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문예상 소설부문 응모작
학술문예상 소설부문 응모작
  • 승인 2003.11.23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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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림의 시간. 길고도 짧게 시간은 흘러간다. 거울을 들여다 본다. 질듯 말듯한 쌍꺼풀, 적절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딱히 거슬리지 않게 생긴 뭉둑한 코, 도톰하고 단정해 보이는 입술. 머리에는 핑크빛 수건이 씌어져있다.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부엌으로 가서 작고 세밀한 손으로 오이를 얇게 썰며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린다. 이틀... 캄캄한 밤. 형광등을 등지고 서있는 그녀의 모습이 부엌 창으로 희미하게 비춰진다.

 

그녀는 어김없이 새벽 6시에 일어나 무덤덤한 몸짓으로 세수하고 화장을 한다. 쌀쌀한 날씨 덕택에 옷깃을 여미며 왠지 모를 서글픔에 코를 한번 훌쩍인다. 출근길의 무표정한 사람들 속에 무표정한 그녀가 섞여 걸어가고, 지하철의 검은 창으로 무표정한 그녀와 사람들이 보인다. 자신의 검은 얼굴을 보며 더욱 더 밀려오는 서글픔에 옷깃을 한번 더 여민다. 

 

거리에 수북히 쌓여있는 노란 은행잎을 본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비추는가 싶더니 다시금 어두운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을 덮어버린다. 그녀는 멈춰 서서 바닥의 은행잎을 한참 쳐다보며 살며시 허리를 굽힌다. 부채꼴 모양의 균형이 적절히 잡힌 작고 여린 노란 은행잎 하나를 주워 항상 들고 다니는 소설책 p111 사이에 끼우고는 빠른 걸음으로 총총 걸어나간다.

 

 

 붉은 립스틱, 두꺼운 남색 눈썹, 화려한 노란빛의 스카프를 두른 중년 여인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를 보며 한심스러운 눈길을 보내고서는 꼬은 다리를 풀고 일어나 커피를 탄다. 그녀는 주춤하며 소설책을 뒤로 감추고는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걸레를 빨아 유리창을 닦고 작은 공예품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낸다. 햇살에 비추는 아지랑이 같은 작은 먼지들과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문을 나서는 여사장의 하늘하늘한 노란 스카프를 보며 그녀는 잠시 정신이 몽롱해진다.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

 

어느 누군가를 기다리는지도 모른 채 진열대 앞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아 소설책을 펴놓고 있다. 책장은 넘어 가지 않고 눈은 한곳에 멈춰져 있다. 문득 정신이 들어 p111을 펴본다. 작은 노란 은행잎을 꺼내 표면의 가는 선들을 조심스레 만져본다. 너와의 추억이 서려 있는 것 같아… 그녀는 가는 선을 따라 조심스럽게 은행잎을 뜯어내다가 반쯤 동강난 은행잎만을 소설책에 끼우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잠잠했던 유리문의 종이 딸랑딸랑 울린다. 회색 양복에 반듯하게 넥타이를 맨 말끔한 차림의 남자가 들어온다. 눈인사를 한번 하곤 진열대의 공예품들을 본다. 남자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작은 발레인형 셋트를 고른다. 그녀는 동그란 눈망울, 작은 코와 입술, 짧은 발레복을 입은 경쾌한 몸놀림의 인형들을 포장하며 현기증이 인다. 작은 인형들은 그녀의 주의를 맴돌며 경쾌하게 춤을 춘다. 인형의 동그란 눈망울과 잘록한 허리, 가는 다리가 그녀의 눈앞에서 빙글빙글 돈다. 남자의 넥타이에 목이 졸려 숨이 막힐 것만 같은 느낌이 들며 그녀는 서서히 정신을 잃어간다.

