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문예상 시부문 응모작
학술문예상 시부문 응모작
  • 승인 2003.11.23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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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외 2편
 

난 당신의 그림자입니다(2002. 10. 3, 목요일)

 

난 온통 검은색입니다.

굳이 나만의 색깔을 원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닮은 색깔이고 싶지만
굳이 나만의 색깔을 원하지 않습니다.

난 당신을 비추는 그 빛 반대편에 서있습니다.
당신이 환한 세상에 서 있을 때 나는 조그맣게 당신 뒤를 따릅니다.
당신이 점점 어두운 곳에 서 있을 때 나는 점점 크게 자라
당신을 따릅니다. 난 당신을 지키니까요.
그러다 모든 빛이 사라져 당신이 어둠속에 있다면
난 그 어둠이 되어 당신을 감쌉니다.
당신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며
그렇게 아침을 기다립니다.

당신은 나의 존재를 알지 못합니다.
항상 당신 곁에 있어 그리고 늘 당신 뒤에 있어
당신은 나를 볼 수 없습니다.
어쩌다 그대가 뒤를 돌아 나를 본다면
당신을 닮은 나의 검은 모습을 알아본다면
그 날은 하루종일 행복합니다.

난 행복합니다.
늘 당신 뒤에서 당신을 따를 수 있으니까요.

당신이 기뻐하면 나도 기뻐하고
당신이 슬퍼하면 나도 슬퍼하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나 역시 사랑합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당신의 아이와 행복하면
나역시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당신의 아이와 행복합니다.

난 당신이고 싶지만 당신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오직 당신을 지키는 존재입니다.

시간이 흘러 당신이 더 이상 이 아름다운 세상을
보지도 듣지도 못할 때
그때야 비로소 나도 내 생명을 다합니다.
당신의 슬픔과 눈물, 기쁨과 사랑,
당신의 모든 기억을 고이 간직한 채
당신을 끌어안고 당신 옆에 잠듭니다.

힘들지도, 아프지도, 슬퍼하지도 않을 겁니다.
난 너무 행복하니까요.
늘 당신을 지켰으니까요.
당신 곁에서 언제나 당신을 바라보며
그렇게 걸어왔으니까요.
너무나도 아름다운 당신의 그림자였으니까요.

난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영원한 그림자입니다.

 

 

난 휴지통을 비우지 않을 것이다(2002. 9. 19, 목요일)

 

사랑도 “삭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랑한 사람의 이름을 클릭하고 “삭제”를 누르면
<“사랑하는 사람”항목을 휴지통에 버리시겠습니까?> 라는 창이 열린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한다. 오랜 시간동안 엔터키만을 물끄럼히 바라본다.
지난 시간 함께 했던, 내게 추억이라 여겨지는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린다.
김광진의“편지”라도 곁에서 흐르면 흐느낌없는 눈물을 밤새도록 흘릴지도 모른다.

긴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올 무렵
아픈 가슴으로, 뻥 뚫린 것 같은 마음으로,
떨리는 검지손가락으로 엔터키를 누른다.

이미 그녀의 아이콘은 바탕화면에 없다.
이제 끝난 것이다.
이미 난 그녀에게서 삭제된 지 오래이다. 아니 저장된 적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바보같이 난 이제야 그녀를 지웠다.
이제야 그녀가 자유롭다.
내게서, 내 욕심에서 그녀가 자유롭다.

그런데,
그런데, 왜 휴지통을 비우지 못하는 걸까?
왜, 키를 누르지 못하는 걸일까?

언젠가, 시간이 흘러 그녀가 다시 돌아와,
내게 돌아와 다시 사랑을 하게 되면
기쁜 마음으로 “복원”을 누르기
위함은 아닐까?

쓸데없는 기대로,
부질없는 기대로,
어리석은 기대로
오늘도 난 휴지통을 비우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만나도, 다시 너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어도
난 휴지통을 비우지 않을 것이다.

 

내 찬란한 주검만이 있을 뿐(2002. 10. 14, 월요일)

 

죽도록 비를 맞으면 그대가 나올까요

지금도 이 거리를 미친 듯이 걷고 있는데

그래도 그대는 없네요

늘 나 혼자만 이래야 되나요

그대에게 나 역시 아무 의미도 없는데

난 왜

이렇게 이 비속에서 당신의 창문이 열리기를 기다려야 하는지…

사랑은 어떻게 하는 건지… 도대체 도대체 어떻게 하면 되는지…

,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지…

그대는 어디 있는 건지 나도 힘이 들어 가는데…

그대 그대여 왜 왜 왜

바보같이 언제나 난 이런 사랑만 하죠 아무도 얻을 수 없는 그런 사랑… 내가 힘들어 죽어버리는 그런 사랑…

나 혼자 제가 되어 버리는 그런 사랑만 하다 시간이 가요…

내가 죽어가요… 그대 앞에서

그대가 알아준다면 쓰러져가는 내게 손을 내밀어 나를 일으켜 준다면

나 붉은 피 토하며 그댈 마지막으로 볼텐데… 시간이 없죠…

얼마나 흐르면 그대가 날 잡아줄까요…

1000년, 아니면 2000년 흐르면 그대 나를 알아줄까요…

영겁의 시간의 뛰어넘어 나 그대를 알아보고 그대를 찾으면

그대 나를 안아줄까요… 아니면 그렇게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건가요…

하늘을 봅니다. 그리고… 그리고 발길을 돌립니다.

다 젖은 몸으로, 다 젖은 이 가슴으로 그대 앞에서 돌아섭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할 겁니다. 다시 돌아가는 길 그대의 모습을 밟으며 갑니다.

그 길 끝에는 내 찬란한 주검만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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