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문장가들, 그들의 흔적을 만나다
대한민국의 문장가들, 그들의 흔적을 만나다
  • 이경라 기자
  • 승인 2011.03.16 17: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잃어버린 서울을 찾아서 2

 우리나라 최초의 신체시를 쓴 시인은? 정답은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쓴 최남선.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을 쓴 소설가는? 정답은 <무정>을 쓴 이광수.
 우리나라 문학 발전 기틀을 세우고 토대를 닦아온 유명 작가들이 작품 활동을 펼친 공간이 서울이라면, 그들의 흔적이 궁금하지 않은가. 우리들에게 익히 잘 알려진 청록파 시인 박목월, 만해 한용운, 빙허 현진건, 춘원 이광수의 스러진 고택, 별장 등 그들의 흔적을 찾아 버스에 올랐다.

#1. 박목월, 그리고 가랑잎처럼 스러진 옛집
 박목월 시인이 말년 12년간 시작(詩作) 활동을 했던 옛집이 용산구 원효로 4가에 ‘있었다’. 실제로 작품 활동을 했던 집필지지만 2004년 2월 14일 관할구청에 멸실 신고를 함으로써 그의 옛집은 사라졌다.
 안타깝게도 집이 철거된 이유는 유족들의 경제난 때문이라고. 이 집은 선생이 사망한 이후 4명의 자녀들이 보존하고 있었으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여러 차례 매각의 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2001년 선생의 옛집에 대한 경매에서 박목월의 아들 박동규 교수의 부인이 낙찰을 받아 2002년 5월 그 자리에 다세대 주택(지하 1층, 지상 2층)을 건축하기 위하여 관할인 용산구의 건축허가를 받은 사실이 확인되었다.
 보존을 위해 적극적인 매입 추진과, 기자회견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문화재청과 서울시가 합동현장조사에 나가기도 전에 이미 이 집은 헐린 것으로 확인됐다. 이 때문에 50년이 지난 건축물을 헐 때는 허가제 도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곳곳에서 나올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샀던 박목월의 흔적은 더 이상 원효로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국가적으로 보존을 하려는 생각이 있었더라면, 매각의 위기가 있었을 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보존을 했다면, 박목월의 시상이 담긴 그 집이 서울의 문화재로써 또 다른 가치를 지니지 않았을까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든다.

#2. 한용운, 그리고 깨달음이 깃든 심우장
 성북구 성북동 222-1번지, 좁고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다보면 벽돌집, 시멘트 담장과는 다르게 기왓장이 올라간 한옥이 있다. 바로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만해 한용운이 지은 집인 심우장(尋牛莊)이다. 남향을 선호하는 한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북향집인데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되므로 이를 거부하고 반대편 산비탈의 북향터를 선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일제에 저항하는 삶을 일관했던 한용운은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이 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이후 1985년 7월 5일, 심우장은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심우장은 만해의 사상 연구소로 이용되고 있으며 시민들이 조용히 둘러보다 갈 수 있는 장소로 개방되어 있다. 한용운이 쓰던 방에는 그의 존영 사진, 글씨, 연구논문집, 옥중공판기록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서울에 남아있는 여러 문인들의 옛집 중 유일하게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이 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면서도 다른 고택들을 보존하지 못하고 철거해버렸다는 것에 답답함을 느낀다. 일제시대에 조국이 짓밟히는 아픈 역사 속에서도 민족의 혼을 간직한 심우장. 작은 표지판만을 의지해서 찾아가야 하는 이곳이 앞으로는 어떻게 후손들에게 기억될까.

#3. 현진건, 그리고 빈 터
 종로구 부암동 325-2. 우리나라 근대문단의 사실주의 대표작가 빙허 현진건 의 고택은 2003년 철거됐다. 현재는 빈터만 남아있을 뿐이고 현진건의 옛집이 있었다는 표지석만 남아있다.
 현진건 고택은 팔작지붕에 겹처마로 근대문화유산의 가치도 충분하며, 이 집에서 현 선생이 집필활동을 해 문화사적 가치도 충분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서울시는 1994년과 1999년 문화재 위원회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는 결정을 내렸고 다른 작가들과의 형평성 문제를 들어 문화재 지정이 어렵다는 입장을 표했다.
종로구 문화재심의위원회는 이 건물을 “기념물 또는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여 매입하고 현진건 기념관을 건립하자”고 서울시에 건의했지만 7년이 훌쩍 넘은 세월에도 빈터만 남아있을 뿐이고 집터를 지켜오던 오래된 은행나무까지 베어버린 것이 현실이다.
 종로구청은 종로구를 ‘문화1등구’로 조성하겠다고 말하면서도 현진건의 옛집, 그의 문학, 그의 예술성을 지켜내지 못하고 통째로 잃어버렸다. 그의 대표작 <운수 좋은 날>의 첫 장면처럼 눈이 올 듯 하다가 얼다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공간만이 남고 그의 집은 사라졌다.

#4. 이광수, 그리고 ‘접근금지’
 춘원헌. 춘원 이광수의 별장이다. 종로구 홍지동에 위치한 이 집은 위의 세 곳과 달리 개인 주택으로 남아있다. 상명대학교 정문을 들어서 굽이굽이 체감각도 65도에 이르는 가파른 길을 올라야 높은 담장 사이로 언뜻 보이는 한옥집이 있다. 이광수의 홍지동 별장임을 알리는 안내문이 있기는 하지만 대문 앞에 CCTV와 적외선 감지기가 설치되어 ‘접근금지’라는 경계를 표시하고 있다. 용기내어 대문을 두드렸을 때 “집주인이 없다”라는 말 밖에 들을 수 없었고 대문 안은 쉬이 구경할 수 없었다. 
 현재의 집 주인은 이광수의 별장을 사 이층 양옥으로 개조하려 했는데 이광수의 자취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지인들의 부탁에 의해 ‘춘원헌’ 이라는 이름으로 변형없이 남아있다.
 이광수는 말년 친일의 행적으로 인해 민족적인 작가라는 타이틀은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 근대문학사의 선구적인 작가로서 근대 장편소설의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는 인정해야하지 않을까? 높다란 골목 어귀에서 보이는 세검정의 정경과 북악산이 이광수의 문장에 한 몫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며 다시 버스에 오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도봉구 삼양로144길 33 덕성여자대학교 도서관 402호 덕성여대신문사
  • 대표전화 : 02-901-8551, 8558
  • 청소년보호책임자 : 고유미
  • 법인명 : 덕성여자대학교
  • 제호 : 덕성여대신문
  • 발행인 : 김건희
  • 주간 : 조연성
  • 편집인 : 고유미
  • 메일 : press@duksung.ac.kr
  • 덕성여대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덕성여대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duksung.ac.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