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문예상 소설부문 응모작
학술문예상 소설부문 응모작
  • 승인 2003.11.23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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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가고싶다.

▦바다에 가고 싶다▦

 

 


 "이번 역은 충무로, 충무로 역입니다... 내리실문은..."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졸고 있던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 얼른 가방을 추스리고 지하철에서 내렸다. 3호선으로 갈아 타기 위해 계단을 향하는데 열차가 들어섬을 알리고 있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얼른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저 전철을 타야 하는데 계단이 안보일 정도로 북적대는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다. 어쩔 수 없이 전철을 향해 뛰기 보다는 친구에게 조금 늦을 것 같다는 문자를 날리기 위해 핸드폰 폴더를 여는 순간이었다.
 "꺄아악!!"
 어떤 여자의 새된 비명 소리. 그런데 그러한 비명은 한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군데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안 그래도 복잡하던 계단은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는 사람들의 호기심으로 더욱 분주해졌고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래로 떠밀려 내려갔다.
 전철선로 부근에는 평소의 몇 배가 넘는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그 가운데서 정신을 잃은 채 사람들에게 이끌려 나오는 한 여자도 눈에 띄었다.
 "사람이 죽었어, 사람이!!"
 "달려오는 전철에 뛰어 들었대."
 무언가 불안정한 수군거림, 묘한 두려움을 동반한 채 들떠 있는 공기. 사람들은 끔찍해 하면서도 그 처참한 광경을 보려고 자꾸만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다들 물러서세요!!"
 구조 대원의 외침에 일순 사람들은 조용해 졌고 구조 대원들이 일을 수습하기 위해 선로로 들어섰다. 사람들의 틈 사이로 나는 선로 위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사람을 얼핏 보게되었다. 보라색 꽃무늬 스커트. 어디서 본적이 있는 것 같은...
 "서린아!!"

 

 부시럭 거리는 소리에 잠을 깨어 반사적으로 시계를 보니 아침 7시였다. 왠만해서 주말에는  12시전에 잘 일어나지 않는 서린이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보라색 꽃무늬 스커트에 프릴이 곱게 달린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벌써 화장까지 마친 상태였다.
 "어, 나 땜에 깼어? 미안, 더 자."
 "으응, 어디가?"
 그녀는 말 대신 작게 웃어 보였는데 그 미소가 왠지 서글퍼 보였다. 그러고는 바로 돌아섰기 때문에 그 이상은 물을 수가 없었다.
 "잘 갔다와."
 끼익, 덜컹덜컹. 문이 닫히고 열쇠로 문을 잠그고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시 잠이 들었었다.

 기숙사로 돌아와 침대에 무너지듯 걸터앉아 맞은편 침대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나는 몇 시간 전 내가 목격했던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침만 해도 서린이는 저기에 있었지 않은가. 그런데 왜? 도대체 왜?
 띠리리리...
 기숙사 방 전화가 울렸다. 나는 무의식중에 방밖의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방으로 걸려오는 전화는 거의 내 전화였던 적이 없었다. 대부분 서린이의 남자 친구 전화 였고, 서린이가 방에 없을 때는 괜히 내가 받기 민망해서 서린이가 지금 오고 있지 않나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발자국 소리가 방을 지나치고 나서야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 서린이는 다시 이방으로 오지 않을 것이다. 전화벨 소리는 계속 신경질 적으로 울렸다. 그는 아직 모르고 있을 것이다.
 "여보세요."
 "저, 서린이..."
 "없는데요."
 "어디 나갔어요? 언제 들어와요?"
 "안 들어와요."
 "네? 그게 무슨? 여보세요, 여보세요??"
 더 이상 전화를 붙들고 있을 수가 없다. 물론 나보다는 더 서린이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그이겠지만, 지금 이 시간 태연하게-물론 서린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겠지만- 전화를 걸고 있는 그가 미웠다.
 뚜뚜뚜뚜... 제자리에 놓이지 못한 전화가 항의하듯 거슬리는 소리를 질러 댔지만 게의치 않았다. 아마 제자리에 돌려 놓으면 끊임없이 그가 다시 전화를 걸어올 것이다. 언젠가 전화가 계속 울려도 옆에 있던 서린이가 받지 않아 이상하게 여겨 바라 보았더니 서린이는 수화기를 들어 받지도 않고 끊고는 다시 벽에 걸어 놓는 것이 아니라 침대 옆으로 슬그머니 떨어 뜨렸다. 그러고는 다시 침대 속에 몸을 뉘인 채 묵묵히 책장을 넘겼다. 무언가 억눌린 듯한 평화가 다시 방에 찾아들었고,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지겨운 레포트를 이어서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고요는 오래 가지 않았다. 내 핸드폰이 울리기에 조용한 분위기를 깰까봐 얼른 폴더를 열었는데 낯선 번호가 찍혀 있었다. 의아해 하면서도 전화를 받으니 이제는 익숙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감해 하면서 서린이를 바라보니 서린이는 체념한 듯 핸드폰 전원을 켜고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내 핸드폰으로 하라고 해."
 이런 생각을 떠올릴 줄 알았다는 것처럼 내 핸드폰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나는 거칠게 핸드폰의 전원을 껐다. 그리고 무엇에 이끌리듯 서린이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들 사이로 일기장인 듯 여겨지는 공책이 보였다. 늘 무언가를 끄적이다가도 누가 다가서면 후다닥 덮어버리는 서린이었기에 조금 죄책감을 느끼며 그것을 살며시 걷어 보았다. 첫 장에 쓰여진 것은 시였다.

