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문예상 소설부문 응모작
학술문예상 소설부문 응모작
  • 승인 2003.11.23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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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는 외로움

 기억하는 외로움.

몇 일간 비가 왔었다. 나는 집안에서 그저 오는 비를 바라볼 뿐이었다. 겨우 비가 그치고 집을 나왔을 때, 바람은 상쾌하기보다 싸늘했다. 일없이 학교를 교정을 걸었다. 오늘 날씨가 나는 너무 좋아 어디로도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내내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던가... 가끔은 나조차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알 길이 없었다. 다시 혼자가 된 후로 점점 더 무심했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들어와서도 창가에 않은 나는 점심보다도 학교를 거니는 친구들의 얼굴에 더욱 마음이 쓰였다. 한 번 보면 그 뿐, 기억되지 않는 얼굴들, 얼굴들... 그런 얼굴들을 기억하기 위해 요 몇 일째 애를 쓰고 있었다. 국이 다 식어갈 때쯤 수저를 들었을 때, 현을 찾는 전화를 받았다.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가면서 산에서의 현의 얼굴을 생각했다. 우리는 헤어진 지 6개월이 못되어 다시 현을 만나러가고 있었다. 병원 영안실 앞에서 형사라는 사람의 짧은 설명을 대충 듣고는 우리는 다시 만났다. 나는 한참을 현의 얼굴만 보고 또 보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고, 많이 피곤해 잠든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얼굴색도 변해버린 현 앞에서 내가 알던 현을 기억하기란 쉽지 않았다. 살짝만 미소 지어도 보이던 보조개나 사람의 눈을 뚫어져라 보면서 얘기하던 현의 습관 따위를 기억하는 일이라면 좀 더 쉬웠을 텐데...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내가 현을 못 알아보는 듯 불안해하며 재촉해 물었다. 이제는 짜증이 묻어나는 음성에 겨우 고개를 끄덕여 현임을 확인시켜주고는 바로 돌아 나왔다. 현의 얼굴말고는 달리 아는 것이 없어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한 것도 없었다.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도 나는 알지 못했다. 그 날 그곳에서 나는 현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현의 부모님을 보았다.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중년의 아저씨, 아주머니.
벌써부터 눈이 붉게 물든 현의 부모님이 현을 보러 들어간 사이, 나는 인사도 없이 병원을 나왔다. 병원 앞에 한참을 서서 뼈 속까지 시린 바람을 한참을 맞으면서, 그 사이 현의 따뜻한 손도 기억했다. 그리고...
 '그래, 결국은 이렇게 될 것이었구나.
  너는 다시 내게 잊지 못할 얼굴하나를 더하려고 그런 것이었구나...'
이제 내가 기억하는 현은 예쁜 보조개나 습관 따위가 아니라 지금 한번 본 낯설은 얼굴일 것이다. 한참을 돌아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밤이 늦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불도 켜지 못하고 옷도 벗지 못하고 모로 누워 방금 본 현의 얼굴과 아버지, 할머니의 얼굴까지 나는 보고 또 보았다. 슬라이드 필름이 돌아가는 것처럼 기억 구석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일어난 얼굴들을 마주 봐야만 했다.

