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를 쓴 소녀
모자를 쓴 소녀
  • 이주은
  • 승인 2011.03.21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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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 생각해보니 나는 르느아르의 그림이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 택시를 타면 요금표 바로 위에 “오늘도 무사히”라는 문구와 함께 손을 모으고 있던 붉은 긴 머리의 소녀, 아하, 르느아르의 그림이었구나. 삼촌이 외국 다녀온 기념으로 사다준 뮤직 박스 위에는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것 역시 르느아르의 그림이었다. 피아노책 넣는 네모난 면 가방 위에는 피아노를 치는 두 소녀가 판화로 찍혀 있었는데, 그것도 르느아르였다.
르느아르가 그린 소녀는 모두 참 사랑스럽다. 복숭아색 얼굴에 긴 머리카락도 예쁘고, 잔잔한 꽃무늬가 있는 원피스와 리본이 달린 구두도 깜찍하지만, 가장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머리 위에 사뿐히 놓여 화사한 빛을 반사하고 있는 새하얀 모자였다. <모자를 쓴 어린 소녀>에서도 그림의 진정한 주인공은 반쯤 등을 돌리고 있는 소녀의 얼굴이 아니라,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모자가 아닐까? 리본의 주홍색이 함께 어우러져 색채만으로도 전체적으로 아주 풍부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환한 빛, 흰색의 야외용 모자, 햇살 아래로 나온 천진한 소녀, 이 세 요소의 결합은 일상의 걱정을 모두 잊을 수 있을 만큼 평화롭고 행복한 순간을 떠오르게 한다.
내겐 마치 부적같이, 그것만 쓰면 행복해질 것 같은 모자가 있다. 어느 해 생일에 무슨 기분이 들었는지 패션모자 전문점에 들어가서 특별히 고른 것이었다. 오드리 햅번이 쓴 것 같은 커다란 챙이 달린 것도 있었고,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주인공들에게 어울릴 만한 시골풍의 모자도 있었다. 그 중에서 유독 끌렸던 것은 르느아르의 그림 속 소녀의 것과 비슷한 풍의 모자였다.
사실 일 년 중 그 모자를 꺼내 쓰는 일은 거의, 아니 전혀 없다. 야외에 나갈 때 모자를 한번 슬쩍 걸쳐 보지만, 너무 눈에 띄는 것 같아 감히 용기를 내지 못한다. 하지만 이제 알 것 같다. 왜 쓰고 다니지도 못 할 모자에 이끌렸는지, 왜 가끔 그것을 혼자 써보면서 흐뭇해 하는지…. 르느아르의 모자는 내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행복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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