 

 

남색 눈썹과 붉은 립스틱이 희미하게 비춰진다. 그녀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혀있는 땀을 닦아주는 여사장의 눈빛이 평소와는 다르게 걱정스러움이 배어있다. 여사장의 깊게 패인 눈가의 주름에 안락함을 느끼는 그녀. 다시 편안한 잠 속으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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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 시계를 본다. 7시… 그녀는 벌떡 일어나 부랴부랴 준비를 하다가 창문 너머 서려있는 붉은 노을을 보고 잠시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저녁이구나… 여사장의 눈가의 주름을 떠올리며 정신을 잃었던 것을 기억해낸다. 다시 자리에 반듯이 눕는다. 하루 사이에 얼굴은 수척해져 있다. 그와의 추억들을 하나 둘씩 꺼내본다.

 

은행잎이 수북히 쌓여 있는 초등학교 교실을 떠올리는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려있다. ‘손님 모시기라는 놀이 아니? 둥그렇게 둘러앉아 자기 옆에 누군가를 앉히는거야. 대신 여자 옆에는 남자가 앉아야 하고 남자 옆에는 여자가 앉아야해. 우리 한번 해보자!’ 가지런하게 드러나는 하얀 이. 오똑한 코. 서글서글한 눈매. 빨려 들어갈 듯한 눈빛. 그 눈빛. 그 눈동자… 손목을 잡아 끄는 그의 손길에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한번 쓰다듬으며 서서히 눈을 감는다. 노란 은행잎들이 그녀의 머리맡에 산산히 뿌려진다.

 

10여년이 흐르고… 그와 처음 만난 날. 그녀는 그의 말을 떠올린다.

‘매년 11월 1일은 너와 만나고 싶어. 우리가 헤어지는 일이 있어도… 약속해줄래?’ 

“왜 하필이면 11월 1일이야?”

“이쁘잖아… 난 1이라는 숫자가 좋아“

라고 말하며 1을 세번 외며 오물거리는 그의 입술. 순박하고 서글한 눈매. 가지런한 이를 기억한다.

 

수척했던 그녀의 얼굴이 홍조를 띈다. 샤워를 하고 핑크빛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거울을 들여다본다. 한참을 들여다보며 피부를 만져보고 부엌으로 달려가 오이를 얇게 썰어 얼굴에 붙이고는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려있는 옷가지들을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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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랄빛 스커트에 도톰한 스웨터를 입은 그녀의 모습이 화사하고 생기 있어보인다. 기차에 몸을 맡기고 소설책을 꼭 끌어 안은 채 창 밖을 바라본다. 멀리 보이는 산은 붉은 단풍으로 물들어있다. 설레임과 불안함이 서려있는 눈빛. 그녀의 뺨도 붉게 물들어간다. 떨리는 손으로 반이 동강 잘려있는 은행잎을 만지작 거린다.

 

쌀쌀한 날씨에 피부는 더 거칠어지고 코끝이 시리다. 황망한 바다를 바라보며 한참을 앉아있는 그녀의 뒷모습이 작고 여린 새같다.

 

한줌의 가루가 되어 바다위에 흩어져버린 그를 떠올린다.

보고싶다

 

지는 해의 강렬한 눈빛에 그녀의 몸이 빨려 들어가 버릴 것 같다.

 

그 눈빛.

 

불안함이 어려있던 그녀의 얼굴에 편안함과 행복함이 언뜻 스쳐 지나간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서 평온한 미소를 띈 채 지는 해를 향해 걸어 본다.

 

반조각의 노란 은행잎만이 붉은 바다 위에 덩그라니 떠 있다

 

 

이 세상을 떠나버린 연인과의 사랑을 주제로, 한 여인의 행동과 마음을 바라보는 관찰자 시점이다. 죽은 연인을 만나러 가면서도 오이 마사지를 하고 옷을 고르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리며 스스로도 마음이 뭉클했다.

은행잎과 11월 1일, 그 눈빛, 초등학교 동창 이라는 단어는 지금 현실의 나에게도 가장 소중한 단어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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