할머니와 다른 친척들이 모두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는 현의 부모님처럼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눈을 붉게 물들이고 병원으로 달려간 그 날, 그 날의 아버지를 초등학교 4학년인 딸은 알아보지 못했다. 얼굴이 퉁퉁 부어 붕대를 감고 누워있던 낯선 아버지. 트럭을 운전하시던 아버지가 고속도로에서 돌아가시면서 나는 부모형제 없는 고아가 되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4학년이던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다시 낯선 할머니의 죽음 앞에 서야만 했다. 하루종일 학교에서 지내다가 늦게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지 않고도 알 수가 있었다. 내가 무슨 죽음을 읽어내는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할머니의 손때 묻은 집안의 물건들이 그리고 집안 구석구석이 그렇게 할머니가 더 이상은 이곳에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방안에서 홀로 돌아가신 할머니 얼굴을 나는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할머니의 눈에서 벗어났을 때, 나는 할머니의 손을 잡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그저 밤이 새도록 어두운 방안에서 할머니의 얼굴만을 보고 또 보았다. 얼굴에 깊은 주름들, 검버섯이 핀 손과 얼굴, 듬성듬성 남은 머리칼과 그 미묘한 냄새들, 그리고 할머니의 낯선 얼굴과 표정... 그 밤을 나는 그렇게 내 속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담고서는 아침 일찍 집을 나왔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어느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더 이상 나를 봐주는 무엇도 있지 않다라는 사실, 아버지의 깊은 눈과 할머니의 눈빛도 없는 그 깜깜한 아파트 안에 갇혀 매일매일 뜬눈으로 밖에서 나는 소리에 귀기울이며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시간은 흘러갔다.
내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큰 숨을 쉬고 집안의 불을 환하게 킨 날, 이사와서 한번도 하지 않은 대청소를 했다. 집안의 문도 활짝 열고 아직까지 나에게 남아있던 할머니의 짐들과 아버지의 사진 한 장까지 나는 미련 없이 버리고는 거의 빈집이나 다름없는 집의 구석구석까지 닦고 또 닦았다. 꼭 내가 가진 다른 것들도, 기억들도 깨끗이 닦아 지워버리려는 듯이 닦고 또 닦았다. 그렇게 혼자만의 집에서 나는 문득문득 나를 바라보던 익숙한 시선을 느끼기도 했었다. 가구도 살림도 아무리 사다가 채워도 집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고 혼자 있는 집이 한없이 넓기만 할 때, 현을 만났다. 어느 것도 채우지 못한 집을 그리고 나를 현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일년을 같이 살았고 그리고 6개월이 채 못되어 다시 만났다.

현은 집안에 갇힌 나를 세상 속에 섞어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현을 의지해 집을 나왔었다. 산을 좋아하던 현을 따리 우리가 처음으로 같이 산을 오른 그 날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만 같다. 산으로 향하던 길은 익숙한 길이었음에도, 버스를 타고 산의 입구까지 가는 동안 나는 설레임에 긴장했다. 버스 안에는 누구의 짐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내내 쉰김치 냄새가 났다. 아무리 맡아도 내 코에 적응되지 않던 냄새와 두런두런 사람들의 말소리와, 창 밖만 바라보던 현의 얼굴까지 모든 것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산의 입구에서는 커다란 빨간색 고무 다라 안에 갖가지 떡들을 팔았다. 부채도 열쇠고리도 없는 것이 없었다. 동동주, 도토리묵, 파전, 나는 처음으로 왕성한 식욕을 느꼈다. 그 순간 아마 나는 산에서 파는 것이라면 돌도 씹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산 입구에 자리한 절에서는 쉬지 않고 염불을 하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사람들의 말소리와 가게들, 집들을 걸어 처음의 사람 냄새는 갈수록 희미해지고 우리는 언제인지도 모르는 순간에 산 냄새에 둘러싸여 있었다. 산은 더욱 맑고 시원한 것들만 품고 있었다. 산 옆을 흐르던 개울에서는 짭짜름한 미역 냄새 같기도 하고 풀 냄새 같기도 한 알 수 없는 냄새들이 났다. 사실 걷는 시간보다도 쉬는 시간이 더 많다고 할 정도로 우리는 천천히 걸었고 많이 쉬었다. 어쩌다 자리를 잡고 앉으면 20분이고 30분이고 마냥 쉬는 나를 현은 한번도 재촉하지 않았다. 나무 사이로 쏟아지던 햇빛은 또 얼마나 따사롭던지 나는 햇빛을 찾아 몸을 움직였다. 산에 포함된 사람은 결코 나쁜 이가 없다고 말하면서 현은 웃었다. 그리고 나도 웃었다. 분명히 웃었었다. 내가 너무 느려질 때는 가만히 서서 주변을 둘러 보았고 길이 조금이 라도 험하면 내 손을 잡았다. 그때 현의 손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나는 분명하게 기억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곱절의 시간이 걸려 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 느꼈던 감정은 산에 대한 정복감이 아니었다. 그저 산이 우리를 산의 일부로, 잠시나마 아주 작은 일부로 받아 준 것에 대한 소속감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누군가에게, 무언가에 소속되어 편안하고 행복했던 어린아이였다. 산아래 모습은 또 얼마나 푹신하고 보드라웠던지... 이대로 몸을 날려도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한없이 가벼웠던 우리는 가볍게 날아 생전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을 날라 다녔다.
             
