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문예상 수필,꽁트,동회부문 응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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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11.23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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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할머니


                                       할 머 니            
                                                                                                        

  전화를 받고, 집에 가는 발걸음만이 급한 것은 아니었다. 발을 구르기도 무척 바빴지만 내 눈은 눈물을 내보내느라 바빴을 것이다. 내일과 모레의 시험 과목 책을 정신없이 싸들고 오빠와 병원을 향했다. 그런데 우리가 탄 지하철은 너무 느렸다. 그 날은 무척이나 답답하게 느껴졌다. 도착해 보니 할머니를 모시는 큰삼촌과 외숙모, 사촌 언니와 오빠, 이모들이 앉아 계셨다. 처음에 사촌 언니가 왔는지 알 수 없었는데 한 쪽 구석에서 흐느끼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때 사촌 언니도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위독하시다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중환자실의 면회 시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할머니를 바로 만날 수가 없었다. 단 몇 초라도 할머니를 보고 싶어하는 나와 친척들은 더 많은 수가 모이면 간호사에게 부탁해서 잠깐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하자는 말을 끝으로 각자 흐느끼거나 뭔가 다들 조용히 생각만 하였다.
오늘을 넘기기 힘들다던 할머니를 바로 만나보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는 그 시간은, 도착하자마자 할머니의 위독한 상태를 본 것보다, 나에게는 버티기 더 힘든 시간이었다. 할머니가 어떤지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 할머니의 상태를 의사의 진단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보고 싶었다, 확인하고 싶었다.
  의자에 앉아 있으려니 눈물도 참을 수가 없고, 그렇게도 부지런히 움직이셨던 할머니가 꼼짝없이 누워 계셔서 답답해 실 것을 대신이라도 풀어드리려는 듯 나는 밖에 나와서 좁은 공간을 정해 계속 맴돌았다. 그렇게 의미 없이 걸음을 재촉하는 중에 할머니와 관련된 많은 생각들이 머리 속에서 지나갔다. 하나하나 그 장면들을 되짚어 볼 여유가 안될 만큼 순식간에 많은 장면이 생생하면서도 빠르게 지나갔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강하게 기억되는 것은, 식혜와 관련된 일이다.
맞벌이로 평소에 피곤해 하는 막내딸의 집에 종종 오셔서 할머니는 집안 일을 거의 완벽하게 해 놓으신다. 그리고 오실 때마다 손녀의 부탁의 못 이겨, 보통 어른의 상체가 들어갈 만한 크기의 솥에 식혜를 해 놓곤 하셨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적부터 할머니께서 집으로 오신다고 하면 으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식혜를 연상하곤 했다.
그런데 한 2∼3년 전인가 대학생이 되어 할머니 댁에 놀러갔는데 할머니께서 내가 오자마자 식혜를 내밀어 한 번에 들이키라고 하셨다. 며칠 전에 식혜를 했는데, 명절이라 내가 올 것을 알고 그 중에서 내가 먹을 만큼 한 컵에 남겨 놓으셨단다. 할머니의 말에 크게 웃으면서 할머니가 최고라고 말하며 입을 컵에 옮겼다. 그런데 식혜가 혀에 닿는 순간 시큼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할머니가 손녀딸을 위해 며칠 간 고이 남겨둔 식혜가 쉰 것이었다. 할머니는 내가 좋아하며 꿀꺽 꿀꺽 마시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으시려는 듯 바로 앞에서 너무나도 활짝 웃으시며 나를 보고 계셨다. 그런 할머니께 식혜가 쉬었다고 하면서 돌려드릴 순 없었다. 그래서 그냥 한 번에 다 삼키고 정말 맛있다고, 역시 할머니가 해 준 식혜가 최고라며 어리광을 부렸다.
  병원 앞에서, 할머니의 그 웃는 모습이 어찌나 그리 생생하게 떠오르던지 난 더 서글피 울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단순히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기보다, 할머니의 사랑이 생생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할머니와의 추억들은 식혜로부터 출발하여, 따뜻한 여름 날 동안 할머니 팔을 베개하고 누워 편히 잤던 기억도 끌어내면서 계속 진행되었다. 그 때 불러주셨던 노래는 제목도 모르고 가사도 분명치 않았지만 잠이 오게 하는 최고의 자장가였다.
