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문예상 수필.꽁트 부문 우수작
학술문예상 수필.꽁트 부문 우수작
  • 이승미(서양화.80)
  • 승인 2003.11.23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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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에서의 7일

<바그다드에서의 7일>

사막을 건너가다.

2003년 8월 10일 인지 11일 인지 모를 날, 우리는 6인 승 벤3대에 나누어 타고 새벽부터 사막을 달리고 있다. 가도가도 제자리인 듯, 시야가 닿는 곳에는 누런 황무지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 하늘과 땅이 뻥 뚫린 공간에 아스팔트로 포장된 고속도로만이 황당하게 놓여있어 가끔씩 미군 장갑차를 비롯한 컨테이너 차량이 질주하곤 한다. 한낮이 되어 해가 뜨겁게 달구어지자 몽롱한 증상은 더욱 심해져 지열이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리는 사막은 마치 초현실주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차와 함께 허공 속에 떠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9일 저녁, 밤 8시 비행기에 올라 10일 새벽 방콕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새벽에 요르단 암만에 도착했다. 시차와 더불어 밤새 비행기를 타고 거꾸로 날아와 비몽사몽인 채로 또다시 12시간을 사막을 가로질러  바그다드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암만에서 요르단, 이라크 국경까지 6시간, 국경에서 바그다드까지 또 약 6시간, 오늘이 여전히 10일인지 아니면 11일인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부터 이동 수단에 실려있는 시간만 26시간이 넘는데, 그 이외의 시간을 합쳐야 할지 말아야할지 도무지 시간에 대한 셈이 되지 않는다. 졸다 깨다 하면서 창 밖을 바라보면 여전히 똑같은 풍경이다. 고속도로 인접한 곳에 난민촌 천막과 미군의 경비가 제법 삼엄한 듯한 국경을 지나간다. 국경에서 출입국 수속을 하는 동안 무장하고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미군들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갓20대를 넘어선 앳된 모습의 백인 청년과 그 보다 약간 나이 들어 보이는 흑인 여성이(그래도 25살 이상은 아닐 듯) 네슬레 생수병과 총을 들고 무심히 앉아있다. 문득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그래서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가 이야기를 하려는 순간 한국인 안내인이 황급히 부른다. 미군 옆에 가지 말라고, 이라크인들의 의심을 받아 위험하다고 주의를 준다. 앳된 대학생들처럼 보이는 미군 남녀의 눈에서 두려움 혹은 수줍음 같은 것을 본 것 같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맑은 생수병과 반짝이는 총이 서로를 생소하게 만든다.
그들이 들고 있는 것은 진짜 총이 분명하겠지만, 장난감일거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 앳된 아이들이 사람을 향해서 총구를 들이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두 차례에 걸친 출입국 수속을 마치고 또다시 사막을 향해 달려간다. 우리는 이라크 입국자들 이라 싱겁게도 수속이 금방 끝났다. 그러나 우리와 반대편의 행렬, 이라크를 빠져나가는 행렬은 몇 시간이 걸릴지 모를 길 고 긴 행렬이다. 마치 중고차 시장에 나와있는 듯 차들의 행렬이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전쟁터를 향해 가는 사람들은 빠져나가는 사람에 비해 적은 것이 당연하겠지만, 입국 심사대는 파리만 날리고 있다. 국경을 빠져나와 이라크 쪽에 이르러서는 불안한 마음이 조금씩 커지고 긴장해서인지 잠도 오지 않고 멍하니 창 밖만 바라 보게된다. 