산 속을 흐르는 차가운 약수을 마시고, 시원한 산 냄새를 몸 속 깊은 곳까지 마시고 나니, 칼같이 맑고 차가운 바람이 내 몸을, 내장기관들과 뼈를 통과해 나를 뚫고 지나가는 듯 느껴졌다. 마치 내가 투명해진 듯 내 모든 것이 바람 앞에 다 드러난 듯, 숨기고 싶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까지 다 드러난 듯 부끄러웠다. 우리는 차가운 개울에 발을 담갔다.
 "나는 거짓말을 좋아해. 가끔은 내가 하는 거짓말이 꼭 진짜처럼 느껴져서 어떤 게 사실인지 거짓인지 잘 구분하지 못해. 바보 같지?...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숨기고 싶은 것들이나 가지고 싶은 물건이나 상황에 대해 거짓말을 하거든. 그럼 적어도 거짓말을 하는 동안만은 행복하지 않을까?...
 너도 큰 숨으로 가끔씩 거짓말도 하고 그래."
현은 희미하게 웃으면서 밑도 끝도 없이 거짓말에 대해 얘기했다. 나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산은 현에게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현에게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 가셨대. 할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엄마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나는 잘 모르겠어.
 어렸을 때부터 아빠랑 둘이 살았거든 트럭을 운전하던 아빠가 장거리 운전을 하러 가는 날이면 할머니가 집으로 오시거나 내를 할머니 댁에 데려다 주시곤 했어.   
 아빠랑 둘이 살았어도 아빠한테 특별한 사랑을 받고 산 것 같지는 않아. 생일 선물한번 받아본 기억이 없거든. 그런 아빠는 일하러 나갈 때마다 나를 한참씩 뚫어져라 쳐다보고 가시곤 했거든. 그 눈, 조금은 피곤하고, 조금은 슬픈 것 같았던 그 눈. 우리 부녀는 그게 전부야. 그 날은 할머니 댁에 친척들이 다 모였어. 할아버지 제삿날이었거든.
 그런 날 아빠는 나만 할머니 댁에 맡기고는 일을 가는 거야.
 나 그 날은 나를 보던 아빠 손을 붙잡았거든. 아무리 친척들이라고 해도 부모 없이 그 자리에 다른 사촌들과 함께 있는 다는 사실이 어린 마음에도 너무 싫었나봐.
 근데 안 하던 짓을 하던 딸이 당황스러우셨나봐, 평소보다 한참을 내 얼굴만 쳐다보더니 돌아나가시더라. 그 날 일찍 누웠어. 잠도 오지 않았는데, 누워서 자는 척했지...
 할머니가 잠깐 들어오시더니 주름이 가득한 투박한 손으로 내 얼굴을 조심조심 쓰다듬더니 깊은 한숨을 쉬시고는 나가시더라. 할머니는 알고 계셨나봐, 어린 손녀딸이 그렇게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그렇게 깜깜한 방에서 눈만 말똥말똥 뜨고 밖에서 나는 얘기를 듣다가 깜박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울면서 나를 흔들어 깨우시더라. 너는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그때 다 알았어. 다시는 아빠가 나를 보지 못하겠구나... 그리고... 나도 다시는 아버지의 그 눈을 보지 못하겠구나... 병원에서 아빠라는 사람을 다시 만났는데 얼굴은 퉁퉁 붓고 온몸에 붕대를 감은 아빠가 나한테 손을 뻗는 거야. 할머니가 내 등을 떠밀었는데 난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어. 나만 두고 간 벌이라도 주는 것처럼...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아빠의 그 눈이랑, 힘없이 떨어진 피 묻은 그 손이 잊혀지지가 않아..."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도 흐르지 않던 눈물이 10년이 지나서야 내 눈에서 흘러 넘쳤다. 그런 나를 보는 현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아니 살짝 웃었던가...
그 날 현은 내 발을 닦아주며 자신은 부모님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했다.
난 큰짐을 내려놓은 듯 가벼웠다. 결국은 그 짐을 현에게 나누어 준 것이었지만, 그 후로 내가 꿈속을 헤맬 때면 어김없이 현이 다가와 손을 잡았다. 나는 잠결에도 현의 손길을 느꼈고 편히 잠들었다. 나에게는 현만이 내가 속한 유일한 산이었고 가족이었다.

