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의무, 왜 하필 광주였나?
기억의 의무, 왜 하필 광주였나?
  • 윤지예(사학09) 학우
  • 승인 2011.05.21 2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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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민주화운동’. 요즘 같은 봄날에 있었던 일이다. 흔히 계절의 여왕이라 불리는 1980년 5월의 광주 그곳에서 시민들은 총 165명이라는 형제를 잃고, 가족을 잃고, 사랑하는 이를 잃고, 자신의 생명을 잃었다.

  혹자는 이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살상을 가한 5월을 ‘한국전쟁 후 최대의 유혈극’으로 평가한다. 혹자는 ‘당시 계엄군의 야만성을 드러내는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계엄군의 잔악성이 이 시기 신군부에 저항해 시위가 일어났던 다른 도시와 비교할 때 광주에서만 유독 뚜렷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광주였을까?
 

광주 민주화운동은 왜 광주여야만 했나
  광주 민주화운동은 널리 알려진 대로 10.26 사태로 인해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리고 그 후에 신군부 독재 시나리오를 실행시키려 했던 전두환을 저지하기 위한 시위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시위들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는데, 이 당시 광주는 민주화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도시이면서 동시에 당시 야당 측에서 가장 많은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던 김대중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광주는 너무도 쉽게 이전 독재 정권들이 충실히 이용해왔던 극우 반공주의에 의해 ‘빨갱이’의 도시로 매도되고 말았다. 이를 위해 신군부와 전두환 정권은 광주 민주화운동이 ‘김대중의 배후조종’과 ‘계획적인 무장봉기’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일반 광주 시민들을 ‘폭도’라 칭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계엄군의 야만성을 촉발시켰으며, 계엄군에게 자신이 저지른 야만적인 행동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하는 데 일조했다.

  앞에서 언급했듯 극우 반공주의를 지향했던 독재 정권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정적을 빨갱이로 몰아 사형에 처하거나 학살을 자행했다. 이는 이승만이 청산하지 못한 친일세력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이면서, 이에 대한 저항이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 또한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하여 반복적으로 이용했던 방법을 고스란히 그 이후의 독재 정권들이 따라한 것이다.
  극우 반공주의에 의해 피해자가 된 사람들은 이러한 논리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빨갱이로 몰린 사람들은 이 당시에는 ‘죽어도 싼 사람’으로 간주되어 그 사람에게 가해지는 어떠한 피해도 정당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극우 반공주의가 낳은 희대의 야만성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광주 시민들은 속수무책으로 신군부와 전두환 정권, 그리고 그들의 명령을 수행하는 계엄군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온갖 잔혹한 폭력, 고문, 심지어는 살상까지 당해야 했다. 자국 시민을 상대로 파견한 공수부대는 당시 신군부가 시민들을 시민들로 보았다기보다는 사실상 적으로 간주하여 ‘학살’을 감행했던 것을 잘 나타내준다. 또한 5월 21일, 계엄사령관이 담화문 형태로 광주에 대한 최초의 공개적 언급을 한 자료를 살펴보면, 당시 계엄사령관은 시위를 촉발시킨 계엄군의 만행과 그에 따른 다수 시민들의 희생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은 채, 사건의 책임을 모두 불순분자와 깡패 등 불량배들의 난동행위로 규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극우 반공주의에 맞선, 반공주의 시민들
  이러한 흐름을 타고 광주시민들에게 직접적으로 폭력 등의 피해를 입혔던 계엄군들은 광주 시민들에게 빨갱이, 또는 이와 관련된 모욕적인 말들로 자신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당시 시민들의 증언을 살펴보면 평범한 광주시민들에게까지 ‘공산당 놈들’ ‘빨갱이 놈들’ 등의 표현을 쓴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런 식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 광주시민들에게 수사관들이 가장 많이 했던 질문으로 “너희들 빨갱이지”가 꼽힐 정도였다고 하니, 광주시민들은 이에 대항하여 어떻게든 이러한 색깔 공세에서 벗어나고자, “김일성은 오판 말라” 등의 반공주의 문구들을 통해 신군부의 극우 반공주의에 맞서려 했다.

  그 후로 31년이 지난 지금도 광주는 5월만 되면 한 집 걸러 한 집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광주는 이때의 기억에 아직도 눈뜨고 있는 것이다. 광주시민들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시퍼렇게 날이 서서 그 5월에 눈뜨고 있다. 다만 그들이 아닌 우리는, 실눈만 뜬 채 서 있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에게도 충분히 그 날의 비극이 재현될 수 있음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극우 반공주의는 오늘날에도 그 마수를 여전히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광주 민주화운동을 통해 배우고, 각성해야 할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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