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뒤에서 현장을 담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카메라 뒤에서 현장을 담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 최아영
  • 승인 2013.11.04 17: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는 수많은 촛불시위에 가서 취재를 하지만 한 번도 촛불을 든 적은 없어요. 그냥 카메라가 촛불이라고 생각하고 약자의 의견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노력해요.” 우연한 기회로 처음 카메라를 잡은 1인 미디어 ‘미디어 몽구’의 김정환 운영자(이하 김 운영자)는 언론인이라는 말이 아직까지 낯설기만 하다고 말한다. 그저 약자들을 위해 일하는 시민운동가로 불리고 싶다는 김 운영자를 만나 시민운동가로서의 그의 삶에 대해 들어봤다.

“저는 수많은 촛불시위에 가서 취재를 하지만 한 번도 촛불을 든 적은 없어요. 그냥 카메라가 촛불이라고 생각하고 약자의 의견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노력해요.” 우연한 기회로 처음 카메라를 잡은 1인 미디어 ‘미디어 몽구’의 김정환 운영자(이하 김 운영자)는 언론인이라는 말이 아직까지 낯설기만 하다고 말한다. 그저 약자들을 위해 일하는 시민운동가로 불리고 싶다는 김 운영자를 만나 시민운동가로서의 그의 삶에 대해 들어봤다.

 

“저는 수많은 촛불시위에 가서 취재를 하지만 한 번도 촛불을 든 적은 없어요. 그냥 카메라가 촛불이라고 생각하고 약자의 의견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노력해요.” 우연한 기회로 처음 카메라를 잡은 1인 미디어 ‘미디어 몽구’의 김정환 운영자(이하 김 운영자)는 언론인이라는 말이 아직까지 낯설기만 하다고 말한다. 그저 약자들을 위해 일하는 시민운동가로 불리고 싶다는 김 운영자를 만나 시민운동가로서의 그의 삶에 대해 들어봤다.

 

 

축구에 미쳤던 20대,
1인 미디어가 되기까지
  “20대까지만 해도 저는 사회, 정치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오로지 축구에만 빠져 블로그를 만들고 암표를 구하러 다니기도 했어요.” 2002년 월드컵, 김 운영자는 다른 사람들처럼 축구에 미쳐 있던 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런 그를 취재의 길로 이끈 것은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사건이었다. “일이 터진 것을 확인하고 집에서 서울대 병원까지 무작정 뛰어갔어요. 5분밖에 안 걸리거든요. 가서 경찰이 막고 있는 것도 찍고 병원 복도도 찍고 최대한 생생하게 사진을 찍었어요. 그러자 그 사진들이 다음 날에 이슈가 돼서 포털사이트 메인 페이지에까지 올라오더라고요.” 이때 김 운영자는 계속해서 취재를 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는 게 좋았어요. 물론 메인 페이지에 실리다 보니 돈도 들어오고요. 그래서 계속해서 취재를 시작하게 된 거죠.”