그 후로도 내내  우리의 시간은 조용히 지나갔다. 오랜만에 나는 어린 나를 바라보던 익숙한 시선을 느끼고는 새벽에 잠에서 깨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현이 나를 보고 있었다. 요즘 들어 집에 자주 들어오지 않던 현이었다. 어제 밤에도 현을 기다리다 잠들었는데 어느 센가 내 옆에 있는 현을 보면서 나는 문득 내가 다시는 현을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언제 들어왔어?..."
 "시간이 이렇게 지난 지 몰랐어...
 사실은 요즘은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은 내일 같고...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잘 모르겠어... 내가 너무 늦었지?... 미안...
 영은아... 우리 오랜만에 같이 등산이나 갈까?..."
현은 내 옆에 돌아누워 무심하게 말했다. 등산을 가자던 현은 피곤한지 금방 잠이 들었다.
나는 잠든 현의 얼굴을 보고 또 보았다. 몇 일 보지 못한 사이에 얼굴이 조금 변한 것만 같았다. '어디 있다가 지금 오니?...'
그렇게 현의 얼굴만 보면서 나는 가슴 한 구석이 시려서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당장 현이 일어나, 나를 바라 봐주었으면 아니 누구라도 아버지라도 할머니라도...
이제는 나를 보던 아버지의 그 깊은 눈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나는 현의 옆에 누워서도 참을 수 없을 만큼 외로웠고 그리웠다.

한참만에 현이 일어났을 때, 나는 수건과 물만을 대충 챙겨서 현을 끌고 집을 나왔다. 어떻게 우리가 산까지 왔는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만 분명히 내 옆에 있음에도 다른 곳에 있는 듯이 느껴지던 현만이 나를 사로잡았다. 우리는 쉬는 것도 잊어버린 듯 걷고 또 걸었다. 어디로 걷고 있는지, 어디를 걷고 있는 지도 몰랐다. 그저 앞만 보고 걷고 또 걸었다. 숨이 턱밑까지 찼을 때,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이번에는 일어날줄을 몰랐다.
나는 아마 내내 현만 붙잡고 있었는데 현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여전히 앞만 보며 현이 입을 열었다.
 "누구에게라도 말해야 하는데 누구에게 말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니가 들어줄 수 있니?... "
우리는 산에 와서 처음으로 마주 볼 수가 있었다. 현의 조금은 깊은 그리움도 사랑도 나는 한 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언젠가 내가 아주 가까이서 보았던 그 눈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 다시 않았고 현은 그런 나의 침묵을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사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 와서 내가 붙잡아도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영은아, 기억한다는 게 뭔 줄아니?...
  나한테 기억한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인 것 같아... 사랑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기억되니까 저절로 사랑하는 거야. 원하고 원하지 않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을 기억하고 저절로 사랑하는 거야.     
 한눈에 알아보고는 영원히 잊지 못하는 기억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게 사랑인 거 아닐까...
 내가 그 사람을 한눈에 기억한 것처럼... 영원히 잊지 못하는 것처럼..."