바그다드 인근에서 활약하는 알리바바들 때문에 해지기전에 도착해야한다고 호들갑을 떠는 안내인과 운전 기사들의 말에 많이 불안해진다. 도로의 차들은 서둘러 질주하고 몇 대씩 대열을 이루어 함께 다닌다. 가끔씩 무장한 미군 탱크 대열이 바그다드 쪽으로 우리들의 차를 추월해 달려간다.  가도가도 아무것도 없어 계속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은 곳에 갑자기 불쑥 대추 야자나무가 몇 그루 보이더니 주유소가 나타난다.  주유소에는 이 드넓은 사막 가운데 어디에 살고있는 사람들인지 모를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채 자동차에 기름을 넣으려 기다리며 담소를 나누고 있기도 하고, 아랍인들 특유의 손동작을 해가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차 3대에 기름을 가득 채우고 2불, 그리고 약간의 거스름돈을 받았다. 전쟁 전보다 100배가 오른 값이란다. 우리는 그들보다 100배 이상의 기름 값을 지불하고 있지만 대신 전쟁을 하고있지는 않다. 그들은 그렇게 유용한 석유 때문에 영문도 모르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아무리 뛰어난 전략가의 머리에서 명분을 그럴듯하게 만들어내도 축복 받은 신의 선물, 석유가 이 전쟁의 원인임을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차에 기름을 채우는 동안 잠시 내려선 땅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뜨겁다. 지독하게 내리쬐는 햇빛과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열풍은 마치 압력솥에서 쏟아져 나오는 뜨거운 김과도 같이 화끈거린다. 몇 발자국 안되는 화장실까지 가는 길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중간에 휴게실이나 화장실이 없기 때문에 물먹는 것도 자제하고 있어서인지 화장실을 가는 것도 형식적인데, 화장실 입구에 적지 않은 아이들이 몰려 서서 돈을 요구한다. 그러더니 카메라를 보자 사진을 찍어달라고 조른다. 전쟁으로 살기가 어려워진 아이들이지만, 어린 아이다운 순진함과 때묻지 않은 순박함이 느껴진다. 크고 잘생긴 눈매에 장난기와 호기심이 가득하다. 사진을 찍어주자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며 고마워한다. 전 국민이 놀고 먹어도 될 자원을 가진 부자 나라 아이들이 먹고살기 힘든 나라 어른들에게 잔돈푼을 구걸 하고있다.    

 사막의 오아시스, 바그다드.

아무 것도 없는 건조한 사막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또 같은 날 사막에서 해가 지는 모습을 난생 처음 보며 광활한 땅에 대해 생각해본다. 같은 나라 안에서 동쪽과 서쪽의 시간대가 다르다는 것도 동서로 4시간 남북으로도 6시간, 전 국토가 일일 생활권인 작은 나라에서 복작거리며 살고있는 나의 몸으로는 납득하기 힘들다. 해지기 직전 우리는 드디어 바그다드 변두리 위성 도시에 도착했다. 사막의 무심한 풍경만을 보아온 시야에 갑자기 푸른색의 나무들과 핑크색 건물들이 서있는 도시가 멀리 들어온다. 고속도로를 벗어나자 운전 기사아저씨가 "bye bye Alibaba!!!" 하며 창 밖을 향해 손짓을 한다. 바그다드 초입의 고속도로주변에서 총기류 등으로 무장하고 외국인들이 탄 차만 골라 모든 것을 다 털어 가는 전문 강도단을 알리바바라고 한단다. 며칠 전에도 한국인 NGO가 탄 차량이 몽땅 털렸다고 한다. 털린 물건들은 사원 주변이나 시장에 가면 다시 발견되어 되 살수는 있다고 한다. 또 이라크인 들에게 꼭 필요한 양수기나 의료기 같은 것은 이해당사자인 현지인 들이 수소문해서 찾아오기도 한단다. 멀리 보이는 이슬람 사원의 둥근 돔과 그 위의 초승달, 네 축의 기둥은 동화 속 그림을 연상케 한다. 사막의 여행에 지친 우리를 멀리서부터 제일 먼저 반긴 것은 대추야자나무다. 집집마다 마당에 대추야자나무가 한두 그루씩은 심어져있어 사막의 길양식이라는 그 열매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전해준다. 반쯤 농익은 노란색의 열매가 나무가 휘어질 정도로 무리 지어 주렁주렁 달려있어 저절로 입에 군침이 돈다. 그 다음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푸르고 차가워 보이는 티그리스강이 우리를 맞아준다. 