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회 학술문예상 소설 가작> 마지막 장은 너와 함께
<제39회 학술문예상 소설 가작> 마지막 장은 너와 함께
  • 정아름(아동가족 3)
  • 승인 2013.11.21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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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은 너와 함께

  천원짜리 연습장 한권이 그새 동이 났다. 닳아버린 연습장을 얼마나 보고 있었는지 책상 위로 살짝 걸쳐놓은 팔목이 저려오기 시작한다. 도무지 하고 싶은 일이 새겨지지 않는다. 그저 연습장 마지막 페이지 위 진한선의 타원형으로 가로막혀있는 이름 세 글자만이 눈앞을 떠다닐 뿐이었다. 꼬박 일주일을 여기에 매달리고 있자하니 남은 시간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라는 생각까지 든다. 그러다가 무슨 용기가 났는지 불쑥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조금은 어색하지만 곧 익숙하게 내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숫자를 눌러 나가기 시작했다.
너는 받지 않았다.
나는 너에게 얼마나 큰 상처였을까.
대학은 내게 친구를 사귀고 청춘을 마음껏 즐기는 곳이 아니었다. 나는 그곳에서 꼭 살아남아 성공해야했고 해서 이 지긋지긋한 가난의 사막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즐기고 싶었고 투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세계 어느 한나라에도 그러한 여유는 없었다. 어느 날 갑작스레 찾아온 너 또한 그랬다.

‘연지야, 어쩌지 전장이 어렵겠네. 이번에는 네가 수석이 아니야.’
커다란 돌멩이가 내 머리를 크게 내려치는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장학금 외에 다른 수단으로 등록금을 내 본적이 없었다. 당장에 학교를 그만두거나 쉬어야하는 내일생일대의 최대의 고비가 온 것이었다.
나의 장학금을 야속하게 뺏어간 그 애는 군대를 전역하고 그해 복학했던 나보다 두 학번이 빠른 선배였다.

  삼학년 이 학기 월요일. 그 애는 늘 내 앞자리에 앉는다. 밤새 포스기를 지킨 피로로 누적된 나의 눈에 비친 그 애의 뒷통수는 곧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이라는 신호였다. 그러면 나는 학회 비를 내라며 학기 초부터 나를 지겹게 쫓아다니던 학회장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두툼한 필기노트를 꺼낸다. 그렇게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아홉시부터 열두시까지 연속인 강의를 마치고 나면 나는 곧장 학생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학생식당의 밥은 조금 심심했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했었다. 편의점의 시답잖은 삼각 김밥보다 훨씬 더 값어치 있고 두둑했다. 게다가 어떤 메뉴를 먹더라도 가격은 늘 일정했다. 혼자서 급하게 밥을 먹는 초라한 고학번의 눈으로 갓 입학한 신입생들이 하하 호호 시끄러운 합창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하면 조금 서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딱 삼월 한 달이였다. 그 후로는 모두 나처럼 조용했다. 그렇게 점심을 두둑하게 먹고 나면 어김없이 도서관으로가 필기노트를 훑었다. 그 애는 또 나의 앞자리에 앉는다. 번쩍번쩍 코팅이 된 나의 필기노트 위로 그 애의 뒷통수가 보이기 시작하면 곧 다음 수업이 시작된다는 신호였다. 허겁지겁 강의실로 뛰어가 자리를 잡고 필기노트를 꺼내어 펼쳤다. 그것이 월요일의 마지막 수업이었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나는 또 쉴 틈이 없었다. 그 인간이 또 언제 수지를 건드릴지 모르는 일이였다. 곧장 집으로 달려가 수지를 보살펴야만 했다. 그 인간이 잠잠한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 뒤 나는 또 쉴 틈 없이 학교 앞 편의점으로 향했다. 저녁 일곱 시. 포스기 앞에서 나는 어김없이 코피를 쏟아낸다. 피곤이 쏟아질 때가 없어 코피로 다 쏟아지나보다. 생각했었다. 그렇게 흘러나오는 코피를 막고 꼬박 다섯 시간을 포스기 앞에서 버티고 있노라면 어김없이 친구들과 함께 얼큰하게 술이 취해 편의점에 들어온 그 애는 캔 커피 하나를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면 그제야 나는 아- 화요일이 구나 했다.