현이 지금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이대로 헤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자꾸만 나를 아무것도 모르는, 아무것도 못하는 어린아이로 만드는 낯선 감정을 말하지 말아 줘...'
우리는 한참을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다른 곳에 있었다. 난 벌써 현이 나를 뿌리치고 떠났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현의 기억과 사랑을 나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의 서운함의 정체도, 내 옆에서 그를 기억하는 현에게 느끼는 이 분노도, 단지 같이 지낸 시간의 '정'이라고 하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이대로 현을 보내고 싶지 않다라는 것과 그리고 내가 현을 붙잡을 수 없다라는 것만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나는 해가 진 후에야 집으로 돌아왔고, 우리는 그 산 속에서 헤어졌다. 혼란스러웠다. 좀 전까지 누가 있었던 것도 같은데, 그게 누군지, 지금은 어디 있는지, 아니 있기는 있었는지조차... 나는 혼란스러웠다.
나는 집으로 돌아온 후, 어두운 방안에서 누군 지도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일을 나간 아버지인지... 나를 돌봐주러 오시는 할머니인지... 아니면 또 다른 나인지...

병원에서 현의 얼굴을 본 후 나는 며칠을 잠만 잤다. 또다시 자다 깨다 어두운 방안에서 가만가만 밖에서 나는 소리에 귀기울였다. 무서웠다. 새삼스레 자꾸만 버려지는 듯해서 어딘가에 숨고서는 다시는 나오고 싶지가 않았다. 아무에게나 매달리고 싶었다.
학교도 가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고, 먹지도 않았다. 그저 잠들었다 깨면 다시 내 기억에 부스스 먼지를 털고 일어나는 아버지도 할머니도 그리고 현까지 만났다가 다시 그들의 익숙한 시선을 느끼면서 다시 잠들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고문이었다. 나는 숨막히게 외로웠고 그리웠다.
 '이런 기억이 어떻게 사랑일 수가 있니?...
 나에게 기억한다는 것은 외롭고, 힘든, 고통일 뿐이야...'

내가 다시 잠에서 깨어났을 때 순간 나는 집이 너무 좁아 숨이 꽉 막히는 듯 느꼈다.
집안에 내가 꼭 끼어 옴쭉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현이 버리고 간 짐들과 사놓고는 한번도 쓰지 않은 살림들, 보지 않는 책들과 죽어버린 화분들, 먼지 싸인 짐들과 작은 가구들까지 한때 내가 나에게 너무 넓은 집을 채우기 위해 무턱대고 사들였던 물건들을 전부 집밖으로 날랐다. 하루종일 멀쩡한 짐들을 들어내는 나를 사람들은 쑥덕거렸다. 한바탕 버리고 나서야 나는 집안에서 깊은숨을 쉴 수가 있었다. 애시당초 버려지기 위해 사들였던 물건인 것처럼 나는 한 점의 아쉬움도 서운함도 없었다. 정적 내가 버리고 싶은 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살림들이 버려진 자리를 닦고 또 닦고, 한밤중이 되어 청소를 마친 후 나는 쓰러진 듯 잠이 들었다. 내가 다시 일어나 학교를 거닐던 그때, 나는 현의 부모님을 만났다.

현의 부모님을 만난 자리는 나에게 불편하고 낯선 것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현과 현의 부모님과도 아무 상관없는 타인일 뿐이었다. 비록 내가 한때, 현의 손을 무슨 인생의 밧줄이라도 되는 듯이 붙잡았더라도 말이다. 한참을 서로 마주보지도 못하고 앉아있었다.  '좋은 친구와 함께 지내 너무 행복하다고...' 현이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었다고 현의 부모님은 고맙다고 했다. 나는 뭐가 고마운지도 모르면서 현의 부모님의 인사를 받았다.
현은 그 사람을 만나면서 집에 연락도 하지 않았다. 같이 지낸 지 6개월이 되었을 때, 더 이상 그 사람은 현을 보러 오지 않았다. 아무도 오지 않는 집에서 현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우리는 서로 다른 곳에서 같은 사람을 기다렸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현이 나를 기다렸을까... 13층 아파트에서 너무도 가벼운 현은 솜털처럼 이리저리 날라 다니다가 어딘가에 사뿐히 내려앉았을 것이다. 그렇게 곤두박질쳐서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는 현이었다.
현의 부모님이 일어난 후에도 나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일어나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영은아, 나는 우리 부모님 얼굴은 아무리 기억하려고 해봐도 기억나지가 않아.
  하긴 가끔씩은 내 얼굴도 기억나지 않으니 기억되지 않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나에게 무리겠다. 근데 가끔씩은 보지 않는 것이 기억나기도 하거든... 너의 아버지의 눈 같은 것...
  사람은 자기가 기억하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거든. 내가 그를 알아본 것처럼 그리고 너를 알아본 것처럼... 원하고, 노력하는 것과는 다른 거야...
우리는 같은 기억을 가졌으니, 죽어도 잊지는 못하겠다.
 