성경의 한 구절처럼, '푸른 초장에 나를 쉬게 하시고...' 건조하고 뜨거운 기온에 지치고 온종일 누런 황무지만 가득 담았던 눈에 푸른 색 그 자체가 휴식으로 느껴진다. 티그리스 강가에 우거진 버드나무와 갈대 숲이 도시에 생기를 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에게 바그다드는 어린 시절 이불 속에서 숨을 죽이며 읽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이나 천일야화 속에 펼쳐진 금은 보화, 음악과 춤의 환락이 펼쳐지는 환상적인 천막 속의 아름다운 여인들, 무섭도록 아름다운 긴칼을 차고 별 빛을 보며 사막의 계곡을 달리는 말 탄 무사들에 대한 인상이 전부이다. 적어도 내 안에서 바그다드 사람들은 모두 다 동화 속의 인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맑은 티그리스 강은 옛이야기에 나오는 사막과 오아시스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사막의 동화는 늘 이렇게 시작된다. 고난을 격고 있는 주인공이 오랫동안 사막을 헤메다가 멀리서 오아시스를 발견하고 죽을힘을 다해 달려가 물에 머리를 처박고 갈증을 해소한 뒤 기절한다. 며칠 뒤 깨어나는 순간 그동안 주인공을 열심히 간호하던 차도르를 두른 눈이 크고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에 빠져 다시 모험이 시작된다....  잠시나마 마치 동화 속의 주인공이 된 기분을 느낀 듯 하다. 푸른 티그리스강은 세상의 어떤 여인보다도 아름다워 당장 그 품속으로 뛰어들고싶을 정도다.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을 사막 가운데의 오아시스 티그리스 강이 주고있는 것이다. 종전 선언을 한 뒤에도 여전히 현재 전쟁 진행중인 이라크로 원정을 간 우리 일행은 모두 열 명. 대부분이 화가이고, 기자 1명, 철학자1명, 그리고 이 무모한 여행을 생각해내고 경비를 마련하고 일행을 감언이설로 꼬여 전쟁의 한가운데 바그다드까지 인솔해온, 이 모든 일을 꾸며낸 전시 기획자 1명. 떠나기 전 모두 다 죽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서명까지 하고 왔다. "예술을 위해 자발적으로 원해서 왔으므로..... 그러므로 죽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라는 취지의 일종의 계약서를 받아둔 것이다. 그 뒤로도 쉽지 않은 곡절 끝에 드디어 우리는 우리 일행중의 누구와도 아무런 인연이 없는 사막의 오아시스 바그다드에 도착했다. 그러나 목숨까지도 담보하고 짧지 않은 여행의 피로와 본능적인 긴장감에도 불구하고 바그다드의 첫 인상은 싱겁게도 덤덤했다. 기대했던(?)것 만큼의 전쟁의 상흔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거리마다 넘치는 사람들의 표정은 생기에 가득 차있어 보는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세계의 경찰 미국과 전쟁중인 이라크가 맞는지 의아할 정도로 사람들은 평온해 보이고, 단지 인도나 네팔의 대도시처럼 빈곤한 일상만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선정적인 TV에서 미리 학습한대로 폭격된 건물이 종종 눈에 띄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정밀 폭격이어서 그 건물 한 채만 달랑 폭격되었을 뿐 다른 건물들은 모두다 멀쩡하고, 거리는 노새가 끄는 짐수레부터 하다 못해 탱크와 군용차량까지 운송수단을 모두 망라해 차들로 넘쳐나고, 차에 기름을 넣기 위해 주유소마다 길게 늘어선 차량들로 도로가 마비될 지경이다. 곳곳을 지키고있는 미군 탱크와 망가진 후세인의 대형 초상화만이 과장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도착 첫날부터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는 현실에 직면했다. 돌아가서 이라크 전쟁에 관한 작품을 제작해 전시를 해야하기 때문이다....  늦은 밤까지 피로를 무릅쓰고 격론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늘 이상보다 현실은 냉정하므로.....
