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찍한 티타임
깜찍한 티타임
  • 이주은 <그림에, 마음을 놓다> 저자
  • 승인 2011.05.07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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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메리 카사트(Mary Cassatt), <차 한 잔 Cup of Tea>, 1880, 보스턴 미술관 소장.

  “여기까지 본 것 중에 질문 있어요?” 그러자 어느 학생이 손을 번쩍 들더니 엉뚱하게도 내 방에는 어떤 그림이 걸려 있는지 물어본다. “진품은 아니고, 메리 카사트(Mary Cassatt)가 그린 <차 한 잔>이라는 그림이에요.” 카사트는 미국 태생으로 프랑스에서 인상주의자들과 같이 활동했고 주로 실내에서 벌어지는 여인의 잔잔한 일상을 그렸다. <차 한 잔>을 처음 보았을 때 굉장히 이끌렸다기보다는 그림에 깃든 고요하고 편안한 기분을 간직하고 싶어 포스터를 샀다. 아이를 재운 후에 느끼는 엄마의 노곤한 휴식에 비유할 수 있는 그림이랄까.

  방에 걸린 그림에는 어딘가 방 주인의 로망을 건드는 부분이 있다. 차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혼자 아이디어를 모으는 것, 또는 차와 더불어 좋은 사람과 향긋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귀족적인 향유를 즐기고픈 나의 오랜 로망이다. 서양 구분 없이 차를 즐기는 문화는 교양 있고 시간적인 여유가 많은 귀족에 의해 시작되어 발달하였다. 본래 귀족들의 티타임은 주로 정원에서의 소풍을 의미했고, 은은한 불빛, 연주자가 들려주는 음악, 꽃향기, 버터가 듬뿍 발린 빵과 달콤한 파이 등이 티와 함께 곁들여지는 오감만족의 시간이기도 했다.

  산업화된 근대사회에 들어서면서 티타임은 소풍이 아니라 오늘날과 같은 쉼표의 의미로 굳혀지게 된다. 근로자들이 쉬지 않고 일을 하면서 집중력이 떨어지자 공장주는 오후 한 차례의 휴식 시간을 공식으로 허용하였고, 이를 티타임이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티타임은 다음 일을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가지는 잠깐의 멈춤과 각성의 시간인 것이다.

  <차 한 잔>은 한낮의 휴식과 몽상의 시간을 간절히 갈구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그림이다. 바로 지금 내가 누리는 차 한 잔만큼의 여유가 그것이 경제적 여유이건 시간적 여유이건 상관없이, 향유이건 쉼표이건 상관없이, 얼마나 소중하고 의미 있는지 매일 방에 걸린 그림을 보면서 다시금 깨닫곤 한다.
내 말을 기억했는지 5월의 나른한 오후 수업에 정말로 깜찍한 선물을 받았다. 교탁 위엔 거품 많은 커피가 한 잔 놓여있고 학생들도 저마다 커피 한잔씩 건배하듯 손에 쥐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들 입을 모아 이렇게 외쳤다. “오늘 수업은 티타임으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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