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문예상 소설부문 응모작
학술문예상 소설부문 응모작
  • 승인 2003.11.24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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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부러 한 정거장 먼저 내렸다. 텁텁한 차 안 공기 때문인지 머리가 자꾸 아파온다. 버스에
서 내리자마자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한다. 후우. 어지러운 머리 속으로 찬바람 한줄기가 핑 돈다. 코끝이 찡한 찬바람에 저절로 몸이 웅크려진다. 벌써 겨울인가? 두 손을 호주머니 깊숙이 집어넣고서 걷기 시작했다.
 어젯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아무 말이 없던 내게 아버지는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좋은 곳으로 가시게 해 달라고 마음속으로 비는 것이라고 하셨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걷네 받은 엄마는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굳이 내려온 건 없다고 하셨다. 마음만으로 할아버지를 보내면 되는 거라고.
 "고성 하나요."
 평일 오후의 고속 버스 터미널은 한산하다. 표를 끊고, 출발시간까지 나는 차가운 의자에 앉아 자판기 커피 한잔을 뽑아 마셨다. 그러고도 머리가 지끈거려 일부러 밖으로 나왔다. 공기가 차다. 이번 여름에는 그리도 비가 억수같이 내리더니, 가을도 없이 이리 겨울이 오려나 보다.
 어린 시절 한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흘러간단다. 아
이일 때는 어른이 되고 싶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지. 그런데 어른이 되면 시간이 화살 같이 흐르다가, 총알같이 지나가 버려. 눈을 감았다 뜨면 한해가 훌쩍 이야. 그때 아이였던 나는 왠지 선생님의 말씀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시간은 화살과 같은 것. 총알과 같은 것. 정말 나는 어른이 되어 버리고 난 후 화살을 타고 총알을 타고 시간의 강을 건넌다. 어느 순간 나는 발을 헛디뎌 화살에서 미끄러져 우두커니 강가에 앉아 왠지 모르게 아프고 시려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가만히 멍하게 내가 건너온 강을 바라보다가, 다시 돌아온 화살에 몸을 싣는다. 그러면 또 시간은 화살이 되고, 총알이 된다.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의 풍경은 어쩐지 서글프다. 이 곳을 떠나야 하는 서글픔, 배웅하는 자의 얼굴, 돌아서 가는 자의 뒷모습.
 "편안한 여행 되십시요."
 안내멘트와 함께 버스가 출발한다. 톨게이트를 빠져나가고 펼쳐지는 풍경들은 온통 가을빛이다. 나무들은 울긋불긋 단풍잎이 곱게 들었고, 떨어지는 낙엽들도 수북하다. 멀리 산도 붉게 물들었다. 새삼 이 순간 느낀다. 이 시간, 가을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구나. 누군가 계절을 인간의 일생이라 했었던가. 봄은 새싹이고, 아이이고, 여름은 초록이고, 청년이다. 가을은 아쉬움이고, 중년이고, 겨울은 서러움이고, 노년이다.
 외할아버지는 교직생활을 하셨다. 말년에 교장선생님으로 퇴직하셔서,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증조 외할머니가 사시던 집을 다시 개조해서 외할머니와 두분 이서 단조롭게 지내셨다. 외할머니는 가끔 밭에 나가셔서 소일거리로 깻잎이며, 상추며 가꾸셨고, 사람들과 이야기하시는 걸 워낙 좋아하셔서 마실을 자주 다니셨다. 외할아버지는 앞마당에 화분에 꽃을 가득 심으시고, 수조도 만들어 금붕어도 키우시고, 한쪽 벽 가득 덩굴이 뻗어나갈 수 있게 나무막대를 세우셨다. 그리고 귀가 어두우셔서 집안 가득 소리가 울리게끔 위성티비를 틀어놓곤 하셨다.