처음 만든 블로그
순간의 느낌을 담아내다
  마침내 자신의 블로그를 만든 김 운영자는 입양 받은 강아지 이름인 ‘몽구’를 필명으로 쓰게 된다. 취재를 시작했을 당시 정식으로 기자 수업을 받지는 않았지만 휴대전화 카메라가 처음 나와서 그냥 찍기만 하면 됐기 때문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고 말했다. “제 글은 항상 부족하다고 느껴요. 내용도 안 맞고 정리도 안 되고 오타도 많아서 글을 올리고 난 뒤 고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그러나 김 운영자는 최대한 글을 고치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들이 오히려 순간순간의 느낌을 좋아하고 스스로도 그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는 것 같아 그냥 남겨둔다며 오타가 있어도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사실을 담아내기 위한
자신만의 노력
  “저는 현장에 한 시간 정도 먼저 가는 편이에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부분들도 취재를 할 수 있고 의외로 특종기사를 건지는 경우도 많아요.” 김 운영자는 취재에 있어서 남들보다 한 시간 정도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것이 자신만의 철학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대부분 약자의 입장에서 생생한 영상을 담고자 하는 그는 “제가 약자의 입장에서 취재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그저 저는 그들이 처한 현실과 사실을 담아내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들.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또한 사회적인 측면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한 아이의 아버지이며 아저씨의 측면에서 약자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사회적으로 억압이 있을 것 같다는 질문에 김 운영자는 “사회적 억압이 있었으면 지금 활동을 못 하죠. 한 번은 영상 때문에 고소당한 적도 있었어요. 결국에서 무죄 판결이 났죠. 이처럼 영상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억압은 전혀 없어요” 가끔 사람들이 정치색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스스로가 떳떳하기 때문에 상관이 없다며 김 운영자는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늘어나는 관심
변하지 않는 초심
  김 운영자는 최근 많은 관심을 얻게 돼 당황스러운 상황이 있었다고 말했다. “한 번은 시위 현장 취재를 갔는데 시민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어 긴장되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카메라에 붙은 몽구 스티커를 보고 갑자기 ‘몽구’, ‘몽구’ 이러면서 저를 불러서 당황했어요. 그 뒤로 카메라에 몽구 스티커도 안 붙이고 다녀요(웃음).” 요즘에는 높은 인사들을 취재하러 가면 보좌관이 몽구가 취재하고 있다고 알려주기 때문에 오히려 취재하기가 쉬워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저는 그저 카메라 뒤에서 조용히 적고 냉정함을 유지하고자 하는 편이에요. 카메라 속에 내 모습이 나오는 것보다 카메라 뒤에서 그 현장을 담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이처럼 김 운영자는 사람들의 관심이 늘어나도 자신은 달라지지 않는다며 굳은 태도를 보여줬다.

▲김 운영자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한 후원의 밤 현장에서 찍은 사진이다.

 약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한 노력
  김 운영자가 가장 많이 취재를 했던 곳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집회다. “본격적으로 영상을 올리고 취재를 하기로 결심하고 난 후 집을 중심으로 점점 취재 반경을 넓혀 가던 중 일본대사관이 가깝다 보니 자연스럽게 수요 집회에 관심을 가졌어요.” 그는 취재를 다녀 온 뒤 오히려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보다 한국 정부에 원망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할머니들 말로는 그냥 한국 정부가 자신들이 죽기만을 기다린다고 말하시더라고요. 너무 안쓰러웠어요. 그 후 얼마 뒤 이금주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빈소가 너무 조용한 거예요. 그래서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트위터에 글을 올려서 사람들을 모았죠.” 이후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의 빈소에 조화도 보내고 실제 빈소를 찾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마음이 아팠던 사건은 홍익대 청소부 아주머니들이 밥값으로 300원을 받는다며 시위를 한 사건이었어요. 요즘 3,000원을 줘도 밥을 못 먹는데 300원을 주다니 이건 정말 말이 안 되죠.” 김 운영자는 당시 현장에서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약자의 최소한의 인권을 지켜줘야 한다며 자신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결심을 전했다.

미래를 계획하기 전
과거를 돌아보길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김 운영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미래를 계획하기보다 걸어온 길을 보는 편이에요. 내가 걸어온 길에 후회는 없었는지, 충실하지 못했던 것은 없었는지에 집중하고 바꿔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또한 기자에게도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특별히 기계가 좋고 기술적인 부분이 좋은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취재는 이론으로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최대한 현장에 집중하세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도봉구 삼양로144길 33 덕성여자대학교 도서관 402호 덕성여대신문사
  • 대표전화 : 02-901-8551, 8552, 8558
  • 청소년보호책임자 : 고유미
  • 법인명 : 덕성여자대학교
  • 제호 : 덕성여대신문
  • 발행인 : 김건희
  • 주간 : 조연성
  • 편집인 : 고유미
  • 메일 : press@duksung.ac.kr
  • 덕성여대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덕성여대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duksung.ac.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