 

바다에 가고 싶다

바다에 가고 싶다...

바다에 가고 싶다...

꼭 내 마음만큼 시린 그 곳
모두를 덮을 듯 넘실대는 시커먼 덩어리가
서서히 내몸을, 내 마음을 채워갈테지

바다에 가고 싶다...

삶이란 건 눈물나도록 힘에 겨워서
꿈이란 건 공허하도록 잡혀주지 않아서
사랑이란 건 아프도록 지워지지 않아서
이제 그만,
나를 놓아버리고 싶을 때

바다에 가고 싶다...

가슴속을 가득 채운 차디찬 울음을
발끝으로, 손끝으로 맞닿을 수 있는 그곳

바다에 가고 싶다
아아, 바다로 가고 싶다


 문득 머리 속을 쾅 하고 울리는 것이 있었다. 간만에 서린이와 함께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다. 고향이 제주도인 서린이의 집에서 보내온 옥돔을 먹다가 바다 얘기가 나왔었다. 나는 대전에서 태어나서 줄곧 그곳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바다에 가본 것은 두 세번 여름 피서철에 갔던 것 뿐이라고 서린이에게 말했다. 그러자 서린이는,
 "여름 바다보다는 겨울 바다가 더 좋아. 좀 춥긴하지만 사람도 적고 가만히 앉아서 하염없   이 바다를 바라봐도 방해 받지 않을 수 있거든. 계속 바다를 보고 있으면 바다에 물들어    가는 것 같아, 마음이. 그런데 겨울 바다는 왠지 모르게 마음을 시리게 해서 여름 바다가    더 그리워 질때도 있지. 어쨌든 여름 바다가 있고나서야 겨울 바다가 있고, 또 그 다음엔    여름 바다가 되고 뭐 그런거겠지. 여름 바다는 뭐랄까... 충무로 같아."
 "충무로?"
 "왜 지하철 말야. 4호선에서 3호선으로 갈아 탈때, 충무로에서 내리면 사람들이 엄청 많잖    아?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하며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여름철에 사람들로 바    글대는 바다 같아. 그래서 충무로에서 지하철 탈때 마다 바다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어. 또 이상하게 충무로에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으면 전철이 들어올때 바람이 다른 곳    보다 유난히 거센 것 같지 않아? 꼭 바닷 바람 처럼 말야, 쿠쿠."
 