  나의 화요일은 술에 취한 그 애의 커피를 계산하는 것으로 시작이 됐다. 그 애는 항상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알 것 같은데. 아마도 나를 본격적으로 알아보기 전까지 그런 비슷한 말을 중얼거렸던 것 같다. 필시 머리가 좋지 않은 사람이리. 그런데 어떻게 나의 장학금을 앗아가 나를 학자금 대출의 노예로 만든 걸까. 나도 같이 속으로 중얼 거렸다. 그렇게 밤새 포스기를 지키다가 새벽 여섯시가 되면 빠르게 집으로 향해야했다. 수지를 학교에 보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수지의 교복을 깨끗하게 다리고 나면 그새 시계는 일곱 시 반을 가리켰다. 나는 학교에 가지 않으려는 수지의 손을 억지로 끌어 잡아 학교정문 앞까지 당겼다. 그러다보면 점심때가 왔다. 학교에 가야했다. 시끌벅적한 강의실 사이로 그 애가 보였다. 그 애는 왠지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원래 남의 세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인데. 이상하게 그 애의 세계가 궁금했다. 즐기고 때로는 투정하고 나는 사실은 그 애의 청춘이 부러웠다. 친구들 틈에서 정신없는 그 애를 보고 있노라면 강의가 다 끝이 났다. 그러면 나는 또 힘겹게 편의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요일에는 지루하고 따분한 조직경제론을 무려 세 시간이나 연속으로 들어야 했다. 소규모인 수업에서 그 애는 항상 내 옆 옆자리에 앉았다. 제법 잘 다듬어진 갈색 머리에 쌍커플 없이 깔끔하게 반달이진 눈, 그렇게 높진 않지만 매끈하게 선이진 콧대와 다부진 손을 가진 그 애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작아지게 했다. 모르겠다. 왜 그랬는지. 왜 슬펐는지. 두 시간째 수업을 듣고 있으면 조금씩 배가 고파왔다. 하지만 저녁끼니를 때울 때 까지 참아야 했다. 간식은 사치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애는 양손에 자신이 매주 월요일 자정마다 편의점에서 구입하는 캔 커피를 꾹 쥐고 강의실에 들어왔다. ‘나 이제 너 기억나.’ 예상 밖에 다부진 말투로 너는 내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조그마한 초코바 하나를 내밀었다. 나에게는 사치품이었다. ‘네.’ 하고 짧게 대답했다. 본능적으로 책상 위 어색하게 놓여 진 초코바에 눈이 갔다. 너는 그런 내 손에 그것을 꼭 쥐어줬었다. ‘끝나고 저녁 같이 먹을래?; 하던 네 목소리가 아른 하게 내 귀를 울렸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일곱 시에 끝이 나는 수업을 마치면 곧장 편의점으로 가야만 한다. 너는 가만히 웃으며 ‘그럼 다음에 먹지 뭐.’ 라고 했다. 그 때 가슴한쪽이 욱신욱신 시려왔다. 나는 내속이 너에게 분노하고 있는 것이라 믿었다. 그땐 그랬다.

  목요일은 강의가 없어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었다. 하지만 아침을 먹고 난 후 도서관에 가기위해 부랴부랴 짐을 챙겨 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은 이상하게 배가 많이 아팠다. 그 전날 먹은 것이라고는 초코바 하나뿐이었는데. 원래 한번 자리 잡고 앉으면 웬만해서는 엉덩이를 띄지 않는 나였다. 그날만은 유일하게 네 번이나 자리를 떴었다.
‘어쩌다 한번 낯익은 얼굴인 것 같다고 말한 것 가지고 징하게도 시켜먹는다. 사실은 나도 편의점에서 계산하다가 본 게 다다. 이것도 친구라고. 그놈의 학회 비. 그냥 포기하지?’ ‘이번이 마지막이다. 한 번만 부탁할게 친구야. 저 여자애 완전 독하다고 삼년 째 블랙리스트야. 신용이 저래가지고 지가 경제는 무슨. 내기했다. 오기로라도 받아내야겠다.’
화장실로 가는 길에 우연히 학회장과 너의 대화를 엿들었었다. 나는 조금 눈치가 빠른 편이다. 그것이 나에 대한 대화란 것쯤은 가뿐히 알 수 있었다. 까짓것. 나는 맹세코 학회 비를 내지 않은 적은 없었다. 그 시기가 조금 느렸을 뿐이지 돈이 구해지면 정직하게 지불했다. 그런데 블랙리스트가, 내기가, 오기가, 어쩌고. 또 가슴이 시큰거렸다. 네가 정말 싫었다. 구역질이 나왔다. 좋다고 입으로 넣은 그 사치품이 발끝에서부터 역류했다. 곧 자리로 돌아와 책을 펼쳤다. 억울하고 분했다. 너를 이기고 말리라. 아마 그날은 어두운 도서관 창밖으로 해가 비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었던 것 같다.

  금요일은 아침 일찍 수업이 시작되는 날 이었다. 목요일이 그나마 아르바이트를 쉬는 날이라 피곤을 해소할 수 있는 날인데 그 일이 있었던 다음날 금요일은 도서관에서 밤을 새버려 그야말로 한 며칠은 굶은 거지 상을 하고 강의실에 앉아있어야만 했다. 좀처럼 수업에 집중할 수도 없었다. 필기노트위로 연필을 잡은 손이 자꾸만 엇나갔다. 조별과제라는 청천벽력 같은 단어가 교수님의 입에서 떨어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나는 조별과제가 정말로 싫었다. 나는 정말 시간이 없는 사람이다. 핑계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조별과제를 하다보면 이러한 이유로 팀원들에게 늘 욕을 들었었다. 이름도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한테 욕을 듣기는 싫었다. 조는 아무렇게나 짜도 된다는 교수님의 이연타가 나의 머리를 툭 하고 쳐왔다. 또 타 과생과 과제를 해야겠구나. 그래 어제 일을 겪어보니 차라리 타과 생이 나을지도 몰라. 생각했었다. ‘교수님 여기요. 이렇게 할게요.’ 네가 별안간 나의 손을 잡고는 소리쳤다. 나는 정말 네가 싫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나를 잡은 네 손이 너무나 따뜻했다. 그렇게 추운 겨울날에도. 너는 정말로 따뜻했었다.