또, 어느 날 할머니 댁에서 너무 늙어 버린 할머니의 모습에 마음이 안타깝고 왠지 죄송스러워 몰래 눈물을 삼키며 할머니방 TV 덮개 위에 돈을 놓고 왔던 장면도 스쳐 지나갔다. 항상 집에 갈 때 그렇게 '들어가세요, 들어가세요'라고 반복해서 말해도 그 어두운 눈으로 내가 전혀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 참 동안이나 서 계신 할머니의 모습도 순식간에 지나갔다.
많은 기억들을 스쳐보내면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기도를 했다. 할머니를 지금 데려가면 안 된다고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할머니, 지금은 안 된다고...
나의 외할머니는 친할머니에게서 느껴지는 사랑과 혈육의 정 외에도 그 무엇인가가 항상 있었다. 할머니를 보기만 하여도 가슴 뭉클한, 또한 마음을 저리게 하는 무엇인가가...
그런 할머니를 바쁘다는 핑계로 찾아 뵙지 못한 죄책감과 슬픔에 소리 내어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분 후에 다른 친척들이 병원에 도착하였다. 그래서 할머니께서 누워 계신 중환자실로 가서 간호사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5분 동안만 할머니를 지켜보기만 하라는 허락을 받아냈다. 안 그래도 나에게는 병원이라는 곳이 생소했는데 녹색 가운에다가 신발도 갈아 신고 병실로 들어가려니 더 생소하고 어색했다. 평소에 편안함 느낌을 주어 좋아하는 녹색도 이 가운 때문인지 색이 차갑게만 느껴졌다. 문을 열고 할머니 침대 옆으로 갔다. 힘들게 숨을 쉬고 계셨다.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내 자신이 숨을 쉬고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나와는 달리, 할머니는 들숨 날숨 하나하나 마다 힘을 들여 호흡하고 계셨다. 할머니가 작게만 느껴졌다. 하나의 작고 약한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할머니께서 인기척을 들으셨는지 눈을 뜨고 우리들을 쳐다보셨다. 할머니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힘드실 까봐 '하나왔어요'라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눈물 가득 찬 눈으로 흐릿하게 할머니의 얼굴을 보고만 있었다. 마냥 지켜보고만 있었다.
할머니를 지켜보고 있던 짧은 시간이 지나고 나가달라는 간호사의 말이 들렸다. 모두는 할머니께 눈으로 인사하고 나왔다. 처음에,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말한 의사는 할머니의 상태가 조금은 괜찮아 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폐에 물이 찼기 때문에 호흡이 곤란한 상태이긴 하지만 의식은 지극히 정상이라고 했다. 의사의 말과 함께 할머니의 얼굴을 보고 나니 감사하다는 기도와 푸석푸석한 얼굴에서 얇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할머니가 곧 일어날 것이라는 유쾌한 감정 또한 나를 휩싸고 돌았다.
할머니의 모습이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아 다행이라는 말을 친척들과 주고받은 후에 삼촌 외에는 모두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면회시간 외에는 할머니를 만날 수 없기 때문에 한 분만 그곳에 남아있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나도 다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내 마음은, 내 영혼은 분명히 할머니 곁에 있었다.
  며칠이 지난 지금 할머니는 일반병실에 계시다. 할머니를 찾아가 옆에 앉아서 내가 사랑하는 할머니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삶의 순간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소중함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다짐이 절로 굳어진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주의한 행동으로 인해 사고를 당한 후, 그 일을 치르고 나서야 돌아서면서 조심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소중한 사람을 소홀히 여기며 지내다가 그 사람이 떠난 뒤에야 그 소중함을 뼈 절이게 느낀다.
이번에 할머니에게 그런 일이 없었다면 난 후회해도 소용없을 때쯤 할머니의 소중함과 사랑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많이 후회했을 것이다.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내게 허락된 사람들의 소중함을 깨닫고 사는 것이 가장 진실한 인간다움이 아닐까, 할머니를 통해 내 자신에게 질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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