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의 서재] 박제된 차미리사가 아닌 우리 삶의 차미리사를 찾아야
[교수님의 서재] 박제된 차미리사가 아닌 우리 삶의 차미리사를 찾아야
  • 장우진 기자
  • 승인 2014.04.15 15: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대학의 설립자인 차미리사 선생. 그러나 그녀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하는 학우가 많다. 이에 창학 94주년 기념일을 맞아 한상권(사학) 교수(이하 한 교수)와 그의 저서인 <차미리사 평전>을 통해 우리대학의 설립자인 차미리사 선생과 우리대학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추천도서인 <차미리사 평전>은 교수님데요.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배경을 듣고 싶습니다. 
1997년 해직됐을 당시 학생들이 자기 일처럼 나를 도와줬다. 학생들의 노력이 내가 부당하게 해직됐다는 결정적인 증거로 작용해 1999년 무사히 복직할 수 있었다. 그때 학생들에게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대학의 역사를 연구하던 중 우연히 그 속에 묻혀있던 차미리사 선생의 존재를 알게 됐다. 당시 우리대학에는 차미리사 선생을 아는 이가 전무했다. 해당 분야 연구자의 도움으로 차미리사 선생에 대한 자료를 모아보니 독립운동도 한 대단한 여성이더라. 이런 사람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안타까워서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추서를 요청했다. 그때 보훈처로부터 차미리사 선생의 업적을 학계에서 검증받아야 추서할 수 있다는 답변을 듣고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했다. 이후 차미리사에 관한 논문을 학계에 투고했고 2002년 보훈처 심사를 통과해 차미리사 선생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됐다. <차미리사 평전>은 우리대학 학생들과 사람들에게 독립운동가 차미리사 선생을 알리고자 논문과 자료를 정리해 발간한 책이다. 우리대학이 독립운동가 차미리사 선생이 설립한 민족사학이라는 보증서 역할을 한다고 봐도 좋다.

  추천도서 <차미리사 평전>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요
  제목 그대로 <차미리사 평전>이기에 차미리사 선생의 일생을 담고 있다. 평전을 읽다 보면 차미리사 선생의 몇 가지 선구자적인 측면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자주성’이다.
  차미리사 선생은 개항 후 조선에 근대문화가 밀려들어 오던 1870년대에 태어났다. 당시 우리 지식인들은 전통질서를 고수하자는 방향과 개방을 통해 근대화하자는 방향으로 갈라졌는데 차미리사 선생은 후자의 흐름을 탔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읜 차미리사 선생은 근대문화의 본고장에서 학습하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을 마친 차미리사 선생은 미국에 의해 배화여고 성경 교사로 파견됐다. 선교사로서 파견한 미국의 의도와 달리 차미리사 선생은 우리나라 여성들을 우리 손으로 가르쳐야 하지 왜 외국인 손에 맡기느냐며 자립을 꿈꿨다. 당시 여성 선각자로 이름이 높았던 사람들도 자신의 힘으로 여성을 교육하기보다는 서양 선교사나 남성 지주의 도움을 얻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런 시기에 자신의 힘으로 자금을 마련해 학교를 세웠다는 것이 그의 탁월한 점이다.

  책 속에는 차미리사 선생이 전국 순회 강연으로 자금을 마련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자금 마련 과정과 이 자금으로 세워진우리대학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당시 모든 여성교육기관은 10, 20대의 적령기 여성만을 교육대상으로 봤다. 그러나 차미리사 선생은 언제나 교육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닌 가정주부를 대상으로 삼았다. 가정주부를 교육해 가정을 계몽시키겠다는 의도였다. 이를 위해 차미리사 선생은 1920년 4월 19일, 조선여자교육회를 발족해 여성야학을 시작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여성에 의한 여성교육의 시작임과 동시에 우리대학의 시작이다.

  차미리사 선생은 교사라는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1921년부터 6명의 여성으로 구성된 강연단과 전국 순회 강연을 하며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여성이 얼굴을 드러내고 외출할 수 없었던 시대에 이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차미리사 선생은 3개월 동안 우리 국토를 세 바퀴 순회하며 여성도 교육받고 깨우쳐야 함을 역설해 각지의 여성들을 감동시켰다. 그 여성들이 기부한 쌈짓돈과 패물로 건물을 세우고 이름을 근화라고 한 것이 우리대학의 뿌리인 근화여학교다. 이처럼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여성의 힘으로 학교를 세운 사례가 이전까지 없었기 때문에 우리대학과 차미리사는 우리나라 민족운동사에서 큰 의미가 있다. 외국인 선교사가 세운 이화여대, 왕실에서 세운 숙명여대, 남성이 세운 동덕여대 등과는 차별화되는 우리대학만의 장점이니 학생들이 자부심을 가졌으면 한다.

  우리대학을 ‘3.1운동 정신을 이어받은 대학’이라고 말하는데요. 이 말이 차미리사 선생의 활동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3.1운동은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 외에도 우리나라 여성 사회참여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차미리사 선생은 3.1운동을 통해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한 여성들을 조직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결과가 앞서 언급한 조선여자교육회다. 조선여자교육회는 같은 해 10월에 조직된 남성 계몽운동단체인 조선교육회보다 먼저 설립됐다.

  우리가 3.1운동하면 흔히 떠올리는 유관순 열사는 이화여대에서 3.1운동의 의미를 독차지하기 위해 발굴한 인물이다. 그런데 우리대학은 3.1운동을 통한 여성 사회진출의 실질적 결과물인 조선여자교육회를 뿌리로 한 대학임에도 많은 학생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또한 3.1운동 정신을 이어받은 민족사학이라는 사실을 대학 홍보에도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창학기념일을 맞아 학우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고구려의 이름을 기억했다. 고대사를 통해 현실을 이겨내는 힘을 재충전한 것이다. 우리대학도 새로운 변화 가치를 창출하는 원동력으로 차미리사 선생을 이용했으면 좋겠다. 인권, 평등, 약자에 대한 섬김 정신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차미리사 선생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차미리사 평전>을 읽을 때 학생들이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 생각들을 실천으로 옮겨 6월 1일 차미리사 선생 기일에 열리는 추도식에 참석하고 대외적으로 차미리사 선생을 알리는 등 자신의 삶 속에서 차미리사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노력하면 좋겠다. 학생들이 그렇게 할 때 차미리사는 비로소 역사 속에 박제된 존재가 아닌 살아있는 차미리사로서 우리 삶을 함께할 것이다.

 

 
 ‘교수님의 서재’
소감을 남겨주세요

 ‘교수님의 서재’를 읽고 4월 30일(수)까지 덕기자 페이스북(www. facebook.com/press.duksung)에 짧은 소감을 남겨주시는 분 중 한 분을 선정해 한상권 교수님의 추천도서 <차미리사 평전>을 선물로 드립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도봉구 삼양로144길 33 덕성여자대학교 도서관 402호 덕성여대신문사
  • 대표전화 : 02-901-8551, 8552, 8558
  • 청소년보호책임자 : 고유미
  • 법인명 : 덕성여자대학교
  • 제호 : 덕성여대신문
  • 발행인 : 김건희
  • 주간 : 조연성
  • 편집인 : 고유미
  • 메일 : press@duksung.ac.kr
  • 덕성여대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덕성여대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duksung.ac.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