  ‘형 진짜 괴짜야. 복학하고 나서 더 괴짜 됐어. 어떻게 그런 애랑 팀플.’ ‘짜식 하늘같은 선배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너에게 비아냥거리듯 말하는 동기를 보니 그저 헛웃음이 나왔다. 일주일만 기다려라. 꼭 학회 비를 갚을게. 그리고 다시는 너를 보고 싶지 않았다. ‘언제 시간되니?’. ‘제가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기 어려워서요. 메신저에서 만나면 안 될까요.’  ‘그래? 알았어.’ 예상외로 너는 쉽게 나를 이해했었다. 나를 어떻게라도 만나 학회 비를 내라고 닦달 할 줄 알았는데. 혹, 메신저에서 말을 하려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날 밤, 그런 나를 열심히 비웃기라도 하듯 너는 커다란 노트북을 들고 편의점으로 나타났다. ‘괜찮지?’ 하고 웃으면서. 나는 그때 진심으로 네가 술이라도 한잔 하고 온줄 알았었다. 앞뒤 안 재고 남의 일터에 찾아온 그 뻔뻔한 본새가 가히 존경스러웠다. ‘아 출출하네.’ 하고 냉동식품 코너에서 핫바 두개를 가져오는 모습은 더더욱 그랬다. 계산을 해주고 나니 너는 게 중 한 개를 내 앞으로 스윽 내밀었다. ‘보니깐 일곱 시부터 일하던데 밥은 먹고 하는 거야?’ 짜증이 속 깊은 곳으로부터 치밀어 올랐다. 그러면 안 돼지. 수지 동복 맞출 돈. 혹여나 그 인간이 탐낼까 지갑 속 깊숙이 봉투째로 넣어두었던 지난달 월급을 꺼내들었다. ‘이거 가지고 가세요. 원래는 더 빨리 드렸어야 하는 거 아는데 사정이 그랬어요. 그리고 조별 과제. 제가 다할게요. 원래 그랬어요. 물건 사실 때 외에는 여기 다시 찾아오지 마세요.’ 내 봉투를 보더니 너는 무던히도 웃었다. ‘이렇게 많이 필요 없을 텐데’ 하면서. 그러고는 봉투 안에서 주섬주섬 몇 만원을 꺼내더니. ‘고맙다.’ 하고 뒤돌아섰다. 그러더니 ‘너 원래 그래?’ 하고 다시 뒤돌아서 물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하기 싫었다. 너는 또 무던히도 웃더니 편의점을 나섰다. 정확히 사만원이네. 빼간 돈을 세고 있는 나를 보니 나도 어지간히 대단한 사람인 것 같았다. 악착같이 살다보면 부자 되고 거지같이 살다보면 거지된다던데 그건 마치 악착이 아니라 거지같았다. 그날은 그 인간이 어디서 돈이 났는지 술을 잔뜩 마시고는 수지에게 손을 댔다. 수지의 몸 여기저기가 멍투성이였다. ‘언니야, 나는 대학을 지방으로 가야겠다. 아빠 보기 싫다.’ 수지는 또 그렇게 말했다. 측은한 내 동생. 측은한 내 아빠.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요.

