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문예상 수필, 꽁트부분 응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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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11.23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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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6호선
 

<지하철 6호선>

 

 

평일 오후 2시의 태능역은 여유롭기에 충분하다. 나는 자리에 앉아 준비해 온 책을 읽기 시작했다. 조그만 글씨가 빽빽하게 쓰인 오래된 책이라 쉽사리 집중이 안 된다. 몇 줄 읽다 주위를 둘러본다. 어? 낯선 장면이다. 아니, 흔하지만 이곳에선 그렇다. 깨끗하고 지나치게 밝은 지하철 6호선, 곳곳의 빈 자리들 속에 단 한 사람 만이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도통 무표정한 사람들의 관심을 원하고 있다.

걸인이다. 겉보기에 중학생 아니면 고등학생쯤 되는 남자 아이다. 23년 살면서 수많은 걸인들을 보았지만 이런 어정쩡한 나이에 사지 멀쩡한 그야말로 컨셉없는 걸인은 처음이다. 나름대로 주의를 끌기 위해 지저분한 얼굴과 낡은 옷차림, 느릿느릿한 걸음을 유지한다. 그 아이는 왼쪽 끝 왼쪽 라인에서부터 의례껏 나눠주는 자신의 이러저러한 사정을 적은 종이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그렇게 반 바퀴를 돌아 내 곁으로 올 때쯤 나는 얼른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책을 읽든 어쩌든 그 아이는 상관없다는 듯이 책을 붙든 내 양 손 가운데 쪽지를 올려 놓고 눈빛도 살짝 보낸다.

 부모님은 어렸을 때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몇 해전 교통사고를 당하셨고 책임져야 할 동생들이 …”  

 

 이쯤 되면 떠오르는 일이 있다.

 한 달은 더 된 일이다. 난 운전을 하고 있었고 집을 향해 익숙한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아직은 초보 운전이라 약간 들뜬 마음으로 보조석의 엄마와 이거 저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좌회전을 받고 횡단보도 신호가 걸려 4차선의 꽤 넓은 도로에 잠시 정차 중 이었다. 그 때 오른쪽 시야로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 들어왔다. 나이에 맞지 않는 화려한 만화 캐릭터 티와 각이 진 까만 선글래스 그리고 3단으로 접힐 것 같은 지팡이였다. 시각장애인인가 보군.

 그 사람의 횡단보도 건너기를 잠깐 보다 별거 있나. 다시 엄마와 수다를 떨고 있는데 좀 이상했다. 눈 앞의 딱딱하고 반듯한 하얀 선들 위에 아저씨는 없었다. 그렇게 빨리 건널 리는 없는데.. 아저씨는 언제 그렇게 갔는지 방향을 잃은 듯 이미 차도로 나와 있었다. 내가 탄 차 오른쪽 가까이로 다가오다 주위의 차 소리와 뭔가 잘못 됐음을 깨달았는지 당황한 모습이다. 뭘 보는진 모르겠지만 고개도 두리번거려보고 지팡이를 여기 저기 툭툭 쳐본다. 이걸 어떡하나? 하며 바라보고 있는 순간 주행 신호로 바뀌고 나는 마치 언제 그런 고민을 했었냐는 듯 자연스레 엑셀을 밝고 내 길을 향한 것이다.

 

도로 위의 덩그러니 놓인 아저씨는 머릿속에 강렬히 남아 두고두고 나를 괴롭혔다. 이제는 이런 상황이 올 때는 어김없다.

 

그러고 보니 내 곁에서 쓰러져 버린 젊은 남자도 떠오른다. 2년 전 겨울이었다. 늦은 시간에 친구 집에 가기 위해 지하철 역에서 내리는데 검은 목도리의 창백한 얼굴을 가진 남자도 내렸다. 어째 옆에서 가는 걸음걸이가 이상하다. 그러더니 마치 춤에서의 린 동작을 말끔히 소화하는 듯이 그렇게 앞으로 쓰러진다. 하얀 얼굴은 지하 승강장의 번뜩이는 바닥보다 더 파랬고 이가 깨졌는지 턱이 깨졌는지 매끄러운 바닥을 타고 시뻘건 피가 흘러나온다. 섣불리 다가서는 사람은 없었지만 잠시 뒤에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 주변을 둘러쌌고 지하철 요원을 부르는 사람 등 약간 흥분된 분위기를 뛰었다. 가까이에 있던 나는 멀찍이 물러나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소소한 일에도 전화를 자주 했던 나는 뒤늦게 요원이 와서 119를 부를 때까지 핸드폰을 꺼낼 줄을 몰랐다. 다가가 괜찮으냐고 말할 줄은 더더욱 몰랐다. 이상한 구경했구나 했다.

 

 우연인지 얼마 안돼 집 앞에서 또 쓰러진 사람을 보게 됐다. 술에 취한 듯 얼굴이 붉고 벗겨진 머리와 옷가지에 피를 많이도 묻힌 할아버지다. 한적한 길거리엔 모여든 사람도 없다. 나는 역시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쳐다보기만 했다. 그 때 내 또래 되 보이는 여자아이가 지나가다가 할아버지를 발견하더니 놀래서 한 걸음 달려가 괜찮으시냐고 물으면서 빨리 신고하라고 소리를 쳤다. 그제서야 나는 만지자 거리던 핸드폰을 꺼내 신고를 했다. 119는 미처 생각나지 않고 112에 신고를 했는데 이미 접수 되었다고 경찰은 말했다. 조금 있다 보니 119구급차도 오고 경찰들도 많이 왔다. 주변에 가겟집이 많았는데 각각 신고를 했었나 보다.

 

그 아이가 돌아온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두 번째 걸음이다. 지갑을 찾아 천 원을 꺼냈다. 나는 이미 이런 식으로 내 자신을 위로하는 일에 익숙한지도 모르겠다.  

 어서 이 돈을 가져가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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