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맥지수처럼 밥버거지수를 만들고 싶어요
빅맥지수처럼 밥버거지수를 만들고 싶어요
  • 최아영 기자
  • 승인 2014.10.01 12: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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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최아영 기자
  2009년 어느 추운 겨울, 수원의 한 고등학교 앞에서 밥버거를 파는 젊은이가 있었다. 바로 ‘봉구스 밥버거’의 오세린 대표(이하 오 대표)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다섯. 주변 친구들이 대학에 진학할 때 그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어린 나이에 사업에 도전한 오 대표는 17번의 실패를 겪고 18번째 만에 봉구스 밥버거를 만들어 냈다. 자신만의 사업 아이디어로 새로운 사업의 길을 개척한 그를 만나 그의 칠전팔기 인생에 대해 들어봤다.

자퇴와 가출 후
시작하게 된 장사 
  오 대표는 대학 교수인 아버지와 학원 강사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는 학업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대신 어린 시절부터 장사를 하겠다는 말을 자주했다고 한다. “그때 장사를 하겠다고 한 말은 하나의 핑곗거리였던 것 같아요. 사실 고등학교 때 공부를 못했거든요. 중학교 때까지는 우리가 가고 싶은 대학을 선택하지만 고등학교 때는 대학이 우리를 선택하잖아요? 공부를 못해서 대학을 못 가지만 ‘나는 장사할 거니까 대학을 안 가는 거야’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했던 것 같아요.” 이후 그는 자퇴를 결심한다. “자퇴를 했던 건 고3 때였어요. 수능은 다가오는데 자신은 없고 그러니까 결국 도망친 거죠.” 자퇴와 함께 오 대표는 가출을 하고 이후 아무런 계획도 없이 돈을 모아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살아가게 된다. “가출을 한 후에는 먹고살기 바빴어요. 미성년자잖아요. 아르바이트를 해서 얼마나 벌었겠어요. 월세 내고 나면 남는 것도 없었죠. 가출한 후에는 계속 그런 생활이었어요.” 가출을 한 그에게 현실은 그다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다시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후 오 대표는 검정고시를 본 후 대학에 입학한다. “대학에 들어갔지만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어요. 그래서 부모님 몰래 등록금을 빼서 그것을 사업자금으로 썼죠. 당시 400만 원이 넘는 돈이었는데 그 돈으로 첫 사업을 시작하게 됐어요.”

그의 이름 봉구
장사에 첫 발을 내딛다
  장사 밑천을 얻게 된 그는 분식집으로 첫 사업을 시작한다. 이 밖에도 와인, 닭꼬치 등을 팔며 전국을 돌아다니지만 이것 역시 쉽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새로운 사업에 도전해 돈을 많이 잃었지만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 바로 ‘봉구’이다. “오세린이라는 이름은 부르기 어렵잖아요. 그래서 부르기 쉽고 친숙한 이름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봉구라는 가명을 사용하게 됐어요.” 이후 그의 이름은 오봉구가 된다.

  사업 실패를 거듭하던 그는 고향인 수원으로 돌아와 운명처럼 밥버거를 만난다. “처음에는 고등학교 앞에 좌판대를 놓고 밥버거를 팔았어요.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됐는데도 밥버거가 안 팔리는 거예요. 제 성격 자체가 활발하지 못해서 호객행위를 하거나 그러지는 못했어요. 그런 저의 태도도 밥버거가 안 팔리는 데 한 몫 했죠.” “그런데 3일째 되던 날 길을 가는 한 학생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어요. 그 학생이 계속 쳐다보는데 이 눈을 피하면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계속 쳐다봤죠. 그랬더니 학생이 뛰어와서 밥버거가 얼마냐고 물었어요. 그러더니 한 개를 사갔죠. 얼마나 고맙던지.” 밥버거를 처음 팔기 시작했을 당시 그의 부모님들과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를 말렸다고 한다. 심지어 오랫동안 사귀던 여자친구까지 그의 곁을 떠나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그는 “밥버거를 팔던 당시 주변에 제 편이 아무도 없는 것 같았는데 그 학생이 건넨 천 원이 저에게 위로가 됐어요. 천 원을 받는데 눈물이 다 나더라고요. 아마 그때 그 학생은 저를 이상한 사람으로 봤을거예요”라며 웃음을 지었다. 