  너에게 멋지게 학회 비를 지불한 뒤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피곤한 나날을 보내야했다. 던져놓은 말이 있으니 혼자서 조별과제를 완성해야 했고 수지 동복 맞출 시기가 무섭게 다가오고 있으니 봉투 속에서 네가 빼갔던 사만원을 어떻게든 채워야 했다. 돌이켜보니 그때에 나는 너 좋을 일들만 골라했었던 것 같다. 조별 과제는 어떻게든 완성을 하겠는데 사만원이 문제였다. -총동창회 배 체육대회 아르바이트모집 시급 4200원 8시간 - 마침 아르바이트를 쉬는 토요일에 열리는 체육대회였다. 오래살고 볼일이지 하늘이 나한테 이런 도움도 준다. 생각했다. 그날은 내복을 입고 옷을 몇 겹이나 껴입어도 추운 날씨였다. 체육관에 도착하자마자 받은 임무는 음료수 팔기. 나한테 무슨 기운이라도 있나 단기 아르바이트까지 뭘 파는 거네. 하고 속으로 웃었다. 흰색 아대를 한 다부진 손이 익숙한 모양의 캔 커피를 내밀기 전까지는. 그렇게 웃었다. ‘너 또 그거 먹네. 안 물리냐?’ ‘왜 너도 하나주리?’ 낯익은 목소리의 두 사람이 장난기 서린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그러다가 흰색 아대를 한 네가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대화가 끊겼다. 너는 나를 스윽 한번 보더니 이어 학회장과 함께 자리를 떴다. 모른 척 해준다니 은근히 귀찮았는데. 고마운 일이였다.  ‘쟤 눈빛 봤어? 계집애가 완전 서늘하다니까. 아 학회 비 괜히 받았나?’ 그런데 은근히 또 기분이 나빴다. 그런데 또 학회장이 부러 나 들으라고 내 욕을 해서 기분이 나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애써 기분을 추스르고 열심히 일을 시작하니 평소 안면이 있던 교수님이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열심히 사네. 하시면서 잔돈도 안 받고 그냥 가셨다. 그렇게 정신없이 일을 하다 보니 그새 음료수가 동이 났다. 뻐적지근한 몸을 푸려 기지개를 피자 커다랗게 휘슬소리가 귀 방망이를 쏘아왔다.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팀가루어 농구경기를 하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한참을 정신을 놓고 경기를 보았다. 멋지게 드리블을 하는 너를 두어 번 보고 이리저리 정신없이 뛰는 너를 두어 번 보고나니 경기가 끝이 났다. 순간적으로 나도 스포츠를 잘하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왜 그랬을까.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짐작컨대 그것은 아마도 너에 대한 나의 이면적인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체육대회가 끝이 났다. 급여를 받을 통장 계좌 번호를 적고 집으로 향하려는 발걸음을 교수님이 잡아끌었다. ‘하연지 학생 밥이라도 먹고 가게.’ 수업시간에 워낙 조용해서 티도 안 나는 나를 알아봐 주신 것이 너무나 고마워 거절을 할 수 없었다. ‘자, 우리 경제학과. 올해도 어김없이 일등을 했고. 이렇게 훌륭한 제자들을 둔 스승은 오늘 너무 기쁘다. 오늘 같은 날을 그냥 보낼 수야 없지.’ 교수님의 중후한 축하말씀이 울려 퍼지는 그곳엔 그동안 3년의 긴 대학 생활동안 한 번도 마주하지 못한 경제학도들이 그득했다. 거절을 했었어야만 했다. 거기가 어디라고 감히 따라나서기를 나서. 그날 하루치 좋은 일들이 모두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교수님 양옆으로 앉은 정말 꼴 뵈기 싫은 학회장과 너를 보고 있자하니 더욱더 기분이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대충 앉아 있다가 화장실 가는 척 하고 나가면 아무도 모를 거야. 부어라 마셔라 가만히 앉아 이렇게도 저렇게도 못하는 내 앞으로 소주가 찰랑거리는 잔이 왔다 갔다 했다. 그러다가 ‘ 그래. 재훈이 너는 복학해서 어린후배들 사이에서 수석 하니 양심에 털이 안 났더냐.’ 하는 교수님의 말에 일제히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배알이 꼴렸다. 저이야기가 끝이 나면 반드시 이 자리를 뜨고 말리라. 하고 생각했었다. ‘아이 교수님 이 짜식 이거 양심 군대에 버리고 왔죠. 적당히 해. 적당히. 들어보니 삼년 내내 수석 하던 애가 임마한테 밀려 무지 곤란해졌다던데.’ 학회장이 그렇게 말을 했더니 . ‘하 연지 학생, 분발해야겠네요. 껄껄.’ 하고 교수님이 답했다. 그런 교수님의 말에 수십 명의 시선이 나에게로 떨어졌다. 정말 다시 생각해도 끔찍한 순간이다. 너는 놀란 눈인지 그저 그런 보통의 눈인지 애매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네 앞에서 한없이 작아졌다. 너와 마주친 눈이 한없이 바닥을 향해 내려갔다. 이기고 싶다. 이겨내고 싶다. 머릿속에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다음날 갑자기 뜬금없이 학생지원과 에서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딱 거기까지였었다. ‘학생지원과예요. 이번에 등록금 반액 학자금 대출하셨죠? 근데 전액장학금 받은 학생이 장학금 차석한테 반환하고 싶다고 해서요. 이제 와서 무슨 일인가 싶은데. 학생이 등록금 다 냈음 모를까 학자금 대출받은 내역이 있어서. 학교 오면 방문해 주세요.’ 네가 나를 우습게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원하게 뺨이라도 한 대 쳐야 분노가 가라앉을 것 같았다. 전화를 받고 난 후 당장 학생지원과로 달려가 너와 연락을 취하고 싶다고 했다. 연락처를 받아 다짜고짜 너에게 전화를 건 나는 너에게 여기로 나오라 장소를 통보했고 기다렸다는 듯 네가 약속장소로 나왔다. 그리고 나 또한 기다렸다는 듯 너의 뺨을 시원하게 내리쳤다. 너는 또 기다렸다는 듯 시리도록 붉어진 뺨을 어루만지며 시원하게 웃었다. ‘아. 통했네. 내 작전. 이렇게라도 안하면 절대 안 만나줄 것 같아서.’ 네가 그렇게 말했을 땐 정말 네가 약간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재밌니?’ 하고 말했더니 너는 ‘어허. 어디서 하늘같은 선배한테.’ 하며 능청스레 말했다. 그래 나를 단단히 놀리려고 작정했구나. 말이 안 통하겠다 싶어 뒤를 돌아가려던 순간에 ‘연지야.’ 네가 나를 불러 세웠다. 너무나 추워서 코가 깨질 것 같았었는데 갑자기 온몸에 따스한 기운이 퍼졌다. 그렇게 너는 어느 날 갑자기 내세계로 침범하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원래 그런 사람은 없어. 네가 그렇게 살다보면 그게 원래가 되는 거야.’

이제 마지막이다 하는 심정으로 네 번째로 조금은 어색하지만 익숙한 그 번호를 눌러나가기 시작했다. 달칵. 네가 전화를 받았다.
“아. 전화했었니? 씻고 나오느라 못 받았네. 어쩐 일이야?”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나 그랬듯 담담하게 내 전화를 받았다. 마치 아직도 너와 내가 연인인 사이 인 것처럼. 그렇게 전화를 받았다.

  그 날 이후 나는 너를 피해 다녔었다. 그냥 너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분명히 나쁜 느낌은 아닌데 너를 보면 한 번도 느껴 본적 없는 감정이 가슴 끝에서부터 올라왔다. 나는 자꾸만 욱신거리는 그 감정이 낯설었다. 그 감정과 마주하기 싫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어쩔 수없이 너와 가까이해야하는 날이 있었다. 월요일 자정. 화요일 새벽. 너는 매주 화요일이 시작되면 어김없이 찾아와 낯익은 모양의 캔 커피를 계산대에 올려놓으며 쉴 틈 없이 중얼거렸다. ‘조별과제 다 했니?’ 조별과제를 다 끝내면 다신 내게 말을 걸지 않겠지. 아니, 틀렸다. 그 다음 주에는 ‘과제 혼자서 잘했더라.’ 또 그 다음 주에는 ‘곧 시험이네 열심히 해야지.’ 하고 말했다. 그러면 나는 그때마다 말없이 계산만 했다.