 어린 시절, 한번은 외할아버지께서 거동이 불편하셨는데도 아파트 계단을 올라올라 우리집에 오셨다. 그때 집에는 동생들과 나 뿐이였다. 할아버지께서는 니네가 보고싶어서 왔다, 하시면서 가만히 쇼파에 앉아 있다 가셨다. 우리가 보고 싶어 오셨다 하셨음에도 우리를 보지는 않으시고, 창 밖만 바라보시다 '이제 간다' 하시곤 다시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셨다. 내가 외갓집에 가도 외할아버지는 '왔나?' 하시곤 외할머니에게 애들 맛있는 거 좀 챙겨주라고 하시고는 늘 앉아 계시는 쇼파에서 일어나 마당으로 나가시곤 하셨다. 그러면 나는 또 가만히 앉아 있다 '할아버지, 갈께요'하면, '오냐'하시고는 뒤돌아서 하시던 일을 하셨다.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엔진의 진동소리만 가득한 버스 안 침묵이 괜히 서럽다.
 나는 3층 건물에 있다. 창가에 앉아 있다. 뭔가가 내 코앞을 휭 스치며 빠른 속도로 지나간
다.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보았다. 그가 서 있다. 야구 방망이를 들고 친구들과 야구를 하고 있다. 그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시리고 코끝이 찡해진다. 고개를 돌려 숨을 가다듬고 있는데, 다시 한번 공이 날아온다. 이번에는 공이 유리창에 맞아 유리창이 깨져버렸다. 자잘해진 유리 파편들이 주위로 흩어진다. 창가에 앉아 있던 내 얼굴에 박힌다. 나는 얼굴이 시리고 따갑다. 꼼꼼히 박혀버린 유리 파편을 어떻게 할 줄 몰라하다 손으로 하나를 빼어본다. 피가 줄줄 흐른다. 피가 줄줄 흐른다.
꿈이다.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단풍을 머금은 나무들이 우루루 스쳐 지나간다. 얼굴에 손
을 가져다 본다. 그러니 마음이 아프다. 시리고 쓰라려 피가 날 것만 같다.

 "그만하자"
 그가 말했다.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려는 찰라 그는 내게 말했다. 우리, 그만하자. 이 사람,
어떻게 이렇게 마음이 변해버렸나? 다른 사랑은 모두 끝나버려도 영원할 것만 같던 내 사랑이 말했다. 그만하자.
 이유는 없었다. 그저 너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아, 라고 그는 말했다. 너는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서 나 보란 듯 이 행복하게 살아야 돼, 그는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끔찍하다. 이런 식의 이별이라니. 나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먼저 가"
 나는 말했다. 먼저 발을 떼고 떠나려는 사람은 그이니까, 그이가 먼저 가야 한다고 생각했
다. 그는 머뭇 머뭇거리더니 먼저 발을 떼고 가 버렸다. 정말 끔찍하다. 이런 식의 이별이라니. 나는 눈물이 났다. 그래서 그 자리에 철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돌아오는 길에 소주를 샀다. 병째 벌컥벌컥 들이키고, 가만히 누워서는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내 고통과 대면했다. 빙글빙글 도는 천정을 바라보며 나는 이런 식의 마음 뭉개짐을, 이런 식의 멈추지 않는 눈물을, 이런 식의 이별을 끔찍해했다.

 "잠시 15분간 휴식을 취하겠습니다. 버스의 위치를 확인하시고 내려주세요."
 커피 한잔을 뽑아들고 자판기 옆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꺼냈다. 그가 떠나가고 나는 담배를 배웠다.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면, 그가 생각나 미칠 때면, 내 서러움을 가득 담아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폐 속 가득 퍼지는 내 그리움의 연기는 코끝으로 서러움이 되어 흩어졌다.
