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2월 24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김훈 중위가 사망한다. 타살일지 모르는 이 죽음을 국방부는 자살로 몰아간다.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이 정치적 타살에 많은 이들이 동요했다. 김희철 감독의 2011년 신작 <사랑할 수 없는 시간>은 언뜻 보기에 전혀 다른 이 두 사건을 통해 영화를 풀어간다.
사실 김희철 감독은 2004년 영화 <진실의 문>을 통해 김훈 중위가 사망한 의문의 사건을 얘기했었다. 감독은 세 차례나 걸친 수사에도 풀리지 않았던 의혹들을 객관적인 태도로 기록한다. 그러나 관객에게 이 억울함을 봐달라고 감정적으로 호소하진 않는다. 오히려 이 사건을 자살로 몰아갈 수밖에 없는 군조직의 폐쇄성과 집단 이기주의를 이야기한다. 타살로 인정한 순간 그 정체성이 사라져버리는 집단의 모순을 보여준다. 이렇게 그의 죽음의 의미가 정치, 사회적으로 확장된 순간 관객들은 사건을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주위를 되돌아보고 직접적으로 사회와 충돌하며 실천할 수 있는 영역들을 사유한다.
7년 후, 영화 <진실의 문>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이 사건은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다시 조사된다. 그리고 김훈 중위의 죽음은 자살인지 타살인지 진상규명이 불가능하다는 판결을 받는다. 이렇게 감독은 잊혀졌던 그의 죽음을 <사랑할 수 없는 시간>을 빌어 다시 우리 앞에 불러온다. 그리고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도대체 이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진실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제 그의 죽음을 잊어도 되는 걸까? 왜 불합리한 현실에서 우리는 움직이지 않는 걸까? 감독은 10여 년 간 이 의혹투성이 죽음을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기록을 통해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건가?’ 이 질문들을 통해 현실 문제의 진실에서 멀어지고자 하는 우리의 비겁함에 그리고 타인의 고통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우리의 안일함에 감독은 일침을 가한다.
2009년 노무현 대통령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노무현 정권에 동의하지 않았던 나지만 그 죽음을 대면하는 순간 끝없이 눈물이 났다. 도대체 내가 왜 울고 있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김희철 감독은 이 눈물에 대한 답을 영화를 통해 보여준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시간이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시간이기 때문이라고. 더불어 이 시간을 채우고 있는 우리에게 감독은 되묻고 있다. 당신은 이 시간을 사랑할 수 있는지. 이제 나 자신을 되돌아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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