  수요일은 원래 편의점 에서 저녁을 때워야 하지만 그날은 사장님께서 한 시간 늦게 나오라고 지시한 날이었다. 집에 들를까 하다가 늦어질 것 같아 수업이 끝나자마자 곧장 학생식당으로 향했다. 주린 배를 달래려 수저 한가득 밥을 퍼 올렸을 때 낯선 그 감정이 다시 머릿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여기 자리 없지?’ 너였다. 나는 너와 눈이 마주치던 그 순간에 그길로 자리를 옮기려했다. 그런 나를 ‘너는 뭐가 그렇게 어려워?’ 하고 네가 불렀다. 되묻고 싶었다. 그러는 그쪽은 왜 이렇게 어렵고 힘드냐고. 마주치고 싶지 않은데 왜 자꾸만 내 앞에 나타나느냐고. 그렇게 되묻고 싶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 대꾸하지 않기 위해 식판을 들고 자리를 떴다. 그런데 너는 다시 나를 잡았다. ‘그냥 친해지고 싶은데. 그건 안 돼?’ 라고 했다. 그때잠시 다른 세계에 와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친해지고 싶다.? 친한 것이 뭐죠? 조금은 궁금했다. 그것 또한 나에게 사치라는 것을 그 순간에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래도 밥은 먹고 일어서라고 내 팔목을 잡던 너를 뿌리쳤어야했다. 그랬었다면 나는 네게 죄가 되지 않았을 텐데. 나는 후회하고 있다.

  그 이후로 나는 너를 피하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면 부리나케 강의실을 떠나지 않았고 혹시나 네가 말을 걸까봐 수업시작 전에 팔에 쥐가 나도록 엎드려있는 짓도 하지 않았다. 너는 그런 나를 보고 가만히 웃으며 말했다. ‘밥 먹을래?’ 그런데 이상했다. 언제나 혼자였던 내 일상에 같이 겸상하기를 권하는 누군가가 한명이 생겼을 뿐인데 무엇인가 홀가분해졌다. 홀가분해진 ‘무엇’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어색했다. 누군가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주제를 가지고 같은 행동을 취한다는 것이. ‘아, 오늘 점심은 같이 못 먹겠다. 약속이 생겼네.’ 섭섭했다. 섭섭? 이중적인 내 모습이 우스웠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정말 무서운 것이다. ‘뭐야, 너 또 시간 안 돼? 왜?’ 하는 너의 친구들의 원성에 우울해지기도 했다. 내가 너의 일상을 방해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너는 웬만해서는 나와의 점심시간을 깨지 않았다.

“만나고 싶어.”
이 말을 꺼내기까지 입안의 침을 얼마나 삼켜댔는지 곧 혀가 바싹바싹 말라 왔다. 수화기 너머로 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래.”
네가 대답했다.
너와 전화를 끊자마자 옷장에서 꺼내둔 밝은 색 원피스를 집어 들었다.

  그해 겨울은 너무도 추웠다. 스타킹을 몇 겹이나 껴입어도 학교에 도착할 즈음이면 추위에 다리에 감각이 마비될 정도였다. 워낙에 추위를 잘 이겨내는 나였지만 그 겨울의 추위는 정말로 이루 말할 수 없이 나를 괴롭게 했다. 더군다나 편의점은 난방을 난로로 해주었기 때문에 난로가 있는 곳만 따뜻하고 공기는 매우 차가웠다. 그런데 그 춥던 겨울에도 유일하게 따뜻해질 때가 있었다. 점심시간. 지금생각해보면 우습지만 그때 난 학생식당의 난방시스템이 좋아서라고 생각했다.  너는 소소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밥을 먹으면서 누구와 대화해본 적이 없었기에 처음에는 조금 거슬렸다. 하지만 너의 이야기는 항상 재밌었다. 어젯밤 술을 먹다가 집을 잘못 찾아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른 것, 여동생과 집안의 화분을 깨뜨린 것 등 남이 들으면 시시하고 따분한 모든 이야기들을 나는 어지간히 흥미로워했다. 나는 따스하고 재미있는 네가 좋았다. 너의 앞에서 코피를 흘린 날에 하루 종일 내 걱정해주던 네가 나는 너무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너와 있는 것이 괴로웠다. 어렸을 때부터 무언가를 욕심내 본적은 없었다.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욕심내지 않았었다. 그런데 너와 있는 시간이 욕심이 났다. 거의 매일을 점심시간이 좀 더 길어지기를 하고 바랬었다. 부러 밥을 늦게 먹기 시작했다. 너는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밥을 먹다 눈이 마주칠 때면 가만히 웃기만 했다. 안되겠다 싶어 또다시 너를 피해 다녔다. 오늘은 일이 있어요. 속이 안 좋아요. 얼마나 많은 핑계를 댔는지 모른다. 며칠이 지났을까 네가 물었다. ‘내가 불편하니?’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왜 피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네 이야기도 듣고 싶은데.’ 하고 네가 내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내 이야기.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는 것은. 아무 대답 않는 나에게 너는 멋쩍은 듯 웃으며 ‘이거 고백인데.’ 라고 했다. 너는 정말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너무나 춥고 너는 너무나 따뜻했기에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솔직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너는 크게 웃으면서 갑자기 나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더니 ‘잘 봐,’ 하면서 나를 정수기 앞으로 이끌었다. 종이컵에 뜨거운 물을 한가득 받아내더니 ‘앗 뜨거 이거 뜨거워서 만지지도 못해.’ 하면서 이어 그 종이컵에 차가운 물을 다시 받았다. ‘딱 좋다. 섞이니까.’ 하며 웃었다.