 담배를 처음 배운 그 날은 지독하게 맑은 날 이였다. 새파란 하늘에 구름 한 점없이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던 날 이였다. 버스를 타고 창경궁을 지나는데, 갑자기 내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전 내려본 적이 없는 창경궁 앞 버스정류장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입장권을 사고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입구 한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었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하는 이야기. 그리고 그 여자를 사랑하는 한 남자 이야기. 서로 등을 지고 바라만 보는 이야기. 깊은 슬픈 이야기. 책장 위에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봐도 너무 새파래 눈물이 난다. 저 멀리 궁을 바라봐도 너무 평온해 눈물이 떨어진다. 그렇게 궁을 나와서 혼자 영화를 한 편 보고, 혼자 술을 마셨다. 얼큰하게 취한 나는 길거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에게 전화를 걸고 싶다. 나를 버리지 말아줘. 버튼을 누르다 말고 눈물을 닦는다. 갑자기 바닥의 담배꽁초가 눈에 들어왔다. 편의점에 들어가 담배 한갑을 샀다. 불을 붙이고 담배가 타 들어간다. 입으로 한 모금 천천히 빨아들이고는 기침만 죽어라고 한다. 그리고 또 한 모금, 그리고 또 한 모금. 그러다 세대를 폈다. 담배 연기 속에 그가 보인다. 안녕? 나는 인사를 하고, 히죽 웃는다. 보고싶어. 그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리고 사라져 버렸다.
 나는 반쯤 피우다 만 담배를 식어버린 커피에 집어 넣어버렸다. 그리움의 담배 불씨는 그
자리에서 피익 꺼져 버리고 만다.
 휴게소 편의점에서 물 한통을 사서 버스로 가려는데, 할머니 한 분이 버스들 속에서 두리번거리신다. 그 곁을 지나가려는데, 할머니가 나를 불러 세우신다.
 "학생, 내가 눈이 어두워서 그러는데, 버스가 어딨는지 모르겄네. 좀 찾아줄 수 있수?"
 할머니의 도착지는 땅끝마을 해남이였다. 평일이라 휴게소의 주차장도 버스가 그리 많지가 않아 쉽게 해남행 버스를 찾았다. 고마워, 고마워 하시면서 할머니는 잠깐만 기다리라 하시더니 버스에서 귤 몇 개를 넣은 까만 비닐봉지를 가지고 나오시며 내 손에 건네주신다.
 "버스 안에서 까먹어."
 꾸벅 인사를 하고, 나는 고성행 버스를 찾아 탄다. 버스에 가만히 앉아 나는 땅끝마을을 생
각해 봤다. 나는 입버릇처럼 항상 땅끝마을에 가고 싶어, 라고 말하곤 했었다. 그 곳에서 나는 해 지는 풍경을 보고 싶어. 이 땅의 끝에는 왠지 내가 살던 곳이랑 다를 것만 같아. 소박한 사람들의 행복한 일상들만 가득할 것만 같아. 아픔도 서러움도 없이 어린 왕자 소행성같은 행복한 기억들만 떠오르는 일몰만 가득할 것만 같아. 나이가 든다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늘어가는 것만 같다. 어미 곁을 떠나야 하는 일, 내가 잘할 수 있는 한 가지를 찾아야 하는 일,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하는 일. 할머니가 건네준 매만지다 껍질을 까서 먹는다. 입 안 가득 시큼한 향이 가득 퍼진다.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탔다. 병원에 도착해서는 영안실이라는 팻말을 보고서 들어가지 못
하고 차가운 손만 비벼댔다. 까만 옷을 입은 사람들이 우루루 나온다.
 "경진이 아니가?"
 외삼촌이다. 문상객들에게 배웅을 하고 외삼촌은 다가와 어깨를 두드린다.
 "춥제? 왔으면 바로 들어오지. 들어가자."
 영안실 안은 검은 옷의 사람들로 북적 된다. 술을 건네는 사람들, 음식들을 나르는 사람들,
위로하는 사람들, 그리고 위로 받는 사람들 속에 하얀 소복을 입은 엄마가 있다.
 "왔나? 춥제?"
 부은 눈을 깜빡거리며 엄마는 내게 다가온다.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저 엄마 손을 잡고서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다. 엄마 머리의 하얀 리본이 서글프다. 날다 주저앉은 하얀 나비 같다.
 "외할아버지한테 인사부터 드려라."
 모퉁이를 지나자, 외할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하얀 손수건을 손에 꼭 쥐고서는 고개를 떨구고 계신다. 그리고 외할아버지는 사진 속에 가둬져 계신다. 하얀 머리가 휠씬 줄어든 모습으로 조용히 웃고 계신다.