  이후 그의 밥버거는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한다. 그 당시 하루에 밥버거를 천 개 이상 팔았다는 그는 “점심시간마다 학생들이 밥버거를 먹기 위해 달려왔어요. 바빠도 학생들을 만나고 밥버거가 팔리는 걸 보면 행복했죠”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렇게 매일 찾아온 학생들과 정을 쌓고 장사를 하던 그에게 갑작스럽게 위기가 찾아온다. 학교 측에서 불법 영업을 한다며 그를 쫓아낸 것이다. “1년 만에 장사를 접었어요. 당시에는 엄청 억울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길거리에서 무언가를 판다는 거 자체가 불법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갑자기 장사를 접게 됐던 그에게 힘들지는 않았냐고 묻자 그는 “학생들이 하드보드지에 ‘가지 마요. 봉구’를 써서 창문에 붙여주고 응원 문자를 보내줘서 오히려 저는 힘이 됐어요. 이 당시가 지금까지 사업을 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때예요”라며 아직까지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사진/ 이원영 기자

 

봉구스 밥버거, 그 시작을 알리다
  고등학교 앞에서 쫓겨난 그는 이후 가게를 차려 본격적으로 밥버거를 팔게 된다. 이 가게가 바로 우리가 아는 봉구스 밥버거의 시초이다. “봉구스란 프랑스어로 맛있는 한 입 거리라는 뜻이에요.” 이렇게 밥버거 장사를 시작한 그는 현재 700개가 넘는 프랜차이즈 점을 가지고 있다. 오 대표에게 사업 성공의 비결을 묻자 그는 “좋은 재료, 좋은 위치, 그리고 손님을 대하는 좋은 태도가 비결이 아닐까요?”라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온다. ‘밥버거’가 유명해지자 봉구스 밥버거의 가맹점주로 있던 한 회원이 전수받은 영업 방법과 사업 노하우로 새로운 밥버거 프랜차이즈를 만들고 자신들이 원조라며 소송을 걸어온 것이다. 최근에는 밥버거 아이템과 유사한 체인점들이 들어서기도 했다. 이러한 체인점으로 인해 힘들지 않냐고 묻자 오 대표는 “이런 가게들이 사업을 계속해서 이어가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최근에 점점 가게들이 문을 닫는 추세라고 들었어요. 저희가 메뉴 개발을 잘 하고 회사를 잘 운영하면 이러한 체인점에 흔들리지는 않을 거예요”라고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해외로 시장을
넓혀가는 밥버거
  현재 밥버거는 우리나라를 넘어 중국까지 사업시장을 넓혔다. 오 대표는 “중국이 우리나라와 문화도 비슷해서 다른 나라보다 중국에 밥버거를 알려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리고 중국을 여행한 적이 있는데 그때 중국이라는 나라가 정말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중국에서라면 어떻게든 성공할 것 같았어요. 올해부터 봉구스 밥버거를 중국에 알리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잘 될지는 모르지만 기대가 커요”라고 말했다.

  기자가 그에게 앞으로의 목표를 물었다. 그는 “30대 안에 봉구스 밥버거를 우리나라 기업 30위 안에 들게 하는거예요. 또한 맥도날드처럼 해외에도 봉구스 밥버거가 많이 생기고 빅맥지수처럼 밥버거지수가 생기는 게 꿈입니다”라고 말했다.

  마지막까지 오 대표는 창업을 하고 싶어하는 대학생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창업을 하고 싶다면 해야겠죠.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창업을 해서 돈을 버는 게 대기업에 입사해서 돈을 버는 것보다 더 어려워요. 당장 창업을 하겠다는 학생들에게 ‘모든 걸 다 때려치우고 창업해’라는 말은 못 하겠어요. 제가 겪어온 것처럼 힘든 일이 많을 것 같기 때문이에요. 창업이나 해볼까는 안 돼요. 정말 죽기 살기로 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신중하게 선택하세요!”라며 인터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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