“요새 뭐하고 지내 길래 학교에도 안보이고. 일도 그만뒀지?”
오랜만에 보는 너는 여전히 멀끔하고 따스했다. 너는 여전히 나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하고 싶게 했다. 목구멍까지 진심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누르고 대답했다.
“네. 그냥 쉬고 싶어서요.”
커피 잔을 잡는 네 손이 멈칫했다. 네가 웬일이야 하는 눈을 하고 나를 본다.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하고서 너에게 말을 꺼냈다.
“사실은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서요. 그런데 저 길치잖아요.”

  나는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누군가에게 그 인간에 대해 이야기 하게 될 줄은 몰랐었다.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술에 못 이겨 내뱉은 그 이야기가 어찌된 영문인지 너무나 후련했다. 그렇게 편의점 점주의 지독한 구두쇠 정신을 몇 시간동안 이야기하고 조직경제론 교수님의 까다로운 채점방식을 밤새 이야기하다보니 어느 샌가 추운 겨울이가고 따스한 봄이 왔다. 그리고 어느 샌가 나는 남들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수지는 그런 나를 정말 좋아했다. 남자친구가 생긴 거냐며 호들갑을 떨기도 하고 어떤 사람이냐고 만나게 해달라고 졸라 함께 만나기도 했다. 나 역시 그런 내가 싫지 않았다.

  복수전공에 주력을 해야 했던 봄 학기가 시작된 후로는 수업에서 너를 보기 힘들었었다. 대신에 수업이 끝난 후에 도서관 스터디 룸에서 공부를 핑계 삼아 항상 만났다. 그날도 너와 스터디 룸에서 만남을 약속했다. 주구장창 얻어먹은 것이 미안해서 커피라도 사갈 참에 도서관 카페에 들렸었다. ‘아, 나 완전 충격적인 소식 들었어. 재훈이 그 음침이랑 만나는 거 맞아?’ 시끄러운 틈 속에서 너의 이름이 들려왔다. 나의 모든 감각이 그곳에 집중됐다. ‘걔도 군대 갔다 오더니 취향 엄청 독특해졌네. 음침이 정문 편의점에서 일하는 애 맞지?’ 분명 내 이야기였다. ‘그래도 지 취향이 좀 창피하긴 한가 꽁꽁 숨기네.’ 손님, 아메리카노 두잔 나왔습니다. 하는 소리가 두 번이나 내 귀를 스쳤지만 쉽사리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남들 하는 이야기에 별 신경 쓰지 않는 나였지만 남들처럼 살아가다보니 남들이 하는 이야기가 지독하게도 나를 괴롭게 했다. 너를 볼 때마다 카페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너의 머리위로 둥둥 떠다녔다. 그러다가 큰맘을 먹고 밝은 색 원피스를 하나 사 입었었다. 그날 너는 하루 종일 연지 너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 옷이라고 칭찬을 했다. 그날 나는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한테는 안 어울리는 옷 같아. 또 생각했다. 낯설지만 싫지 않은 이 행복들이 어쩐지 내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저번에 왔던 곳인데. 그새 잊어버렸어?”
아니,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또 오고 싶었던 거야. 이 말이 쉽사리 나오질 않는다.
“아, 그랬었나.”
너와 함께 처음 이곳을 여행했을 때 꼭 다시 오리라 생각했었던 곳이다. 자글자글한 몽돌 위로 지는 빨간 빛의 노을이 정말 아름다운 곳. 네가 나를 이곳에 데리고 오기 전까지 바다가 이토록 아름다운 곳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사실은 너를 만나려고 용기를 내기 전에 수지랑 몇 번이고 여기를 왔는지 셀 수가 없다. 그런데 우습게 그때 이곳은 지금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요새 왜 이렇게 바빠?’ 한동안 또다시 너를 피해 다녔다. 너는 예전처럼 내가 너를 피해 다닌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불만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과제 때문에.’ 하고 얼버무리는 나를 보고 너는 ‘수지한테 무슨 일 있는 거야?’ 하고 물었다. ‘과제 때문이라고 말했잖아요. 왜 나를 항상 무슨 일 있는 애로 취급해?’ 너는 적잖게 당황한 눈빛을 하고는 ‘그냥 걱정돼서. 무슨 일 있으면 숨기지마.’ 라고 했다. 순간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는 오빠는 뭘 그렇게 숨기고 다녀요.’ ‘내가? 뭘 숨겨?’ ‘나랑 만나는 거.’ 아차 싶었다. 순간적으로 그런 말을 뱉어낸 내입을 망치로 내려치고 싶을 정도로 창피했다. 너는 나의 심각한 그 말이 크게 웃겼는지 소리까지 내며 크게 웃어댔었다. 몇 분을 한참 웃더니 겨우내 추스르고는 ‘네가 싫어할 것 같아서. 근데….’ 너는 말끝을 흐리더니 다시 크게 웃었다. 다음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면만 있는 동기가 웃으며 물었다. ‘재훈 오빠랑은 언제 만난거야? 우리 다 전혀 모르고 있었어.’ 그 애의 그 말에 기분이 묘했다. 아니 사실 좋았었다.