 "아이고, 경진이 왔나? 내려오느라고 힘들었제? 어여 할아버지한테 인사부터 드려라."
 절을 한다. 쇼파 위의 할아버지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눈물이 가득 고인다.
 "아이고 여보, 경진이가 서울에서 내려왔네예. 지 할아버지 마지막 가는 길 본다고. 아이고, 아이고. 경진이가 내려왔네예. 할아버지 보겠다고..."
 할머니는 통곡하신다. 나는 그 손을 꼬옥 잡아드린다.
"나가서 뭐 좀 먹어라. 배 고프제? 어여 나가봐라."
 나는 바깥으로 나왔다. 할아버지가 아프실 때 즈음, 외갓집에 갔었다. 할아버지는 쇼파에 누워 '왔나?' 하시고는 할머니를 시켜 맛있는 음식을 내어오셨다. 고기도 먹어라, 국도 먹어라, 배도 맛있다, 하시면서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계시다가 당신은 냉동실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으신다. 아프시기 시작한 후로 다른 음식은 입에도 못 대시고, 아이스크림만 드신단다. 큰 숟가락으로 한 입, 두 입 떠서 먹으시더니 그걸로 또 그만이시다. 그리고 할머니께 더 챙겨주라고 하시고는 또 마당으로 나가셔서 꽃에 물을 주신다. 앙상한 나뭇가지 같이 뼈만 남은 듯한 손으로 화분 가득 넘치게 물을 주신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할아버지 모습을 옆에서 힐끔힐끔 훔쳐보다가 목이 메여 밥이 더이상 들어가질 않는다.
 얼마 전에 엄마가 전화를 걸었다. 외할아버지 좋아하시는 일본 과자 사서 좀 보내라고, 그
러면 할아버지가 좋아하실 거라고. 나는 백화점에 들러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일본 과자를
하나 샀다. 그리고는 나중에 보내야지, 편지랑 같이 넣어 보내야지 그렇게 미루고만 있었다.
놓아두고 왔다. 외할아버지가 좋아하실 일본과자. 돌아가시는 길 좋아하는 음식 드시면서 가
시라고 챙겨 두었는데, 책상 위에 올려두고 왔다. 그걸 잊어버리다니.. 찬바람이 휑하니 불
고, 자꾸만 눈물이 난다. 담배 생각이 간절하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
 며칠동안 연락이 되지 않던 그가 검은 양복을 입고 집 앞으로 나타나선 내게 말했다.
 "아버지랑 다른 식구들이 다같이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났는데, 다들 괜찮은데 아버지
만 혼수상태로 있다가 몇 시간 뒤에 돌아가셨어. 병원에 도착해보니 울음바다야. 할머니께 서는 땅바닥을 치며 통곡을 하면서 울고, 어머니는 이미 쓰려지셨어. 아버지는 할머니를
진정시키시고, 고등학생인 동생이 나한테 말해. 형아 우리 이제 어떡해야 하냐고. 그러면서 눈물을 흘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더라. 그냥 어깨만 다독거려줬어. 그러다 아버지 빈소를 혼자 지키고 있었어. 아버지 영정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아버지가 날 보고 살짝 웃는 거야. 영조야, 그러시면서. 나는 네, 아버지 그랬다. 그런데 아버지 눈이 뿌예지더니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진다. 얼굴은 웃으시는데, 눈가로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져. 그러면서 나 이제 어떡하니, 그러셔. 그제서야 나는 눈물이 나더라. 나도 웃으면서 말했어. 아버지, 다 잘 될 거예요."
 그리고는 그는 이제 니가 나를 위로 해줘, 라고 말하며 내 어깨에 기대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래, 내가 너를 위로해 줄께. 나는 그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발인제를 올린다. 곡소리가 시작된다. 아이고, 아이고. 엄마가 운다. 이모도 운다. 아이고, 아이고. 서러워 진다. 아이고, 아이고. 굳이 다른 말하지 않아도 아이고 곡소리 하나만으로 내가 너를 보낼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당신 보내는 것이 너무 힘이 들다. 당신 생각나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늘을 봐야 하나? 당신과 이야기 나누고 싶을 때면 어떻게 하나. 아이고, 아이고.