아무리 피곤해도 호텔 에어콘의 굉음을 들으면서 잠들 수는 없었다. 그러나 누구도 에어컨을 끄고 잠들고싶어하지 않는다. 실온이 찜질방 소금실 수준이므로...  그래서 모두가 잠든 뒤 마지막으로 에어컨 코드를 뽑아버리고서야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커텐을 제치고 바라본 바그다드 밤 풍경은 관광 엽서에서 본 그대로이다. 나지막하고 네모진 이슬람 특유의 건물들과 야자나무, 사원의 둥근 돔, 그리고 고요하고 어두운 도시, 검푸른 하늘과 휘황하게 둥근 달, 일행 중의 한 분이 사막의 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사막의 별은 직접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그러나 바그다드도 도시인지라 불빛과 매연으로 인해 별들은 숨어 있었다.  새벽에 눈을 뜨니 목과 가슴에 식은땀이 흥건하다. 일어나 질척거리는 땀을 닦고 호기심에 살짝 커텐을 들추고 창 밖을 보니 멀리 지평선 쪽이 빛나기 시작한다. 이제 막 해가 올라오려는 중이다. 일행 몇 명을 깨워 함께 새벽길을 나서 보기로 했다.
한낮의 열기와는 달리 새벽바람은 제법 시원하다. 우리가 묶는 호텔은 미군들이 주둔한 팔레스타인호텔과 바그다드호텔 바로 인근에 있어서 비교적 안전한 곳이라고 했기 때문에 용기를 내서 거리로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이 호텔들은 우리가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두 곳 모두 테러를 당해 건물이 박살이 나버렸다. 어디나 새벽거리는 신선하다. 호텔 앞에서부터 혁명광장을 돌아 인력시장까지 약 한시간 반 정도를 걸었다. 비록 문은 굳게 닫쳐있었지만 거리 상점들의 쇼윈도우를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하고 기막히게 잘 구획된 도로와 골목길을 기웃거렸다. 길에 깔린 보도 블록은 모두 대리석이다. 그간 얼마나 이 나라가 잘살았던 곳인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일행과 함께 노점에 서서 달고 따뜻한 밀크티를 마시는 여유도 있었다. 어디에나 있을법한 희망차고 평화로운 아침 햇살을 풍요롭게 느끼며 내친김에 티그리스강 초입까지 걸어갔다. 새벽부터 인력시장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여자가 잘 돌아다니지 않는 이슬람 관습과 함께 좀체 보기 힘든 동양여자를 호기심에 차서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막 문을 연 서점에서 아들에게 선물로 줄 생각으로 작은 코란을 골랐는데, 가격협상을 하자마자 달러와 디나르 사이를 왔다 갔다 하더니 거꾸로 가격이 점점 올라간다. 사람 좋아 보이는 서점주인의 '인샬라!!'라는 소리를 들으며 미안해하면서 돌아왔다. 코란은 사지 않았다.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임을 확인 한 셈이다. 길가에 위협적으로 세워진 탱크 앞에서 총을 들고 보초를 서던 미군과 눈이 마주쳤다. 긴장하는 나와는 달리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레 손을 흔들어준다. 복잡한 기분을 느끼며 얼른 자리를 피해 일행을 뒤따라왔다.

바그다드에서 만난 사람들.

바그다드의 음식은 이곳이 현재 전쟁 중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너무나 훌륭하다. 중동특유의 아랍 음식은 토마토와 올리브를 비롯한 향채등의 신선한 야채를 많이 쓴 각종 요리를 화덕에 구운 밀떡에 싸서 손으로 먹는데, 신선한 치즈와 구운 닭고기, 양고기 갈비, 그리고 매콤한 맛의 스프등을 어디에나 맛볼 수 있다. 먹는 것만큼은 혹시나 해서 비상식량으로 들고 간 햇반과 컵 라면, 김치등이 그다지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동 수단이다. 바그다드 시내를 개별적으로 이동할 대중 교통 수단이 전혀 없는데다가 여행인프라가 전혀 갖추어지지 않아서 관광안내소나 여행사도 물론 없다. 