“수지는 잘 지내?”
수지도 항상 네 안부를 묻는다. 그때마다 나는 대충 얼버무려댔었다. 수지에게 너와 헤어졌다는 말을 하면 정말 슬퍼할 것 같았다. 수지는 그만큼 너를 좋아했다.
“있잖아.”
정말 염치없는 짓이지만 너에게 꼭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너는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다. 수지와 스치듯 한 약속도 마찬가지였다. 놀이동산에 가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수지와 함께 놀이동산을 가주었고 반에서 10등을 하면 데이트에 껴달라는 어리광도 들어줬었다. ‘언니, 나는 대학에 가면 꼭 재훈오빠같은 사람이랑 사귈 거야.’ 수지는 늘 그렇게 말했다.
-언니 아빠가 술 마시고 들어왔어. - 시험공부에 정신이 빼앗겨 수지의 메시지를 보지 못한 나를 원망할 틈도 없이 있는 힘을 다해 집으로 뛰었다. 이번에는 어디에 상처를 냈을까 얼굴만은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거의 부술 듯이 문을 열었었다. ‘왜 벌써와? 오늘 밤샘 공부한다며?’ 그때 내 눈앞에 멀쩡하게 웃고 있는 수지와 그런 수지를 보며 따스하게 웃고 있는 네가 보였다. ‘언니. 내가 불렀어. 무서운데 언니가 연락이 안돼서.’ 온 힘이 다 풀려서 주저앉았다. 고마워. 그때도 말해주지 못했었다.

“오빠 우리 수지 여동생 삼고 싶다했잖아.”
“그랬지. 내 동생이랑은 너무 달라서.”
“내가 허락해줄게.”
“뭐?”
“사실은 부탁 하는 거예요. 수지가 오빠 많이 좋아하잖아요.”
너는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래, 내가 생각해도 너무 뜬금없었다. 하지만 수지는 너를 꼭 만나고 싶었던 이유 중에 일 순위였다. 너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변했네. 연지.”
밤을 알리는 으스름 사이로 너의 말이 나의 귀에 꽂혔다. 곧이어 어둠이 가득 찬 너의 눈이 나의 눈으로 들어온다.
“학교 앞 편의점 저녁7시 목요일하고 토요일 빼고 오는 여자. 알고 보니 우리학교 우리 과 나보다 두 학번 아래 하 연지.”
그랬던가. 순간 꾹 다문 입술 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연지야.”
“응.”
“지금 참 보기 좋다.”


  너를 만나면 만날수록 나는 뭐든지 너를 이기고 싶어 했다. 하물며 조그마한 내기를 하더라도 꼭 이기고 싶어 했다. 학교에서 열리는 퀴즈대회 결승에서 너를 만났을 때 그리고 너에게 졌을 때, 나는 그날 밤 얼굴에서 짠 내가 진동을 하도록 울었었다. ‘열등감’ 이었다.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항상 미안했다. 내가 사랑받지 못해서 너에게 사랑을 주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후부터 매일을 너와 어떻게 헤어지나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가 않았다. 그저 너에게 느끼는 열등을 속으로 삼키고 그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행복을 즐기고 싶었다. 그러다 우연히 만나게 된 너의 여동생은 삼킬 수 없는 고통을 나에게 안겨다 주었다. ‘저희 집 굉장히 평범하고 평화로워요. 저희 오빠 그만 괴롭히세요.’ 나는 너에게 정말 괴로운 존재였을까. 몇 번이나 곱씹으며 밤을 새웠지만 나는 너에게 정말 괴로운 존재였었다. 아빠라는 이유로 딸의 남자친구에게 돈을 구걸하는 아빠를 둔 여자 친구는 너에게 정말 괴로운 존재였으리. 어떻게 해야 헤어지는 것인지 몰라 그만만나요 문자 남겼더니 네가 얼굴보고 이야기 하자고 했다. 널 볼 자신이 없어 보지 않겠다고 했더니 너는 그 길로 나를 찾아왔었다. 솔직하게 이야기 하려고 했었는데 네 얼굴을 보는 순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좋지 않은 추억을 만들어주지 않고 싶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너는 아무말도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 후 나는 너를 보지 못했다. 아니 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네가 내게 남긴 메시지도 아직 열어보지 않고 있다. 아니 못하고 있다.

“왜 날 좋아했어요?”
마지막으로 너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말이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기대고 싶은 감정이 들었고 누군가로 인해 처음으로 행복을 느꼈다. 나에게 그 누군가는 바로 너다. 네가 왜 나를 만나기를 원했는지, 왜 나에 대해 알고 싶었는지 궁금했다. 사실은 나는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찾고 싶다.
“좋아하는데 이유가 어디 있어?”
너는 장난기 어린 웃음을 머금고 나를 보며 이야기했다. 고민하는 눈으로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는 이내 다시 입을 뗐다.
“쉴 곳이 필요해보였어. 처음엔 그 모습이 안쓰럽다가 두 번째로 볼 때는 그 이유가 궁금했고 세 번째로 볼 때는 네 옆에 있어주고 싶었어.”
내가 이곳에 조금 더 머무를 수 있다면 나를 이렇게 잘 알아주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나한테는 없는 너의 모습이 좋았어.”
왠지 알 것 같았다. 나 또한 그 모습이 좋았다. 그래서 자꾸 보게 되고 관찰하게 되고 부러워하게 되고 열등감을 느끼게 되었다.
“너는.”
너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머릿속이 하얘지기 시작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켜 선뜻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너는 그런 나를 보며 짐짓 웃더니 엉덩이를 탈탈 털고 일어났다.
“좋아하는데 이유가 어디 있겠어.”
바보같이 너의 그 말에 웃었다. 너도 가만히 웃었다.
내가 너에게 마지막까지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너를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의 오후였다.
한 번 더 보고 싶다. 떠나야 할 날이 며칠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더 보고 싶다. 너와의 만남이, 그 바닷가가, 그날이 마지막이라고 몇 번을 다짐했는데도 자꾸만 휴대폰으로 손이 갔다. 그리고 어김없이 네 번호가 눌러졌다. 그러다가 내 시선이 차마 열지 못해 남아있는 메시지도착표시로 옮겨졌다. 이걸 보게 되면 너에게 모든 것을 말하게 될 것만 같다. 내가 지금 어떤 고통을 가지고 하루를 살고 있는지 모두 말하게 될 것만 같다. 아,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죠.
몇 시간의 고뇌 끝에 너에 대한 미련으로 떨리는 손이 끝내 메시지 함을 클릭했다.
[연지야. 넌 나를 좋아하기는 했니]