  -영은아, 그 사람이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 내가 어떻게 그 사람에게 나를 기억시킬 수가 있을까...금방이라도 떠나 버릴까봐... 어느 날 문득 '누구세요?'라고 물을까봐 겁이나... 오늘도 오지 않으려나 봐. 난 어디로 그 사람을 찾으러 가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요즘은 하루종일 그 사람만 기다리면서 보내. 점점 바보가 되가는 느낌이야...
근데 한가지 확실한 건 내가 그를 너무 생생하게 기억한다는 거야. 시도 때도 없이 기억나서는 나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바보로 만들어. 그나마 내가 숨쉬는 것은 문득문득 그 사람 대신 너를 기억하기 때문 일거야... 니가 보고싶어.
너는 나를 어떻게 기억해줄래?... 아니 기억하지 말아...

나는 현의 무엇도 기억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바보... 붙잡아도 소용없다는 것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는 것을 왜 몰랐니?...
  영원히 잊지 못하는 기억이란 영원이 지난 다음에야 알 수 있는 거야...'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올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나를 돌아 나가던 그 날도 비가 왔었다. 내가 아버지의 손을 잡았던 그 날, 나는 비로소 먼저 손을 놓아버린 사람이 나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먼저 아버지 손을 놓아버렸다는 사실을...
빗길에 운전을 나간 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 되돌아 왔다. 여전히 어린 딸은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아버지의 깊은 두 눈만을 기억할 뿐...
나는 내내 비 오는 모습에서 잠시도 눈을 돌리지 못했다. 내가 봐주지 않으면 언제 내렸는 듯이 그칠까 봐.. 오직 나만이 비 오는 모습도, 현의 사랑도 지켜줄 수 있는 것처럼, 나 아니면 비도 현의 사랑도 끝날 것처럼...
아마도 나는 한번도 본적은 없지만 우연히 그 사람을 만난다면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현이 그 사람을 한눈에 알아본 것처럼...
나는 다시 나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예전처럼 다시 조심조심 집밖으로 나왔고, 가만가만 사람들 말소리에 귀기울이면서...

학교로 가는 버스에 올라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다가 우리가 처음 산으로 가기 위해 탔던 버스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내렸다. 산으로 가면서 나는 현의 옆얼굴을 다시 보고있었다. 그리고 그 뿐, 나는 현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만 한번 본 현의 낯선 얼굴만은 죽도록 잊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산의 입구에서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왠지 엄두가 나지 않아 선 듯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겨우 발을 옮겼는데, 구두를 신어서 일까, 얼마 걷지도 않아 내 다리는 끊어질 듯 아팠다. 등산하는 사람들은 내 차림새를 보고 수근거렸다.
나는 산을 오르는 내내 한번도 쉬지 못했다. 한번 쉬기 위해 주저앉으면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현이 없는 나를 산은 받아주지 않았고, 나 또한 더 이상 산 안에서 편안함이나 소속감 따위의 감정은 느낄 수 없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산에 올라 보니 산은 더 이상 부드럽거나 포근해 보이지 안았다. 다만 무서웠다. 당장 이라도 떨어져 죽을 것처럼, 누가 나를 자꾸만 산 아래로 미는 듯이... 나는 너무 무서워 바로 서 있기도 힘이 들었다. 덥고, 다리 아프고, 무서운, 이런 산행은 나에게 고통일 뿐이었다. 내가 아버지와 현을 기억해야 하는 것처럼...
나는 곧바로 돌아 산을 내려오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나에게 또 다시 잊지 못할 얼굴을 더한 현을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리라, 다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으리라, 다시는 현 없이 산을 오르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흘러내리기 무섭게 낯선 눈물을 닦아내며 걷고 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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