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으로 용기와 희망을 소통하다
음식으로 용기와 희망을 소통하다
  • 이연지 기자
  • 승인 2011.12.05 13: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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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북자는 탈북자가 도와야 한다’는 신념으로 이애란 씨(이하 이 씨)는 능라 전통 음식 문화 평생교육원을 세웠다. 성공을 향해 노력하는 탈북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싶다는 이 씨. 그의 모습에는 탈북자로서의 고뇌와 한 아이의 엄마, 여성 지도자로서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도전정신과 열정으로 이뤄진 그의 삶을 들여다 봤다.
 
음식: 남한과 북한의 연결고리
  탈북 여성박사 1호로 알려진 이 씨는 북한 전통 음식 문화 연구원장을 맡고 있다. 남한사람들에 비해 취업정보가 부족한 탈북자들은 정부가 지원하는 소정의 생활보조금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국내에 정착하지 못해 방황하는 탈북자들을 보면서 일자리를 마련해 줄 방도가 무엇이 있을까 고민했다. 이 씨는 “탈북자들이 남한에 와서 일자리를 얻겠다고 하지만 실패하는 경우를 많이 봐왔습니다. 먼저 와서 나름대로 정착한 탈북자로서 나중에 온 이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줘야 겠다고 생각했죠”라며 능라교육원을 개원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경인여대 식품영양조리학과 겸임교수이기도 한 이 씨는 “제 전공이 음식과 관련이 깊은데 음식을 통해 탈북자의 취업을 도울 수 있어서 기쁩니다. 남한에서 유명하다는 북한 음식점을 돌아봤지만 북한 음식 고유의 맛을 간직한 곳이 많지 않았어요. 지금 북한은 식량난을 겪으면서 전통요리의 맥이 끊기고 있습니다. 남한에 온 탈북자들이 그 맥을 이어가길 바랍니다.”고 말했다.

  이 씨는 탈북자들은 물론 북한요리를 배우고 싶은 남한 사람들에게도 문호를 적극 개방하고 있다. “음식은 남과 북이 서로의 문화를 배우고 알아가는 데 가장 좋은 매개체이기도 합니다. 북한 협상단이 남한에 내려왔을 때 옥류관에서와 똑같은 친근한 음식을 제공하고 함경도 등 각 지역의 특산물 요리를 제공하면 회담 분위기도 훨씬 부드러워질 겁니다. 요리를 통해 협상단 마음의 문을 여는 게 꿈이에요.”

  매주 토요일, 이 씨가 운영하는 능라교육원에서는 20여 명의 탈북 청소년들이 모여 함께 밥을 지어먹으며 성경 공부를 한다. “남한 사회에서의 탈북자들은 낭떠러지에 툭 떨어진 기분을 느낍니다. 희망과 위로가 필요합니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열심히 사는 모습을 통해 위로를 받는 것 같아요.” 이처럼 이 씨는 남한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탈북 청소년들과 여성들의 멘토로 물질적·정서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지난해 이 씨는 탈북 여성들의 남한 정착을 도운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국무부가 전 세계 여성 지도자들을 뽑아 수상하는 ‘용기 있는 여성상’을 받았다. “탈북자와 여성의 대표로서 탈북자들의 권익과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앞으로 더 많은 활동을 하라는 의미의 격려라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에 와서 너무 많은 기회와 혜택을 누렸고 큰 상까지 받은 만큼 제 직분에 맞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남과 북 생활
  1964년 평양에서 태어난 이 씨는 11살이 되던 무렵 가족과 함께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는 삼수지역으로 추방됐다. 그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6·25 전쟁 때 월남한 사실이 밝혀진 것. “평균기온이 영하 30도 가까이 되는 삼수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1년 중 6개월을 산 속에 들어가 벌목을 해야 했고 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은 화전을 일구고 감자를 심어서 연명해야 했습니다.” 

  가까스로 유배 생활에서 벗어났지만 ‘월남자 가족’이라는 꼬리표는 계속해서 이 씨 가족을 괴롭혔다고. 출신성분 탓에 식량배급에서 배제되는 것은 물론 취업과 학업에서도 차별을 받았다. 

  이후 또 한 번의 난관이 이 씨를 찾았다. 미국에서 소설가로 활동하던 사촌 여동생이 출간한 소설이 문제였다. 그의 가족을 소재로 이산가족의 아픔을 다룬 이 소설에 실명과 편지 등이 그대로 게재되면서 정치범으로 몰리게 됐다. 결국 1997년 8월 남편에게는 탈북 사실을 알리지 못한 채 4개월 된 아들과 중국, 베트남을 거쳐 남한 땅을 밟았다. 호텔 청소부, 신문배달, 보험 설계사 등의 일을 하면서 보낸 남쪽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과거의 경력이나 능력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상황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기에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지 고충이 심했습니다. 또 당시에는 탈북자들이 많지 않았고 탈북자에 대한 인식도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중국 사람으로 속여 이력서를 제출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2003년 9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북한 관련 강의 요청이 왔고 강의 요청을 계기로 돼 박사학위를 마쳤다.

  이 씨는 한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탈북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하지만 그의 성공은 쉽게 얻은 것이 아니다. 출신성분 탓에 천대받던 북한생활과 탈북자로 겪어야 했던 한국사회의 냉대를 밑거름으로 삼아 일궈낸 결과였다.

남한에서 보내는 제2의 삶
  매년 우리나라로 유입되는 탈북자는 약 3천 명. 현재까지 거의 2만 명의 탈북자가 남한에 입국했고 여성은 이 중 80%를 차지한다. 정부도 탈북자들의 정착을 위해 직업교육을 실시하고 취업을 지원하고 있는 상황. 이 씨는 “남쪽 사람들이 주도해 탈북자를 1대 1로 상대하는 구조이다 보니 효율이 낮습니다. 성공한 탈북자들이 새로 온 탈북자들과 한국사회를 연결해주는 매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부와 시민단체가 측면지원을 계속하되 탈북자가 탈북자의 정착을 돕는 체제로 바꿔나가야 합니다”라며 정부의 탈북 정책에 개선사항을 제안했다.

  이어서 이 씨는 탈북자로서 남한에 산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라고 고백했다. 3·8선이 존재하는 분단 상태이고 학연, 지연, 혈연이 얽혀져 있는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지금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너무 힘들었다고.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대학시절 조리실습을 할 때 믹서나 티스푼 같은 용어조차 못 알아들어 따돌림을 당한 경험도 있어요. 탈북자에 대한 선입견으로 차별도 많이 받았습니다. 처음엔 눈물도 많이 흘렸고 우울증에도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사람은 어려움 속에서 더 많은 지혜를 얻게 되는 것 같아요. 또 차별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며 올해로 남한에서의 생활 14년 차에 접어든 이 씨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내게 필요한 일보다는 세상에 필요한 일을 할 생각입니다. 시민으로서 맡은 일과 본분에 충실하게 살아가면서요.”

  한식의 세계화를 꿈꾸는 이 씨는 “남한에서 전주비빔밥이 대표적이라면 북한은 해주비빔밥이 유명하다”고 말했다. 식재료들이 고루 섞일수록 풍성한 맛을 내는 비빔밥처럼, 앞으로 이 씨가 만들 무수한 음식 속에서 서울과 평양문화가 조화를 이뤄내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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