“오빠. 이거요.”
짐 정리를 하다가 나왔다며 수지가 내게 전해준 것은 닳고 닳은 연습장 한권이었다. 너를 보낸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약도 안 먹고 치료도 안 받겠다고 했었어요. 환자가 찾아왔을 때는 이미 손쓸 방법이 없던 상태였으니 공기 좋은 곳에서, 하고 싶은 일하면서 마음 편안히 지내고 싶다던 의견을 존중해줬어요.’ 너에게 편견을 가지고 살지 말라고, 원래라는 것은 없다고 계속해서 말했던 내가 원망스러웠다. 네가 종종 코피를 쏟던 순간이 있었지만 원래 종종 그런다는 네 말에 아, 원래 그렇구나 생각하며 네가 코피를 쏟을 때면 아무렇지 않은 일 인양 그냥 넘겼었다. 완벽한 모순이었다.
뜬금없이 연락이 와서 바닷가에 데리고가달라던 그날에 네가 평소와는 달라 보인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쉬는 동안 많은 것을 정리했구나. 그냥 단순하게 그렇게만 생각했다.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짐을 덜어 낸듯한 그 홀가분했던 모습이 평소 내가 생각해오던 평온한 사람들의 모습이었기에 오히려 그 모습이 보기 좋기까지 했었다. 그 후로부터 일주일후에 뜬금없이 보내온 메시지를 보고서야 네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나는 그때서야 네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위태로웠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황급히 너를 찾아갔지만 당연하게도 너는 그곳에 없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럽다가, 이어 울컥 눈물이 나오려다 다시 들어갔다. 나는 그렇게 너를 보내는 삼일동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정말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순간이 한번 있었다. 사진이 없었다. 너를 기억할만한 사진이 수지에게도, 나에게도. 네가 남겨놓은 모든 흔적들 어디에도 사진이 없었다. 어렵게 학생증 사진을 구해서 너를 보냈다. 그때를 제외하고는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데 수지에게서 건네받은 연습장을 열어볼 용기가 선뜻 나질 않는다. 여태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어렵게 펼친 연습장에 너의 하고 싶은 일 몇 가지가 있다. 하고 싶은 일이 세 가진데 그게 다 나랑 하고 싶은 일이다. 나는 왜 좀 더 너를 알지 못했을까. 끝내 다다른 마지막페이지에 너의 고민에 갇힌 내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오빠 절대 울지 말아주세요. 그럼 오빠한테 정말로 질 것 같아요.- 몇 번이고 굴린 타원 안에 갇힌 내 이름 뒤로 꾹꾹 눌러쓴 너의 글씨가 보인다. 거짓말처럼 눈물이 들어갔다. 네가 마지막으로 내게 보냈던 그 메시지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오빠. 저는 오빠를 정말 좋아했던 것 같아요. 오빠는 정말 저에게 좋은 추억이에요.]

“야. 밥 먹어.”
  밥 때를 알리는 동생의 목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우는 것을 보니 벌써 아침인가보다. 학교를 한두 해 다니는 것도 아닌데 일 교시는 정말 고역이다. 아침 일곱 시의 까슬한 밥을 억지로 집어 삼키고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왠지 가볍다. 정원에 핀 꽃을 보니 완연한 봄이 찾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마주친 갈라진 벽 틈사이로 위태롭게 자라나는 꽃이 가슴 한켠을 난도질하기 시작한다. 네가 미칠 듯이 그리워진다. 한동안은 또 잠을 못자겠다.
연지야. 내가 너에게 그렇듯 너도 나에게 좋은 추억이야. 그리고 나도 너를 정말 많이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아. 잘 지내고 있니?

<제39회 학술문예상 소설 가작 수상소감>

  세상 어딘가에 있을 법한 ‘연지’를 위해서 여름방학 때부터 써내려간 글이 이렇게 당선이 되어 너무나 기쁩니다.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첫사랑과 첫 이별, 낯선 아픔을 처음으로 겪는 21살의 여자를 어떻게 그려야 할지 수십 번을 머릿속에서 고뇌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연지가 되어 나타나 저에게 이렇게 커다란 선물을 안겨줬네요. 감사합니다. 또 항상 저의 글을 애독해주시는 인간사랑 아동가족 유리, 복민지, 지혜, 지나, 다혜, 명보, 이슬, 희경, 하희진, 주희, 수민, 현정, 혜수, 선주, 한배, 지은, 예지 그리고 사랑하는 은샘언니, 다경언니, 이슬언니 등 모두 감사합니다. 늘 날 응원해주는 내 친구들 은지, 성미, 우정, 하나, 지원아 고맙다. 마지막으로 꼬마작가 시절부터 저의 글을 애독해주신 엄마, 아빠 그리고 내 글을 보며 징그러운 글이라며 비웃던 오빠, 새언니, 천사 소현이 고마워요. 많은 힘이 됐습니다. 방법도, 원칙도 모르고 마음 내키는 대로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대로 써내려간 소설을 예쁘게 봐주신 심사위원 교수님께 정말 마지막으로 감사드리며 수상소감 마칩니다. 제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이 겨울 ‘연지’와 같은 따스한 사랑이 찾아오기를, 그리고 그 사랑이 ‘연지’와 같은 결말이 되지 않길 바랍니다. 그리고 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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