 서린이는... 바다가 그리웠던 것일까. 그렇듯 바다를 바라보며 무엇을 떠올리고, 또 무엇을 지우고 싶었던 것일까.
 갑자기 울음이 복받쳤다. 내가 왜 우는지 조차 모른 채, 한없이 눈물을 떨구다 어느새 잠이 들었던 듯 하다. 일어나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 해져 있었다. 이맘 때쯤 나를 돌아 보며
"잘 잤어? 배고프지? 우리 뭐 먹을까?" 하며 웃던 서린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늘 앉아서 글을 끄적이던 책상은 텅 비어있고, 결코 그곳에 혼자서는 펼쳐져 있지 않던 일기장이 홀로 남아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사랑...
 사랑.. 그것이 무엇인지.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어느덧 멀찍이 떨어져 나를 들여다 본다.
 상대를 옭아 매는 것이 사랑인지, 놓아주는 것이 사랑인지.
 날 감싸오는 따뜻한 손길
 눈이 시리도록 나만을 바라보는 눈빛
 
 나... 나는 떠나고 싶다
 어디로? 갈 곳은 없다
 하지만 여기는 아닌 것 같아. 너무 좁고 답답해.
 하지만, 그 손길은 너무 따뜻해
 그 눈빛은 너무나 아파

 나를 놓아 줄 수는 없니?
 
 나의 무엇이 그토록 너를 놓아주지 않는건지.
 나를 포기할 수 없게 하는 지
 
 나는 언제 부터 이렇게 지쳐 가기 시작한 걸까.
 왠지 의무가 되어 버린 듯한 사랑
 이게 진정 나의 의무일까.
 나의 사랑을 받는 것이 너의 권리 일까.
 

 뒤를 이어서도 시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글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분명히 힘들어 하고 있었다. 다만 내색하지 않았을 뿐. 거의 1년 가까이 함께 생활해온 룸메이트였지만, 우리는 그리 친하지도 않고 그리 어색하지도 않은 사이였다. 말하자면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달까.
 그녀의 남자친구는 제주도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처음 기숙사에 들어왔을 때, 나를 맞아준 것은 그녀가 아니라 텅빈 방안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였다. 약간 머뭇거리며 수화기를 들자 "서린이 아니에요?" 하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아직 얼굴을 보지 못한 내 룸메이트의 이름이 서린인가 보다 하고 짐작하였다. 그 후로도 그 남자의 전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남자들은 전화 자주 하는 걸 싫어한다고 들었는데 이 남자는 서린이를 참 좋아 하는 가 보다 하고 조금은 부러움을 느꼈었다. 하지만 밥을 먹다가도 방에서 전화벨이 울리면 서린이는 얼른 뛰어들어갔다가 한참 후에야 나오곤 했다. 혼자 먹고 있기도 그렇고 기다리고 있으면 미안해 할 것 같아서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 있노라면 미안한 얼굴로 나와서는 "미안. 얼른 끊으려고 안해서.." 하며 다시 숟가락을 들곤 했다.
 그녀의 남자 친구가 좀 심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 것은 무더웠던 5월의 오후였다. 아침에 너무 옷을 두텁게 입고 나왔던 터라 공강 시간에 옷을 갈아입으러 기숙사로 가던 길에 앞방에 살던 수지와 마주쳤다.
 "너 핸드폰 놔두고 가서 가지러 가는 거지?"
 "아니, 더워서 옷 갈아입으러 가는데 왜?"
 "니네 방에서 핸드폰 아침부터 계속 울리더라구. 그럼 서린이 껀가 보네."
 내가 방에 들어설 때까지도 핸드폰은 계속 울리고 있었다. 내가 서린이의 침대 맡으로 다가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벨소리가 끊겼는데 그 위로 '부재중 82통화'라는 메세지가 떠 있었다.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가 왔고 망설이다가 폴더를 여니,
 "야!! 도대체 뭐한 거야, 걱정했잖아!!"
  거의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 저 서린이가 아니고 룸메이트거든요. 서린이가 아마 학교 가면서 폰을 안 가지고 갔나    봐요."
  전화를 끊고 나서 다시 학교로 돌아가면서 내내 그 남자에 대해서 생각했다. 물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걱정되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전화를 해서 안 받으면 폰을 안 가지고 갔거나 밧데리가 떨어졌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부재중 82통화 라니. 꽤 끈기가 있는 사람인가 보다고 웃지 못할 결론을 내리고 넘어 갔던 적이 있었다.
 

