니까. 그 모습을 보면 정말 소름이 돋는다. 아, 정말 공상으로 끝나고 말 것인가. 결국 시란 나에게 꿈으로 그치는 것일까. 그건 나의 공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정말 내가 착각하고 있었던 건가. 나 혼자만 좋아했던 것일까. 나에게 올 듯 말 듯 하던 시, 그렇다면 정말 나 혼자만 짝사랑한 걸까.
 그녀는 위로한답시고 이렇게 말한다. 아니야, 너 잘 써. 내가 보기에는 잘 쓰는 것 같은데.

 빌어먹을 시 때문에 20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아니, 기다렸다. 열심히 열심히 기다렸다. 봄은 기다리지 않아도 온다고 하던데 왜 나에게 시는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일까. 내가 정말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이번 학기에 시창작론을 수강한 건 이번이 아니면 못들을 것 같은 마음 때문이었다. 난 올해가 지나면 더 이상 '시'에 대해서 말하지 못할 것 같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어도 올해로 시를 결단내야 한다. 시를 포기하던지, 아님 더 기다리던지, 하지만 나는 왠지 더 이상 '시'를 기다릴 수 없을 것 같다. 그래, 이번이 마지막이다. 올해가 지나면 시는 끝이다. 더 이상 맹목적인 기다림을 하기엔 나는 너무 이기적이고 계산적이다. 선생님이 그러신다. 시창작론을 들으러 오는 데, 아무 생각 없이 오지는 않았겠지, 라고. 선생님은 아마도 시를 쓰기 위해서 들으러 왔다고 생각하시겠지. 선생님은, 우리에게 더 치열해지라고, 시를 쓰기 위해서 더 치열해지라고 말씀하신다. 그래, 나도 그냥 들으러 온 건 아니다. 조금 불순한 의도이기는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시에 대해서 얘기하는 게 너무 뻔뻔해질 것 같아서, 이렇게 내 자리도 아닌 곳을 머뭇거리는 짓을 올해가 아니면 못할 것 같아서, 마지막 인사라고 할까. 나는 이제 더 이상 20살이 아니다. 시도 그런 게 아닐까. 어떤 유효기간 같은 것, 그런 게 아닐까. 나는, 나에게 이제 더 보류해 줄 시간이 없다.
 이렇게 불순한 생각을 가지고 수업에 들어오는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을 것이다. 선생님한테도 시한테도 미안할 뿐이다. 하지만 어쩌랴. 이제 이 대책 없는 사랑을 끝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제 미련을 훌훌 털어 버려야지. 어느 노래 가사처럼 이건 나에게 미안해서 더 못할 짓이다. 설령 시가 나에게 오기로 되어 있었다고 해도, 됐다. 이제 더 이상 반갑지 않을 것 같다. 아, 나는 이렇게 서서히 시를 포기해 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런 척하고 싶어서 이렇게 안간힘을 쓰는 걸까. 사실은 시가 나에게로 와주면 버선발로 뛰어 나갈거면서. 그래, 이 가증스러움, 이걸 더 이상 못 참겠다. 나 이제 포기했어, 라고 말하면서 뒤 돌아서서 한 번만 더, 혹시나, 그래도 하는 마음으로 숨어서 기다리다가, 나를 찾아내서 내 이름 불러주기만 하면 금방 스르륵 눈물 흘러버릴 것 같은 마음, 그런 거다. 나에게 시는.
 솔직히 말해보자. 나는 여태까지 시를 썼다. 결코 시는 내게 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썼던 시들은 전부 '시'가 아니다. 그래서 내 시가 '시'가 되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래서 시를 기다린다. 시가 정말 오기는 오는 건가. 그냥 이렇게 쓰면 안 되나. 그래, 그럼 이제 나는 더 이상 시를 쓰지 말아야 한다. 그건 시가 아니므로. 그건 그냥, 그저 그런 것일 뿐이다. 시가 아닌……
 그래, 또 어느 날 선생님이 이런 말씀도 하셨다. 시인은 '시'가 시인을 말해준다고. 시인은 대체적으로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시인들은 자기들이 써낸 시처럼 그렇게 꼭 그만큼 '시'와 닮아있다고 한다. 하지만 소설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소설가는 소설가일 뿐 소설과 소설가는 전혀 닮아 있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것이 시인과 소설가의 차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소설가는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시인은 그렇지 못하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시인은 거짓말을 하는 순간부터 시를 쓸 수 없다고 한다. 그렇겠지. 엄연히 소설가와 시인은 틀릴 것이다. 소설은 허구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고 시는 시인 내면의 사유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니까, 시가 쉽게 나온다면야, 그것은 아마도 괴로운 일일 것이다. 윤동주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시가 이렇게 쉽게 나와도 되는 것이냐고. 그럴 것이다. 선생님은  그만큼 시 쓰기가 고통스럽고 그런 처절한 고뇌 속에서 나와야 한다는 걸 말하고 싶으신 거다. 그래, 어쩌면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나는, 내가 시를 쓰지 못하는 건, 나는 거짓말 밖에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 나는 결코 진실을 말할 수가 없다. 그 때, 내가 너를 얼마나 질투했는지 아니, 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시를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나는 어쨌든 단 한순간도 솔직한 적 없었으니, 그래서 나는 시를 쓸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래서 시가 내게 오지 않는다는 생각, 나는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나는 왜 시를 쓸 수 없는 가에 대해서 고민하고 고민하면서, 나는 그렇게 까지 생각했다. 결국 시를 쓰지 못할 것이라는, 죽는 그 순간까지 내가 나를 위해서, 또는 너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거짓말 밖에 하지 못한다면 나는 결국 단 한편의 시도 쓰지 못한 채 그냥 죽고 말겠지. 아마, 그럴 것 같다는, 나의 숱한 고민 끝에 내려진 결론은 그 비슷한 것이었다. 억지를 쓰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나는 변명을 하고 싶었다. 내게 시가 오지 않아서 나는 시를 쓸 수 없다고, 어느 시인의 말대로 시가 저절로 왔다고, 하지만 나에게 결코 시가 오지 않는다고, 그래서 이렇게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지만 결코 시는 나를 선택하지 않을 것 같다고. 하지만 내가 시를 쓰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는 내가 이제는 내 자신에게조차 솔직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걸 나는 그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공감을 느낄 수 없었던 것도, 고민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던 것도, 그렇게 숱한 비난의 말들은, 그 원인은, 내가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내 시는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어느 것 하나도 진실 되지 못했으니, 그렇다. 내 시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시를 쓰는 내내 나는 이것은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하지만 사람들이 내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걸 알까. 또 거짓말이면 어때, 그냥 '시'라는 모습만 가지고 있으면 되지. 거짓말을 쓰면서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속기를 바랬던 것, 그게 나의 시였다. 하지만 아무도, 혹은 모두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내가 거짓말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그렇게 그런 말을 해주었는지도.

