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의 두려움
시작의 두려움
  • 이주은 <그림에, 마음을 놓다> 저자
  • 승인 2011.05.21 2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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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귀스타프 카유보트, <오르막길>, 캔버스에 유채, 1881

  5월의 햇살에 잘 어울리는 그림으로 인상주의자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 1848-1894)의 <오르막길>을 골랐다. 이 그림은 그냥 평범하게 바라보면 두 사람이 약간의 거리를 두고 날씨 좋은 한적한 거리를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데이트 후에 남자가 여자의 집에 바래다주는 것 같기도 한데,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지만 서로 약간의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분위기가 풍기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 나른하고 고요한, 기분 좋은 산책길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마치 꿈속에서 만나는 장면처럼 친근하면서도 아득하고 아련한 누군가의 뒷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누굴까? 그 옆으로 걸어가는 빨간 파라솔의 여인은 또 누구지? 뒤따라가서 얼굴을 확인하고 싶지만, 아무리 오르막길을 숨이 차도록 따라가 보아도 둘의 걸음은 따라잡을 수 없이 또 저만큼 멀어져 있을 뿐이다. “이봐요”하고 불러도 그들은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낯설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하다는 기분이 들 때 나는 종교적 믿음과 상관없이 환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다. 전생의 미해결 과제가 현재의 모든 관계로 지속된다는 생각으로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면 참 흥미롭다.

  “만약에 죽은 뒤 환생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스물다섯 살이 되면 스물두 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할 것이다.” <몽실언니>의 작가 고 권정생 선생님의 유서에 들어있는 말이다. 인생에서 다시 한 번 살아볼 만한 가장 좋은 때가 스물다섯,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 머뭇머뭇 맴돌다가 용기를 내어 한걸음 다가가야 할 그 순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나이여도 무슨 소용인가. 새로 벌여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이 기다리고 있는데….

  뒷모습을 그린 그림에 끌리는 사람은 시작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우리의 삶에는 어쩌면 완전히 새로 시작하는 일이란 없을지도 모른다. 환생 이야기를 꺼낸 것은 모든 것은 지속,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지금 이 경험도 나만 외로이 겪는 것이 아니라 분명 누군가가 이미 걸어갔던 길일 뿐이다. 뒷모습의 사람들을 정신없이 뒤쫓다보면 어느새 이것도 다 지나가겠지. 따라가는 이가 두려워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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