지도도 물론 구할 수 없다. 영문으로 된 지도는 더더욱 없다. 그나마 이틀 뒤 재래시장 노점의 책방에서 겨우 구한 지도는 언제 인쇄된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빛이 바래고 접힌 부분이 찢어질 만큼 오래되고 인쇄조차 조악한데다 바그다드에 1년쯤 살던 사람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형식만 갖춘 지도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첫날 젊은 운전기사의 주관적 판단에 맡겨진 채 소형 승합차를 타고 바그다드 시내로 나갔다.  오래 전에 나온 세계여행 안내서에 의하면 날씨만 괜챦으면 바그다드는 걸어서 여행하기에 최고인 도시라고 했다. 우리도 날씨와 안전하기만 하다면 모두 걸어갈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들이었지만 한낮의 기온이 53도씩 되는 거리를 걷고자하는 사람은 우리 일행 중에는 아무도 없었다. 의욕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호텔 사람들을 제외하고 우리가 처음 만난 바그다드 사람은 운전기사다. 이들은 3인 1조이다. 먼저 운전을 하는 사람이 있고, 조수가 조수석에서 길을 가르쳐주거나 운전 물을 따라 주는등 기사의 잔심부름을 해준다. 나머지 한사람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일행 중 가장 높은 사람이다. 차의 주인은 아닌 듯 한데, 비용계산을 하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나중에 나서서 한마디 거드는 사람이다. 운전기사가 쩔쩔맨다. 한마디로 이들 중 짱인 것이다. 우리가 탄 차는 차 앞에 흰 종이에 알아보기 힘든 아랍어로 무어라 써 붙이고 다녔다. 그런데 이 운전기사가 참 재미있다. 이름은 아띠야프, 20세 정도 되었다. 이 청년은 교통 규칙을 무시하기가 일쑤이다. 중앙선 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없고 멀쩡히 가다가 차가 막히면 갑자기 역 주행을 해서 사람을 기절초풍하게 하는가하면 과속으로 달리는 중에도 옆에 가는 차의 기사와 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기다리는 차들이 길게 늘어선 주유소에서는 거꾸로 차를 맨 앞에 들이대고는 요란한 손짓 발짓과 심각한 표정으로 차 앞의 종이를 가리키며 빨리 주유 해달라고 소리소리 지른다. 저녁 무렵 영어를 좀 하는 사람에게 물었다. 그 종이에 뭐라고 적혀있는지, 기대했던 것보다 대답은 간단했다. <외국인 수송차량> 외국인 수송차량의 위력이 대단했던 것이다. 나는 그 청년의 순진함이 우습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자신감과 순발력 있고 매우 영리해 보이는 청년이 교육을 제대로 받으면 제몫을 할 수도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느껴졌다. 무척 자존심이 강한 선량한 청년이었다. 그 청년은 그 날 우리의 요구를 무시한 채 우리 일행의 행선지를 자기 마음대로 판단해서 본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곳, 보여주고 싶은 곳을 스스로 결정해 바그다드시내를 세 바퀴나 뺑뺑 돌렸다. 삼성전자 대우 엘지등의 간판이 즐비한 전자제품 밀집지역과 새로 지은 건물, 신흥 시장등으로 끌고 다녔다. 게다가 중간에 우리 일행이 탄 차를 자기 집 앞에 세워두고 볼일을 보러 잠시 집에 다녀오기도 한다. 우리는 이 친구들에게 우리의 의사가 전혀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닿는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지만 하루 종일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 저녁때 우리는 기사들의 짱에게 다음날은 통역도 불러달라고 했다.
 커다란 옥스퍼드영어사전을 들고 다니는 통역사 마지는 바그다드에서 우리가 만난 최초의 지식인이다.