 너의 사랑이 과분하다

 넘쳐 흐르는 그 사랑은
 나를 허둥대게 만든다

 담아도 담아도
 그치지 않는...
 
 한때는 그 사랑에
 한없이 행복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버겁다.
 나에겐 더이상
 너의 사랑을 담을 그릇이 없다


 고리

웃어야 하지

짜증이 날때도
아기처럼 귀엽게
투정부리고

너만 봐야하지

남자든 여자든
너이외의 사람은 허용되지 않아

아무리 화가 날 때에도
"사랑해요"한마디에
너는 돌아서고

참지 못해 내 마음을 표현하면
넌 항상 힘들어하지
날 불행하게 할 수 없다며
넌 떠난다 하지
이제 붙잡을 힘도 없어
스스륵 놓아 버리려 할때
눈물을 흘리며 돌아오는...

나를 떠날 수 없는 너
너를 버릴 수 없는 나


 서린이에게 핸드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남자 친구가 기숙사 방으로 전화를 걸어오는 것은 전화 요금 때문이라고 했다. 뭐, 어쩌면 내가 기숙사에 있는 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일 지도 모르지만. 하며 서린이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었다. 내가 '왜?' 라고 묻는 듯한 얼굴을 하자 서린이는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더니,
 "혁준이는 내가 놀러 다니는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 늘 자기랑 통화하고 놀아 주길 바라    는 거 같아."
 그녀가 자신의 속 마음을 말하는 것은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으므로, 그러한 말이 그녀의 입을 통하여 흘러 나오는 것이 놀라웠다. 그리고 조금은 기쁘기도 했다.
 "왜? 자기 말고 다른 남자 만날까봐 그러는 거야?"
 "음... 그런 것두 있겠지. 근데 내가 아는 남자도 거의 없고 누구를 만나는 지 뻔히 알면서   도 친구랑-여자 친구 말야- 놀러 간다고만 하면 뾰루퉁 해져. 여자 친구들한테까지 질투   를 한다니깐. 글쎄, 가까이에 없어서 자기는 같이 놀러 못 가는데 나만 놀러 간다고 하니깐
 심술이 나는 건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녀는 멈칫 말을 멈췄다. 말을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 듯 했다.
 "...친구가 별로 없거든. 그래서 친구들하고 놀러 다니는 것을 이해 못해. 아니, 안 하려고 하   는 걸지도 모르지만."
 말을 마치고 나서 서린이는 속내를 털어놓은 것이 자못 쑥쓰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문득 그녀가 나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서린이의 친구들이 기숙사 방으로 찾아와 서린이에게 고민을 털어 놓는 것은 많이 봐왔지만 서린이는 묵묵히 들어주거나 친구에게 몇 마디 조언을 건네며 위로할 뿐, 정작 그녀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별로 본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남자 친구 탓인지 서린이는 거의 밖에 나가는 일이 드물었다. 침대에 걸터 앉아서 가만히 책을 읽거나 혹은 다소곳이 책상에 앉아서 글을 끄적이다가 전화가 오면 행여나 나에게 들릴까 방해가 될까 입을 가리고 조용조용 속삭이거나 아니면 이불을 뒤집어 쓰고 통화하는 게 전부였다. 통화가 끝나고 수화기를 제자리로 돌려 놓은 후에도 이불 속에서 몇 분이고 꼼짝을 않고 가만히 있을 때, 그럴 때는 그녀가 남자친구와 싸움을 하고 나서 울고 있을 때였다. 그렇게 몇 분을 있고 나서 이불을 걷고 일어나선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장보러 가기로 했는데 통화하다 보니깐 늦어 버렸네, 미안. 지금이라도 얼른 갔다오자." 하고 말을 건네던 그녀였기에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했었다.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 나갔다가 예정보다 일찍 돌아 왔던 어느날,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여느때와 같이 침대에 누워서 통화하고 있는 그녀는 울고 있었다. 무안해진 내가 세면기에 물을 틀고 부산을 떨자 뒤늦게 부시럭 거리며 그녀가 이불을 덮어 쓰는 소리가 들렸다. 그날은 오래도록 그녀는 이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 그녀가 이불을 걷고 나오려는 기척을 보이자 이번에는 내가 읽던 책을 덮고 애써 졸린 척 선 하품을 하며 이불을 덮어 써 버렸다. 애써 환하게 웃는 그녀를 보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녀가 늘 불행하거나 힘들어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6월 중순께였나, 하루 종일 들뜬 모습으로 옷장 서랍을 뒤적거리고 있는 그녀를 보니 나도 왠지 마음이 설레여서,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상기된 볼이 드러내는 기쁜 마음을 숨기지 않은 채, 그러나 조금은 쑥쓰러운 듯이 남자 친구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서울에 올라올 거 라고 말했다. 그녀의 남자 친구가 올라오기 전 며칠 동안 그녀는 정말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다. 그동안 내가 그녀와 그녀의 남자친구 사이를 너무 혹평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어쩌면 나는 서린이만 보아왔기 때문에 전적으로 서린이 편에만 섰던 것일지도 모른다. 원래 남녀 관계란 싸움과 화해를 거듭한다지 않는가. 그녀의 남자 친구도 나름대로의 고민과 근심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사소한 다툼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전화를 하고, 끊임없이 안부를 묻고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긴 커녕 말 그대로 그녀만이 세상의 전부 이며, 친한 친구들 앞에서도 "난 친구보다 서린이가 더 소중해." 라고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는 남자. 그녀를 만나고서 사는 것이 너무나 즐거워 졌다며, 오로지 사는 이유 자체를 그녀에게 의존하고 있는 그런 남자. 기숙사 방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몰래 둘이서 술을 마셨을 때, 술이 듬뿍 배인 들뜬 목소리로 늘어 놓았던 서린이의 남자친구 자랑이었다. 아니, 남들이 들으면 충분히 자랑이라고 할만한 얘기였지만 단순한 자랑이라고 하기엔 서린이의 말투는 너무나 자조적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다른 친구들이 이러한 점에 대하여 고민하는 것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이와 반대로 '이러이러해서 나한테 너무 무심한 것 같다' 가 대부분 그들이 털어 놓는 남자 친구와의 문제점이었다. 그런 친구들이 들으면 이러한 서린이의 얘기는 복에 겨운 투정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서린이는 분명히 그로인해 고통받고 있었다. 피식 웃으며 이런 얘기들을 털어 놓는 술내음 섞인 목소리 저 깊은 곳에는 울음이 묻어 났다.