 그녀가, 내게 시를 보여줬다. 긴 침묵을 깨고 그녀가 드디어 나에게 시를 보여줬다. 그녀가 혹시나 진짜로 시를 쓰지 않으면 어쩌나, 나는 그녀에게 말도 못하고 혼자서 끙끙댔다. 그녀는 알까, 내가 그녀의 시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그녀가 진짜로, 시를 쓰지 않을까, 그 말이 사실이 될까봐, 내가 늘 그녀의 일기장을 훔쳐보려고, 어떤 흔적이라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얼마나 내가 그녀에게 주의를 기울였던가. 그녀가, 그렇게 나를 애태우게 했던 그녀가 갓 시집 온 새댁처럼 주섬주섬 나에게 시를 건낸다.
 아팠다. 역시나, 난 또 그녀의 시를 읽고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그러면서 또 드는 생각은 그녀의 시가 이렇게 나를 아프게 하는구나, 그래서 내가 그녀의 시를 좋아하는 구나, 그렇다면 나의 시는? 나의 시는 아프지 않기 때문에 '시'가 될 수 없는 게 아닐까. 내 시가 단 한 사람의 마음이라도 아프게 할 수 있을까. 내 '시'로 인해 누군가가 아플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해서 내 시는 '시'가 될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러면서 결론 역시, 나는 시를 쓸 수 없나봐. 난 이렇게 그녀의 시나 읽으면서 아파해야지. 되지도 않는 시를 붙잡고 있어봤자, 아무 것도 나오지 않을 것, 난 이렇게 그녀의 시를 읽으며 평생 아파할 수 있다면 좋겠어, 라는 생각. 그러니 제발, 시를 쓰지 않겠다는 말로 나를 가슴 졸이게 하지 마. 봐, 이렇게 내 마음을 아프게 하잖아. 난 네 시를 읽으면서 아프다고. 왜 명백한 증거를 믿지 않으려고 하지? 이토록 명백한 증거가 어디 있겠어. 넌 시를 써야해. 그렇다면 난? 시를 쓰지 말아야 해?

 가끔, 이런 날은, 이런 기분일 때는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뭐라고 딱히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이런 기분, 이런 기분일 때는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기분은 뭐 그리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왠지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나는 가슴이 벅차기도 한다. 그럼 나는 생각한다. 안 돼, 흔들리면 안 돼, 이 기분을 그대로 가지고 가야 해. 여기서 웃어버리면 그냥 끝장이라고, 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나를 진정시킨다. 내가 시를 쓸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자, 자, 자 모른 척을 하는 거야, 모른 척을 해야 해……. 아니야, 나는 지금 시를 쓰려는 게 아니야. 아니라니까, 도망가지 마. 시.
 한 줄 써놓고, 에잇, 이건 어디서 많이 본 시 구절이잖아, 한 줄 써놓고, 에잇 이건 너무 상투적이야, 그 다음부터 도무지 쓸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에잇, 난 쓸 수 없나봐. 연습장에 벅벅 줄을 그어놓고, 나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연습장을 노려본다. 에잇, 이까짓 시가 뭐라고 이렇게 연연해하고 있어야 하는 거지. 이런 거 할 시간에 토익에 잘 나오는 영어단어나 외울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생산적인 일을 할까, 에잇,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걸까. 그런데 왜 나는 펜을 놓지 못하고 있지, 이런 생각 중에도 나는 다음 구절을 생각하고 있다. 혹은 박박 그어버린 사이로 마음에 들지 않는 구절을 다시 고치고 있는 것이다. 이건 불치병인가, 마치 암 말기 환자가, 아직도 미련이 남아 생을 못 버리고 몸에 좋다는 온갖 약을 먹어보는 것처럼, 나는 그런 마음으로 시를 쓰려고 하고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시를 버릴 수 없게 만든다. 나는, 그래도 시를 쓴다, 박박 긁어가면서, 연습장을 박박 긁어 가면서, 그래서 괜찮은 구절 하나 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래서 또 오늘밤에도 이렇게 되지도 않는 시를 쓰고 있다. 하지만, 될는지 안 될는지는 일단 써봐야 하지 않겠나, 또 깨지더라도, 그래도 한 번쯤은 다시, 한 번쯤은 써야 하지 않을까. 내일은 합평을 받아볼까, 한번. 아니, 또 깨질 거 뻔한데 괜한 일하지 말까. 어떻게 할까,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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