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경과 매창의 사랑, 도봉산에서 다시 피어나다
유희경과 매창의 사랑, 도봉산에서 다시 피어나다
  • 이은영
  • 승인 2013.03.05 16:1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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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 생태공원 안에는 물 흐르는 소리와 눈 덮인 나무들이 우거진 풍경 사이로 한 시비가 설치돼 있다. 시비에는 유희경(1545~1636)의 <매창을 생각하며>와 매창(1573~1610)의 <이화우 흩뿌릴 제>가 새겨져 있다.

도봉산 생태공원 내에 설치된 유희경과 매창 시비

 

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매창이 지은 <이화우 흩뿌릴 제>다. 매창은 ‘계랑’이라고도 불린 조선시대 유명 기생이다. 그녀는 조선시대 3대 여류시인(황진이, 허난설헌, 이매창)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지금까지 이름을 알리고 있다. 여기에 한 평생 한 사람만을 사랑한 ‘일편단심’ 일화가 전해지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이화우 흩뿌릴 제>의 ‘님’은 바로 유희경이다. 매창이 그토록 사랑한 유희경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유희경은 천민 출신이었으나 당시의 사대부들과 교류한 시인이다. 유명 문인들의 시에 화답하는 등 시에 능통했다. 또한 유희경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관군을 돕자 선조는 “유희경은 오직 의리에 분격하여, 적을 섬멸하려는 뜻을 가졌기 때문에 내가 그를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유희경은 예와 시, 충절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천인이었으나 양반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시를 짓는 것에 능통했던 유희경과 매창

유희경과 매창은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 봄, 부안에서 우연히 만나게 됐다. 술자리에서 서로 시를 주고 받으며 마음을 나눴던 둘은 28살의 나이차가 무색하게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유희경이 상경하면서 짧은 만남은 이별을 맞게 됐다. 그 후 유희경의 소식은 전해지는 바가 없었고 실의에 빠진 매창은 유희경에 대한 그리움을 <이화우 흩뿌릴 제>에 녹여낸 뒤 한 평생 다른 이에게 정을 주지 않고 절개를 지킬 것을 다짐한다.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오동에 비 뿌릴 젠 애가 끊겨라

유희경 또한 매창을 향한 그리움을 <매창을 생각하며>라는 시로 나타냈다. 첫 이별 후 무려 15년의 시간이 흘러 둘은 마침내 재회한다. 매창은 그동안 자신을 찾지 않음을 원망했으나 이도 잠시 뿐, 둘은 부안 시내를 활보하고 변산반도를 구경하러 다녔다. 그러나 이들에게 주어진 사랑의 시간은 열흘뿐이었다. 유희경이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 했기 때문이다. 매창은 유희경이 자신을 서울로 데리고 가주길 바랐으나 유희경은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인 동시에 예를 중시한 사람으로서 기생을 첩으로 데리고 갈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유희경과 매창은 이별을 맞이했다. 기약 없는 이별을 한 유희경과 매창은 매창의 죽음으로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됐다.
유희경은 매창의 죽음을 안 후 망연자실했으며 그녀의 무덤 앞에 가 오열했다.

28살의 나이차를 극복,
짧은 만남이었지만 깊게 사랑한 유희경과 매창

그렇다면 왜 하필 도봉산에 이들의 애절한 사랑이 담긴 시비가 설치된 걸까? 도봉구청 문화관광과 박종민 담당자는 “도봉구와 부안군이 지난해 9월에 우호교류를 맺었다. 이에 서로 연결 된 인물을 찾아보던 중 도봉서원 창건에 도움을 준 유희경과 부안군 출생 이매창이 서로 사랑한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며 “도봉구와 부안군의 교류를 기념하기 위해 서로 그리워 하며 쓴 시를 시비로 만들게 됐다”고 전했다. 도봉구와 유희경의 관계를 덧붙여 설명하자면 1573년 도봉서원 창건 당시 양주목사 남언경을 도와 현장 책임자 역을 수행했으며 도봉산의 산수를 사랑해 말년에 도봉서원 인근에 임장을 짓고 머물렀다. 

유희경과 매창의 사랑이
도봉구와 부안군의 교류에 힘을 더해

이 시비는 우리대학과도 연관이 깊다. 양만기(서양화) 교수가 시비를 디자인했으며 이명찬(국어국문) 교수는 시비에 새겨진 두 시를 감수했다. 양만기 교수는 “단순한 형태에서 갈라진 부분, 즉 사이 공간을 강조했다. 이를 통해 서로 떨어져 있지만 그 마음만은 하나로 묶인다는 점을 나타내고 싶었다”고 시비 디자인의 뜻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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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락 2023-03-18 15:44:36
유희경이 도봉서원 옆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당호를 "침류당"이라 지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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