 그래, 솔직히 나는 너에 비해 많이 부족해.
 널 소중하게 느끼면서도 어느 순간 나 자신을 챙기게 되지.
 거짓... 니 표현대로 거짓이라면 거짓일 수도 있겠지만 "뭐가 제일 소중해?" 라고 눈을 반짝이며 묻는 너에게 감히 내가 어떻게 다른 대답을 할 수 있겠니. 물론 니가 제일 소중하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야. 하지만 때때로 고개를 쳐드는 '나'의 존재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다. 아니 어쩌면 큰 존재일 지도 모른다... 이게 너한테 차마 하지 못한 말이지. 하지만 그건 니가 거부한 대답이잖아. 어떻게 반응할지 뻔히 알고 있는데, 차마 그렇게 대답할 수 없었어.
 왜 너는 내가 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을 싫어할까
 너는 나에게 마저 질투를 느끼는 걸까
 그런데 내가 너에게 좀 더 관심을 보여주기를 바라는 것은, 내게 존재하는 너 아닌 다른 모든 것들에 질투를 느끼는 것은 너도 그만큼 너를 소중히 하기 때문이 아닐까.
 니가 나를 위해서 질투하는 것은 아닐텐데.

 모르겠다...
 너를 이대로 놓아야 할지
 서둘러 붙잡아야 할지

 너는 내가 조금이라도 진심을 얘기하려고 하면 기겁을 하고 물러서는 구나. 너는 네가 말하는 그 완전하고 진실된 사랑으로 이런 내 모습까지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니? 너는 도대체 뭐 때문에 아파하고 있니... 니가 만든 내 모습과 나의 실체가 같지 않아서?
 너의 목숨을 버릴 정도로 나를 사랑한다면서 왜 너는 내 이런 모습까지 감싸지 못하니. 상처 입은 것은 너뿐만이 아니야. 너만 아파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마.
 그래도... 보고 싶다. 지금 당장 달려가서 널 안아줘야 하는 데. 결국 너를 치유할 수 있는 건 나라는 걸 아는데. 이렇듯 당당하게 말은 해왔지만 과연 나는 너없이 살 수 있는 존재 일런지...


 '사랑이 깊어질 수록 그와는 멀어지도록 노력하라.' 어느 시에서 읽었던 한 구절이다. 사랑이 깊어지게 되면 더욱 더 그 사람 가까이 가고 싶어지고, 결국 너무 가까이 다가서면 상처 받기 마련이다. 아마 그 남자는 서린이를 너무나 사랑해 버린 모양이다. 이러한 것들을 알면서도 결국 다가서 버리는 것이 또한 사랑의 아픔이 아니겠는가. 서린이도 그런 것을 알기에 차마 그를 밀어 내지 못했던 것이겠지. 그리고 어쩌면 그녀도 자기도 모르는 새 서서히 남자 친구에게 가까이 다가서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상처입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그를 그러안고 마는 그녀의 모습이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순수의 눈동자