 할머니가 제일 먼저 절을 하려는 것을 누군가가 막는다.
 "부인은 자식들 다 하고 난 다음에 하는 기다"
 큰 소리로 호통을 치시는 어른에게 할머니는 말씀하신다.
 "내가 우리 영감하고 제일 친한데 왜 내가 먼저 못하는 겁니꺼?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꺼?"
 나도 고개를 끄덕인다. 먼저 가는 할아버지의 눈에 제일 밟혔을 사람은 할머니였을 거다.
이제 혼자 빈집을 지키셔야 하고, 마당 가꾸는 길도 당신 혼자 하셔야 하고, 혼자 밥상에 앉아 안 먹히는 밥을 꾸역꾸역 집어 넣으셔야 할 것이다. 당신 떠나가신 빈자리를 철저하게 느껴야 하실 분이시다.
 어찌되었든 간에 할머니가 먼저는 절대 안 된단다. 할 수없이 할머니는 뒤로 물러나셨다. 엄마와 이모와 삼촌들이 절을 하신다. 아이고, 아이고, 아버지 당신 마음 아프게 한 적 너무 많았습니다. 외할머니께서 절을 하신다. 영감, 이제 당신 없이 나는 어찌 사누. 아이고, 아이고. 큰외숙모, 작은 외숙모 절을 하신다. 아버님, 편안하세요. 아이고, 아이고. 아버지와 이모부가 절을 하신다. 제 손으로 장인어른 해외여행 한번 못 보내드렸네요. 죄송합니다. 아이고, 아이고. 할아버지를 보내는 곡소리가 병원 가득 울려 퍼진다.
 "인자 손녀들 와서 할아버지한테 절해라. 경진이가 나이가 제일 많으니까 할아버지 가시는 길에 술 한번 올려라."
 나는 아버지가 따라주시는 술을 두 손으로 받는다. 향 위로 집에 오셔서는 창 밖만 바라보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시계 방향으로 술잔을 돌리면서, 아이스크림만 드시고 나가시는 당신 뼈만 남으신 몰골에 서러움을 꿀꺽 삼키고 수저를 놓아버리던 내 모습을 생각한다. 아버지에게 잔을 넘기고 뒤로 물러나 절을 한다. 첫 번째 절을 올린다. 한번도 말하지 못했지만, 저는 할아버지를 정말 존경합니다. 서재에 꼽혀져 있던 재직하셨던 학교들의 졸업앨범들을 보는 걸 제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르시죠? 저는 할아버지가 교장 선생님이였단 사실이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 몰라요. 사람들이 교장 선생님 손녀딸이라고 말해줄 때는 참 기분이 좋았어요. 두번째 절. 중학교 때 영어 성적이 자꾸만 떨어지자 술 취하신 아버지는 외갓집에 가셔서 푸념하셨다죠? 이에 퇴직하신 영어 선생님이였던 외할아버지는 그 다음 날부터 저를 불러서 영어 공부를 가르치셨어요. 그런데 저는 하기도 싫고, 할아버지 발음이 구식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하루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만 있었어요. 엄마가 외가집 가라, 그래도 아버지가 외할아버지가 왜 안 오냐고 전화하셨다. 그래도 나는 가기 싫어 죽은 듯이 누워만 있었어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경진이가 하기 싫은가 보네요. 장인어른, 그냥 신경쓰기 마이소. 이제 지가 알아서 하겠지예. 나는 아버지의 기대도 할아버지의 걱정도 다 뿌리치고 싶었어요. 그 뒤로 저는 할아버지의 과외를 받지 않게 되었지만, 늘 그 일이 마음에 결렸어요. 죄송해서, 철없던 제가 당신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서 당신 마음 아프게 해 드린 것 같아 생각날 때마다 죄스런 마음이였어요. 죄송해요. 아이고, 아이고.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서 온 할아버지의 새로운 안식처는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앞으로는
바다가 펼쳐져 있고, 뒤로는 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새들이 노래하고, 나무가 바람 소리를
전해다 줄 것만 같다. 햇빛을 받은 남해 바다는 보석처럼 눈부시게 반짝인다. 바다 내음새가
가득하다. 이런 곳에서 밤낮으로 보내면 외롭지 않겠네, 아프지도 않겠다. 하관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새삼 안심이 되었다.