영어를 잘하고 선량하게 잘생긴 29세의 순박한 청년이다. 마지와 우리는 이틀을 같이 다녔는데, 마지와 내가 이틀동안 나눈 이야기는 대부분 가족에 대한 것이었다. 마지는 무척 성실하게 우리의 짧은 시간과 비용을 아껴주려 노력하고 우리들의 의견을 대부분 수용했지만 정치적인 이야기나 미국에 대한 이야기는 회피했으며, 이슬람의 문화나 관습을 강요하거나하지는 않았지만 무척 자부심이 강한 청년이었다. 내가 이슬람의 전통음악이 담긴 카세트나 씨디를 사고 싶다고 하며 마침 사원 앞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가리키며 이 음악이다라고 하자 마지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건 음악이 아니라 자신들의 신앙이라며 자신들에게만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이방인이 재미로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아름다운 바그다드청년의 인생 최대의 프로젝트는 좀 어이없게도 '결혼'이다. 이미 대학을 졸업했고, 군대를 다녀온 뒤 또다시 통역대학을 다니고있으며 얼마전 통역사 자격증을 취득했다고 한다. 앞으로 몇 년간 열심히 돈을 벌어 결혼해야 하는데, 결혼은 정말 중요한 일이며, 자신의 아들들을 생각하면 신부의 나이는 18세를 넘기면 안된다고 한다. 내가 18세의 여자가 결혼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자 자신은 아들을 적어도 3명은 낳아야하고 자녀는 다섯은 되어야하는데, 그러려면 적어도 10년이 넘게 걸리고, 마지막 아이를 낳을 때 여자가 30을 넘겨서는 안되며 그래서 신부가 18살을 넘기면 안된다고 확신에 차서 이야기한다. 23세의 프로그래머 무스타파는 우리가 묶는 호텔의 1층에 있는 인터넷카페에서 일하는 프로그래머이다. 올해 대학을 졸업했으며, 이라크도 후세인도 다 싫고 기회만 된다면 외국에 나가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고싶다고 한다. 자신이 성장하는 20년 내내 후세인은 전쟁을 했으며, 때문에 이번 전쟁에 대해 긴장감도 아무 느낌도 없다고 한다. 미국의 공습이 있을 때에도 그런가보다 하고 별 느낌이 없었으며, 누가 이기든 빨리 끝났으면 한다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현재 이라크의 가장 큰 문제는 전쟁이 아니라 '희망이 없는 삶'이라고 했다. 희망이 없는데 전쟁이 난들 뭐가 문제인가라고 한다. 무스타파는 한국사람들에 대해 호감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어렸을 때 한 식당에서 고속도로 공사를 하러온 한국인들을 만났던 기억이 있는데, 그들이 아랍어로 "앗살람 알라이쿰!"하고 자신에게 이라크식으로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들어준 기억이 인상깊게 남아있고, 사막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 공사를 한국인들이 했다는 것을 당시에 굉장히 놀랍게 생각했으며 아직도 굉장한 일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기회가 되면 한국에 꼭 와보고 싶다는 말도 빠트리지 않았다. 무스타파와 우리 일행 중 몇 명은 밤에 택시를 대절해서 바그다드의 압구정동 알라비아 거리에 갔다. 우리의 압구정동이 그렇듯 알라비아 거리는 고급 외제차들과 성장한 여인들 그리고 네온이 번쩍거리는 상점과 음식점들로 넘쳐났다. 그곳에서 나는 비로소 '여성'과 이야기를 해보았다. 압구정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도의 화려하고 활기에 넘치는 소녀들이다. 그들의 아빠가 야단을 치며 외국인과 이야기하지 말고 차에 들어가 있으라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에게 괜챦다고 계속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니까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 어디나 부모 말 안 듣는 딸들이 있기 마련이다.    
현재 바그다드 국립박물관장은 임시로 미군 당국이 지명한 사람이다. 우리 일행은 운 좋게도 유물이 모두 약탈된 현장에 들어가 볼 수 있는 행운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그곳에 들어가기까지 무려 이틀이나 소요되었고 아랍인들과의 시간에 대한 개념이 틀린 관계로 인내심의 한계를 느껴 일행 중 몇몇은 분노를 삭이지 못해 마지막에 들어가기를 거절했지만, 이라크 국립 박물관은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중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보고이다. 더구나 유리창에 총구멍이 선연한 폐허가 된 약탈의 현장인 그곳에 대한 감동은 우리 일행들의 첫사랑이 미술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것이다. 작가가 되기 위해 미술대학에 들어가 비로소 미술의 역사에 대해 공부할 때 학문으로 처음 만나는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앗시리아.... 이 모두가 그 안에 있지 않은가... 가슴이 미어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을 담은 문화 유산이 과연 이라크인 들만의 것인가.... 우리가 바그다드에 목숨을 걸고라도 가고자했던 이유가 바로 현재 우월한 종족이라 자처하는 문명인의 야만성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곳에서 만난 박물관장은 몸이 갸날프고 손마저 섬세한 우울해 보이는 분이었다. 마지와 한국인 가이드가 이틀이나 들락거리고 신청서를 작성하고 모든 수속을 다 마친 뒤에도 요지부동으로 우리를 들여 보내주지 않더니,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해보자며 들어가 내가 내민 명함에 찍힌 'Museum'이라는 단어를 보고 동종업계에 종사한다고 호의를 가지고 비로소 관람을 허락한 것이다. 약탈의 현장에는 야만의 자국이 선혈 그 자체로 남아있다. 내가 그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나는 그 누구라도 절대 들여보내지도 보여주지도 만나고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바그다드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는....    