 너의 그 까만 동공은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순정

 슬플 정도로 맑디 맑은
 넘쳐 흐르는 사랑의 속삭임

 한치의 어긋남도 용납치 않는
 하나의 이름을 향한 달음질

 그리고 저 곧은 길의 끝에서,
 그대의 눈을 응시하고 있는
 또 하나의 까만 빛


 다음 날 아침, 열쇠로 문을 따는 소리에 번쩍 눈이 뜨였다. 서린이? 커다랗게 뜨여진 내 눈에 들어온 사람은 기숙사 조교 언니와 그리고 그 뒤에 슬픔을 가득 머금은 얼굴을 한 서린이의 어머니 였다. 아마 20년정도의 세월이 흐른 뒤의 서린이의 얼굴을 짐작하게 할만한 외모도 그러했지만, 금방이라도 슬픔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얼굴을 했으면서도 차분히 억누르고 있는, 그래서 보는 사람을 더욱 슬프게 만드는 모습이 또한 서린이의 어머니임을 금방 알 수 있게 하였다.
 "학생이 서린이 룸메이트 인가요?"
 "네. 안녕하세요? 서린이... 어머니시죠?"
 "맞아요. 우리 서린이,"
 많이 보아온, 익숙해진 광경. 서린이도 저 자리에서 저렇게 말을 멈추고 마음을 가라앉히곤 했었다.
 "우리 서린이 잘 대해줘서 고마워요."
 "고맙긴요..."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그 자리를 나와 버렸다. 서린이는, 또 그녀의 어머니는 모르는 것일까. 그들은 남을 배려하기 위해서, 혹은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그렇게 슬픔을 억누르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그렇게 마음속 깊이서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척 지켜 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얼마나 쓰라린지를.
 잠시후 돌아온 불꺼진 방안에서, 서린이의 어머니는 서린이 이불에 얼굴을 묻고 소리죽여 흐느끼고 계셨다. 나는 살며시 문을 닫고 방을 나왔다. 위로를 거부하는 쓸쓸한 어깨. 그래, 어쩌면 위로라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파하며 위로한들 그들의 아픔보다 더 아파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그것을 알기에 홀로 아파하는 법을 터득했을지도 모른다. 삐이걱. 앞방의 수지가 나오는 모양이다. 나는 얼른 눈물을 닦고 기숙사를 나온다. 잔뜩 걱정스런 얼굴, "너도 많이 힘들겠다." 라는 말,말,말.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서린이의 짐들이 모두 치워 지고 휑한 방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내 마음속에 바람이 일었다. 멍하니 빈자리를 바라보다가 눈길을 떨구고 침대 위에 털썩 걸터 앉았다. 무언가 딱딱한 게 엉덩이 밑에 있는 것 같아 이불을 들춰 보니 미처 서린이 어머니께 건네주지 못한 일기장이 그곳에 있었다. 아마 일기장은 따로 갈곳이 있어서 그렇게 그곳에서 망설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이 과연 옳은 생각인지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핸드폰을 켜고 다이얼을 눌렀다.