 외할아버지 묘 바로 옆에 아주 작은 묘 하나가 있다. 아버지는 외할머니의 것이라 했다. 산
자를 위한 묘라니, 어쩐지 서글프기도 하고, 두 분 외롭지 않겠단 생각도 들었다. 할아버지의 묘 주변의 흙을 꾹꾹 밟고 있는데, 햇볕 드는 곳에 구부리고 앉아 자신의 묘를 바라보는 할머니를 보았다. 평생 함께 지내던 벗을 잃은 할머니, 당신 등위에 외할아버지를 업은 듯 일어서도 구부정한 허리가 서러워 발끝에 힘을 가득 담아 꾹꾹 흙을 눌렀다.

 그 날 밤, 나는 일부러 할머니 곁에 자리를 깔아 누웠다. 잠이 쉽게 오질 않는다. 이리 뒤적 저리 뒤적거리는데, 할머니가 잠꼬대를 하신다.
 "영감, 영감"
 할아버지를 찾으시는 할머니의 잠꼬대에 마음이 뒤숭숭하다. 조용히 밖으로 빠져나가 마당
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 한대를 핀다. 혹시나 누가 나올까 몇 모금 빠르게 뱉어내고는 발끝으로 끄고서는 할아버지 화분 속에다 살짝 묻는다.
 "할아버지, 비밀이예요."
마당 가득 할아버지의 흔적들이다. 많이 아프시기 시작한 이후로는 병원에 쭉 계셔서 마당을 돌 볼 수가 없으셨다. 꽃들이 시들어져 있고, 수조에는 금붕어들이 없이 탁한 물만 가득하다.
 덩굴은 없고, 덩굴이 타고 올라가라고 손질해서 만들어 놓은 나무 조각들만 뼈처럼 앙상하다. 조용히 들어와 그대로 이불 속에 쏙 들어왔다. 순간 주무시는 줄 알았던 할머니가 등을 돌리며 중얼거리신다.
 "담배 몸에 해롭다. 끊어라."
 창 밖으로 마주한 달이 참 밝다.

 3일장을 치르고 나는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나이가 듦에 따라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늘어나지만 치유할 수 있는 힘도 함께 길러진다. 무엇을 잃고서는 무언가를 다시 얻을 수 있는 힘을, 나쁜 기억은 추억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을, 누군가를 서서히 잊어갈 수 있는 힘을.
첫눈이 내리던 날, 동기 녀석을 만났다. 술잔을 기울이다 녀석이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낸다.
 "영조가 새 여자친구가 생겼대. 짜식, 너무 빨리 생겼지?"
 그러네, 라고 말하며 술잔을 비운다.
 "새 여자친구? 여자친구면 여자친구지 새 여자친구가 뭐야? 새 엄마같이."
 녀석과 헤어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첫 눈을 맞으며 담뱃불을 붙였다. 새 여자친구? 폐 속 가득 너를 증오한다. 코 끝 가득 너를 미워한다. 새 여자친구? 그만하자, 그는 말하고 나는 돌아섰다. 하지만 나는 너를 계속 그리워하고, 너는 다른 사랑을 시작했구나. 니가 친 9회 말 홈런 공에 내 얼굴은 산산히 부서져 더이상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 할거야. 익숙한 거리에서 마주쳤어도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 할거야. 내 얼굴은 사라져 버렸어.

 겨울방학은 집에 내려와 보냈다. 올 겨울은 내게 유난히 시리다. 방 안에 틀어 박혀 소설책만 줄기차게 읽어댔다. 외할머니의 눈이 아프셔서 함께 병원에 가신다고 나선 엄마가 밖에서 전화를 하셨다.