 터키대사관 근처 히와르 갤러리 주인 카심은 50대의 작가이자 바그다드 현대미술을 이끌어 가는 예술가이다. 히와르 갤러리는 바그다드의 많은 예술가들이 모이는 일종의 예술가들의 아지트로 매일 오전 화랑과 붙어있는 카페에는 바그다드의 예술가들로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이다. 그들은 날마다 오전에 그곳에 모여 차를 마시며 담소를 하고 정보를 교환하고는 오후가 되면 집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그곳에는 꿈이 있는 의욕적인 젊은 예술가들로 넘치고 있었으며 그곳은 단지 화가들뿐만 만이 아니라 배우와 작가, 음악가들에게도 휴식과 희망을 주는 장소였다. 나와 같이 간 마지는 그곳에서 유명한 TV진행자라는 어느 여성을 보더니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들떠버렸다. (18세 이상은 안된 다고 하더니... ㅡ.ㅠ::).  부인도 역시 예술가인 카심은 전쟁이 한창일 때 국립 현대미술관에서 약탈당한 작품들을 약탈자들에게 사들여 전시를 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현대미술관이 문을 열면 제자리로 보낼 계획이라고 했다.  바로 얼마 전 터키대사관에 대대적인 공격이 있었다. 터키 대사관과 골목 하나를 두고 있는 히와르 갤러리와 카심이 아무 일없이 무사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상한 전쟁.

우리 일행이 바그다드에 들어가던 시점인 8월은 전쟁이 종료 된 뒤였다. 당초 예상과는 다르게 너무나 싱겁게 일방적으로 바그다드를 진압한 미국에 의해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라크는 후세인의 오랜 독재에서 해방되었다는 선언을 한지 한참이 지난 뒤에 간 것이다. 나에게 전쟁이란 영화 피아니스트나 쉰들러 리스트, 디어헌터, 혹은 돌아온 해병과 같은 영화에서 보았던 참혹한 현장을 의미했다. 전쟁이란 이번 이라크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바그다드에는 무장한 이슬람 전사들이 있었어야하며, TV에서보았던 폭격에 의해 가족과 팔다리를 잃은 바그다드의 어린 소년 알리를 확인했어야했다. 그러나 우리가 바그다드에서 본 것은 동양인들에 대한 호감이 가득한 선량한 바그다드 시민들과 사진을 찍어달라고 조르는 어린이들 그리고 삼성 엘지 대우로고가 선명한 거리의 간판과 하림 치킨, 베토벤 음악학원등 버젓이 한글을 달고 거리를 활보하는 우리나라 중고차들뿐이다. 그중 에서도 어느 거리에서 본 화려하게 치장한 미장원과 웨딩드레스 가게는 가히 압권이었다. 이곳이 바그다드가 맞는지 혹시 요르단의 암만이나 이스탄불에 잘못 온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병원에는 폭격으로 상처 입은 알리가 아닌 오랜 가난과 의료기의 부족으로 인한 만성질환자들이 대부분이었고, 대학과 사원에도 평상시와 같은 인파의 움직임들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물론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들이 종종 있었는데, 후세인이 거처하던 후세인궁이나 관공서 통신사 경찰서등은 골조만 남아 있거나 무너져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활기에 넘치는 사람들의 배경화면일 뿐이었다. 기사거리에 굶주린 외국 기자들에게 미군들이 사진 찍을만한 곳을 안내하며 인솔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상한 건 자국의 전쟁에 무관심한 이라크 사람들이다. 물론 이방인이 여행 삼아 며칠 바그다드에 머문 경험을 가지고 그들이 겪는 전쟁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이방인의 눈으로 본 바그다드 사람들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저렇게도 천연덕스러울 수가 있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명동이나 압구정 거리를 보고 한국에 대해 논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우리 일행 중 페미니스트 작가인 윤석남 선생님과 사진 작업하시는 박영숙 선생님 그리고 내일신문의 신민경기자는 따로 시간을 내어 한국인 NGO 단체인 굿네이버스가 구호활동을 펴고있는 지역에 다녀왔다. 이 세분은 평소에도 여성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해오던 분들이고, 이번 답사에서도 특히 전쟁 중에 더욱 비참한 존재인 이라크 여성이 겪고있는 이중 삼중의 전쟁이 그분들의 작업 주제였던 것이다. 