 며칠 뒤 그는 서울로 올라왔다. 마음 고생을 심하게 했음을 한눈에 알려주는 까칠한 모습이었다. 일기장을 받아들고서, 그 위에 가만히 손을 올리고는 마치 그게 서린이라도 되는 냥 소중하게 쓰다듬기를 반복하더니 마침내 숨을 들이 쉬고 일기장을 넘겨 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흡하고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말 서러운 울음이었다. 남자가 그토록 크게 울음을 놓는 것을 보아온 적이 없기에 나는 너무나 당황했다.
 일기장의 펼쳐진 부분은 일기의 거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사실은 너에게 헤어지자고 했던 말, 그냥 해본 말이 아니었어. 혁준아, 정말이지 나는 너무나 힘들었어. 정말 마음을 굳게 먹고 너를 떠나 보내려 했어. 쉽지 않겠지만, 정말 그렇게 하려고 했어. 니가 뭐라고 하든지 절대 돌아서지 않으려고 다짐했어. 내가 너의 삶에 정말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걸 알아. 아니, 커다란 부분이 아니라 내가 너의 전부임을 알아. 알기에 더욱 망설였어. 또 널 사랑하기에...
 하지만 혁준아, 내 몸속에 꿈틀대는 '나'라는 존재는 항상 나를 힘들게 했어.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리고 한줄기 틈도 없이 내 마음속에 너를 채워 넣기엔 나의 존재는 너무도 컸나봐. 너의 말대로 처음엔, 내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생각하고 자책도 많이 했어. 그렇지만 나도 인간이기 때문에, '나'를 배제 한 채 너를 생각하기란 불가능한 것이었어. 나에겐 정말 니가 소중하지만 '나'또한 버릴 수가 없어. 이러한 싸움들이 이제는 너무 지쳐 버렸어. 정말 너랑 헤어지고자 결심했어. 니가 울고 불고 매달려도, 난 매정하게 뿌리쳤지.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혹시나 했지만 니가 나로 인해 삶의 의미를 놓아 버릴줄은 몰랐어. 차도 한가운데서 절규하는 너의 목소리를 핸드폰으로 전해 들으며, 나는 다시 너에게 돌아가기로 했어. 이런 식의 결말을 원했던 것은 아니야. 나는 네가 나로부터 벗어나 너의 인생을 찾길 원했어. 처음엔 많이 힘들겠지만 보란듯이 이겨내고 더 잘 살아나가리라 믿었어. 그런데 나 때문에 삶을 포기해 버리다니... 그건 아니잖아. 내 삶을 찾기 위해서 니 삶을 버리라고 할 수는 없잖아.
 나의 아픔을 감추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웃으며 너의 상처를 치유하고, 너는 정말 내가 헤어지자고 했던 말이 별거 아니었다고 믿을 수 있게 되었지만 아픔은 점점 깊이 패여 갔어. 하지만 나는 끝까지 견뎌 내리라고 생각했어. 너의 삶을 지켜 주기 위해서, 사랑하는 너를 위해서.
 나를 희생하려 마음 먹었지만 사실은 그리 쉽지 않았어. 억누르고 또 억누르지만 어느샌가 고개를 쳐드는 나의 삶에 대한 갈망. 하지만 전과 같은 실수는 하지 않겠어. 니가 너의 삶을 포기하도록 하지는 않을거야. 정말 너무나 견딜 수 없게 힘이 들면 그땐, 내가 나의 삶을 완전히 포기할거야. 그것이 너의 사랑에 대한 마지막 보답이야.
 혁준아, 지난 여름 생각나니? 시원한 바다에서 우리 얼마나 행복했었니.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 모두 너무나 좋았지만, 언제나 그 여름 바다가 가장 먼저 생각이 나. 힘이 들 때면 항상 그 때를 생각하곤 해. 푸르른 바다와 우리의 웃음이 함께 어우러지던 눈부신 여름날. 우린 언제나 그 때 처럼 행복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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