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의 꿈 서른아홉의 비행
스물아홉의 꿈 서른아홉의 비행
  • 손민지 기자
  • 승인 2014.05.26 17: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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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정 조종사

사진 / 배예나 수습기자


  “안녕하십니까? 여러분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모실 조은정 기장입니다. Ladies and Gentlemen, This is your Captain speaking!” 기내에 당당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한 후 호텔리어, 대사관 비서 등의 직업을 거쳐 조종사라는 직업에 도착한 조은정 조종사(이하 조 조종사)의 목소리다. 지금도 끝없이 자신의 꿈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조 조종사의 인생에 대해 들어봤다.


 

사진 제공 / 조은정 조종사


  남보다 내가 행복하길 바란다

  어린 시절, 이천의 작은 시골에 살았던 그녀는 유일하게 보고 접할 수 있는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꿈꿨다. 그러나 계속 ‘선생님이 되라’는 가족들의 압박에 반발심이 들어 결국 선생님이라는 꿈을 접고 말았다. 그 후 이렇다 할 꿈이 없었던 조 조종사는 어린 시절부터 재능을 보인 미술을 전공해 산업디자인학과에 진학했다. 재학 중에 건축디자인을 하고 싶다는 꿈이 생긴 조 조종사는 무작정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의 기내식을 만드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밤낮으로 일본어를 공부하다 보니 한국어, 일본어를 능통하게 구사할 수 있었죠.” 이후 그녀는 언어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직업을 꿈꾸기 시작했다. “기내식 회사에서 일하다 보니 스튜어디스를 자주 만났어요. 그래서 스튜어디스에 몇 차례 도전했는데 탈락의 고배를 마셨죠.” 또한 조 조종사는 호텔리어가 되면 자신의 언어를 활용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무작정 서울시내의 특급호텔에 이력서를 돌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노력한 지 1년 만에 그녀는 호텔리어가 됐다. 그러나 호텔리어로 3년을 지낸 후 그녀는 조종사라는 다른 꿈을 꾸기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꿈과 직업을 바꾸는 것에 두려움을 갖는 것 같아요. 다른 직업에 대한 확신도 없고 ‘한 우물이나 제대로 파라’는 주변인과 사회의 훈계가 쏟아지기 때문에 자신의 꿈을 좇을 수 없는 거죠.” 조 조종사 역시 직업을 바꿀 때마다 주변의 좋지 못한 시선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어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하고 싶은 일은 해봐야지! 에라 모르겠다!’라는 생각으로 계속 도전했죠.”

  나도 저 하늘을 날아보자!

  당시에는 남자가 하는 일, 여자가 하는 일에 대한 편견이 심했고 여성 조종사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조 조종사는 조종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쉽게 하지 못했다고 한다. “긴 금발을 휘날리며 호텔을 당당히 들어오는 제니스 스킬라 기장을 보며 ‘여자도 저런 일을 할 수 있구나! 나도 저렇게 멋진 조종사가 돼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체크인을 하는 짧은 시간동안 그녀에게 어떻게 기장이 됐는지, 어디서 공부했는지, 어디서 연습할 수 있는지를 꼬치꼬치 캐물었어요. 당시 그녀가 너무 피곤해 보여서 남은 질문은 체크아웃을 할 때 물어보고자 했는데 그녀의 일정 때문에 결국 볼 수 없었죠.” 이후 조 조종사는 중국 지샹 항공사의 기장이 됐다. 기장이 된 후 그녀는 제니스 스킬라 기장에게 ‘당신을 보고 꿈을 키워 드디어 기장이 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제니스 스킬라 기장은 조 조종사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진 못했지만 계속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스물아홉의 꿈 서른아홉의 비행

  공군부대 안의 에어로클럽에서 비행을 배울 수 있었다는 제니스 스킬라의 말에 조 조종사는 미 공군에서 비행을 배우고자 했다. 그러나 그녀는 출입증이 없어 비행을 배울 수 없었다. 이에 포기하지 않고 조 조종사는 ‘출입증을 받을 수 있는 일을 하면 되잖아?’라는 마음으로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일을 하기로 결심한다. 몇 차례의 지원 끝에 주한미국대사 부부의 관저 비서로 발탁됐다. “서른 살에 조종사라는 꿈은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라며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죠. 그러나 대사 부부만큼은 제 꿈을 열렬히 응원하고 도와줬어요. 대사 부부가 한국에 거주했던 3년간 비서 일과 비행공부를 겸하며 미국의 항공학교로 갈 유학비를 모을 수 있었죠.”

  여자라서 더 잘해야 한다

  이후 조 조종사는 한국을 떠나 미국의 항공학교에서 ‘나탈리’라는 엄격한 여자 비행교관에게 교육을 받았다. 비행을 마치고 하늘에서 내려오면 나탈리의 평가는 무척 혹독했다고 한다. “한 번은 ‘오늘만큼은 꼭 나탈리를 만족시키고 말겠어!’하며 비행을 하고 자신 있게 내려왔는데 여지없이 모진 평가를 받았어요. 칭찬은 단 한 번도 하지 않고 못한 것만 지적하기에 결국 나탈리 앞에서 눈물을 쏟으며 대들고 말았죠. ‘내가 그렇게 못해? 잘하는 게 하나도 없어? 칭찬 좀 해주면 안 돼?’ 그러자 나탈리는 ‘우리 여자들은 남자와 똑같이 해서는 경쟁할 수 없어. 남자보다 더 잘해야 선택될 수 있는 거야!’라고 울면서 말했어요. 여자이기 때문에 남자보다 더 잘해야만 조종사가 될 수 있던 거죠. 그래서 나탈리는 제게 더 혹독하게 대했던 거였어요.”

  중국 최초의 한국 여성 조종사

  미국에서는 비행교관의 경력을 쌓아야 항공사에 지원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항공학교는 이 점을 악용해 적은 임금으로 비행교관을 고용하는데 조 조종사도 적은 임금을 받으며 비행교관으로 일했다. 그녀는 적은 임금 때문에 당시 생활비가 모자랐고 버스 운전 등 아르바이트를 하며 유학비를 충당했다. “힘들게 돈을 모으던 중 중국 항공학교의 비행교관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돈 걱정 없이 비행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중국으로 떠났죠. 처음엔 중국 항공사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비행공부를 하고 중국인들과 인연을 쌓다 보니 중국에서 계속 공부하고 싶었죠. 이후 저는 중국 지샹 항공사의 첫 여성 기장이 됐습니다.”
현재 조 조종사는 중국 지샹 항공사와의 계약 만료 후 이스타 항공의 부기장으로 비행 중이며 계속 그녀의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비누나 나무 등을 조각하는 것보다 찰흙놀이 시간이 더 좋았어요. 조각은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손짓 하나 하나 신경 써야 하죠. 그러나 찰흙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뭉그러뜨리고 다시 만들 수 있어요. 여러분들의 꿈과 미래도 찰흙이었으면 좋겠어요.” 지금의 많은 20대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접은 채 또는 하고 싶은 일이 없어 안정적인 직업 공무원, 회사원 등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에게 조 조종사는 “하고 싶은 일이 없다면 많은 경험을 해보길 바라요”라고 조언했다. “많은 경험을 하다 보면 하고 싶은 일이 생길 수 있거든요.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그 꿈을 향해 달려갔으면 좋겠어요. 직접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과감하게 찰흙처럼 뭉그러뜨리고 다른 꿈을 향해 달려가면 되죠.” 자신의 꿈을 찰흙처럼 빚어낸 조 조종사는 꿈과 미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꿈과 미래는 몇 번이고 자유롭게 뭉개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찰흙놀이’였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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