굿네이버스가 구호활동을 하고있는 지역은 후세인과 다른 종파인 시아파가 사는 북부의 사드리 지역으로 오랫동안 후세인의 억압과 박해를 받아 상하수도 시설이나 전기 시설도 없는 지역이다. 주변 환경이 너무 열악해 어린이들 모두가 수인성 질환을 앓고 있었고, 주민들도 모두 만성적인 질환을 앓고 있었으나 의료진과 시설, 의약품의 부족으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맨발의 어린이들은 두려움도 없이 총을 들고 뛰어다니고, 이국인에 대한 호기심으로 무리를 지어 따라다니며 그중 용기 있는 아이들은 다가와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구한다. 이 아이들은 물론 교육을 받지 않는다. 학교도 없고 교실도 책상도 노트도 연필도 없다. 나이든 여성들의 대부분은 당뇨병이나 관절염을 앓고있다. 이슬람의 관습상 집밖을 잘 나가지 않고 거의 실내에서 지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현재 이라크의 여성과 어린이에게 인권을 들먹이는 것 차체가 사치스러울 지경이다. 그들에게는 이미 오래 전부터 소리 없는 전쟁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이 더 나쁘지도 않은 데다가 왜 이런 상황을 격어야만 하는지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아직도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겪고있는 것인지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지금 과연 이라크전은 종료되었는가? 혹시 이제부터가 시작 인 건 아닐까?  지금까지는 후세인과 미국의 전쟁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이라크의 국민들이 감당하고 해결해가야 할 전쟁이 시작된 것은 아닐까?
바그다드에 오기 전 사전 지식을 갖추기 위해 열심히 지켜본 호들갑스러운 언론의 보도와 각국의 NGO, 민간 구호단체들의 선정적인 구호활동을 되돌아보았다. 그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했을까?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도 전쟁 전에는 인간방패들이 바그다드에 와있었으며, 전쟁 중에도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그들의 일부는 한국에서 모금활동을 하고 일부는 바그다드에서 전쟁 구호활동을 해왔다. 적지 않은 의료봉사단도 의약품과 의료기구를 가지고 다녀갔다. 우리를 포함해 그 모든 일들은 <왜?> 이곳에 다녀가야 했을까?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하는가? 떠나기 전에는 깨달을 수 없었던 구체적인 의문과 반성이 뒤따른다. 얼마 전에 전쟁이 끝난 아프카니스탄은 어찌되었을까? 왜 사람들은 그곳에 대해서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일까? 그곳은 평화를 되찾았을까?    
    
 그래도 삶은 지속된다.

이 번 답사에 동행했던 윤석남선생님의 작품제목이다.  이 분은 우리 일행 중 유일하게 한국전쟁을 겪으신 분이다. 선생님의 당시 나이는 10대. 윤석남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6.25전쟁을 격을 때 한쪽에서는 전쟁으로 죽고 한쪽에서는 굶어죽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고 사람은 그렇게 살아가는 거라고. 인간은 그 자체가 별 존재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이곳에서도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은 앞으로도 계속 지속될 것이고, 자라는 아이와 함께 언젠가는 이곳도 민주화되어서 우리처럼 대통령을 우습게 보고 마구 흔들어댈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그때는 이 사람들은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잘사는 나라가 될 것이다. 세계 2위의 산유국 국민으로서. 자존심이 강한 이슬람의 아들 딸로서 ....   
한국으로 돌아온 뒤 한참을 혼란 속에서 있어야했다. 결코 정리될 수 없는 상황인 듯도 했다. 우리의 전시 제목은 <오해와 반성>으로 결정될 분위기다. 우리는 분명 이 전쟁에 관해 오해가 있으며 반성해야할 것들이 있다. 아니, 과연 우리는 전시를 할 수 있을까? 해도 괜찮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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