 "용한 집이 있는데, 엄마 그 집에 점 보러 갈 낀데 나온나. 같이 가자. 그렇게 집에만 틀어 박혀 있지말고"
 따뜻한 남쪽에도 눈이 내리던 아주 추운 날 이였다. 엄마는 외할머니와 함께 나를 기다리고는 눈길을 따라따라 점집을 찾아갔다. 겉보기에 아주 허술한 집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른다.
 평범한 방에 어지러이 놓여져 있는 역학에 관련된 책들과 함께 어느 몸집 좋은 할아버지가 사주를 물으신다. 외할머니는 자신의 사주, 큰아들의 사주, 작은 아들의 사주를 천천히 읊으셨다.
 "할머니, 올해에 이별수가 있었네."
 "맞아예. 이번에 우리 영감이 갔다 아닙니꺼."
 "그 할아버지 할머니 없이는 못 살았던 사람이네? 많이 외롭지예? 둘이 많이 좋아했네."
엄마가 옆에서 거든다.
 "맞아예. 우리 아버지가 처음에 어무이 뒤꼬무니만 쫓아 댕겼어예. 둘이 없이 못 살 정도로
좋아했습니더. 맞네, 맞아."
 몸집 좋은 점술가 할아버지는 외할아버지는 좋게 가셨으니까 이제 좋은 일만 있을 거라고
하셨다. 자식들 일도 이제 잘 풀릴 거라며 외로운 할머니를 위로해주셨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깜짝 놀랐다. 아무 말 없으시다 할머니가 조금만 잘못하셔도 큰소리로 꾸짖으시던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그렇게 쫓아 다니셨다니. 항상 아웅 다웅하시던 두 분이 그렇게 열렬히 사랑하셨다니.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많이 외로워하신다는 엄마의 말에 할머니 눈에 눈물이 고이신다. 할머니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신다. 그리고는 말씀이 없으시다.
 옆에 있던 엄마가 대뜸 말한다.
 "우리 딸이 사궜던 사람이 있는데, 이게 계속 못 잊어 하는거 같은데, 좀 봐주소."
싫다, 아니다, 하는데도 엄마는 막무가내다. 결국 나는 그의 사주를 댔다.
 "아이고, 야야~ 니 그 아가 헤어지기 잘했다. 이 아는 바람기가 다분하다. 그리고 니랑은 아예 인연이 아니구만. 니는 그 아 장난감이였다. 그 아는 니한테 마음이 없었다. 니 갖고 논기 라. 잘했다. 헤어지길 백번 천번 잘했다."
 나는 자꾸만 눈물이 났다. 서럽다. 아프다. 그가 던진 마지막 남은 얼굴의 파편이 떼어졌다.
시리다. 피가 줄줄 흐른다. 엉엉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흐른다. 점쟁이의 한 마디에 내 지나 추억들이 모두 꺽여져 버렸다. 확신했던 행복한 과거의 기억마저도 한 순간에 믿을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 내 지난날의 사랑이 서럽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할아버지 산소에 들렀다. 엄마는 할아버지 묘에 살포시 내려 앉은 눈을 털어 주고, 할아버지께서 좋아하시던 약주도 듬뿍 드린다. 하얀 눈이 바다 위로 스르르 내려 앉는 풍경을 나란히 앉아 바라보던 있던 할머니가 말씀하신다.
 "경진아, 아프나? 안 있나? 넘어져서 피가 나제? 약을 발라. 그런데 약을 발라도 금새 안 낫는 데이. 시간이 가서 그기 아물고 딱지가 떨어지야 낫는기라. 시간이 가야 되는기라. 잉?"

 나는 나이를 한 살 더 먹었고, 더 큰 어른이 되었다. 화살에서 살짝 미끄러진 나는 너무
아팠다. 아파 울면서 나는 내 화살이 돌아와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가기를 바랬다. 나는 어
리석었다. 뒤돌아 볼 수는 있지만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강을 나는 되돌아 갈 수 있길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돌아온 화살은 가던 길만 묵묵히 간다. 그리고 내 눈물은 바람에 날려 나뭇잎의 모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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