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회 학술문예상 학술 논문 가작>
<제40회 학술문예상 학술 논문 가작>
  • 조연지(심리 4)
  • 승인 2014.11.30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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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 이야기한 자연(Nature)
-윌리엄 컬런 브라이언트(William Cullen Bryant)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본 레포트에서는 동시대 자연 시인으로 칭송받던 윌리엄 컬런 브라이언트(William Cullen Bryant)와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의 비교를 통해 에머슨의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브라이언트는 그 당시 그와의 라이벌은 에머슨과 롱펠로우 뿐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유명한 미국의 시인이다. “미국시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그에게 자연은 인간 혹은 문명의 죄를 씻어주고 치료해주는 자애로운 힘의 원천이었다. 그는 평생을 자연과 친숙하게 지내면서 동식물들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자연의 물상들을 아주 구체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드루이드교도 같은 자연 숭배자였고 대초원에서와 같이, 아메리카 대륙의 광활한 자연에서 펼쳐져 왔고 또 펼쳐갈 미국의 역사를 연민과 희망의 시선으로 담담하게 그려낸 애국시인이었다.” William Cullen Bryant, 김천봉 역, <윌리엄 컬런 브라이언트 = William Cullen Bryant > (파주: 한국학술정보:이담books, 2012), 머리말

 
  에머슨은 대표적인 초절주의자로 문인으로서 철학자로서 뛰어난 강연자로서 미국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널리 추앙받는 작가였다. 그의 강연과 에세이, 시에서 드러나는 그의 초절주의적 정신은 자아에 관한 새로운 정립,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동시대에 살았던 두 작가이고, 또 자연을 사랑했다는 데에서 공통적이지만 브라이언트가 묘사한 자연과 에머슨이 묘사한 자연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각각의 시와 에세이를 비교하면서 차이점을 살펴보고 에머슨의 자연관의 의의를 살펴보자.

THE GROVES were God's first temples. Ere man learned  
To hew the shaft, and lay the architrave,  
And spread the roof above them—ere he framed  
The lofty vault, to gather and roll back  
The sound of anthems; in the darkling wood,          5
Amidst the cool and silence, he knelt down,  
And offered to the Mightiest solemn thanks  
And supplication. For his simple heart

  브라이언트의 시 <A forest hymn>의 첫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그에게 자연은 신의 섭리이자 태초의 것, 인간이 돌아가야 할 것이다. 인간보다 먼저 숲이 있었고, 인간이 신에게 기도를 드리기 전에 숲이 먼저 스스로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These are the gardens of the Desert, these
The unshorn fields, boundless and beautiful,
For which the speech of England has no name—
The Prairies. I behold them for the first,
And my heart swells, while the dilated sight
Takes in the encircling vastness. Lo! they stretch,

  그의 또 다른 시 <The prairies>의 첫 부분에도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경이로움이 잘 나타난다. 대초원이 뻗어있는 모습은 화자의 가슴을 뛰게 만들며 그 광활한 모습에 감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To him who in the love of Nature holds  
Communion with her visible forms, she speaks  
A various language; for his gayer hours  
She has a voice of gladness, and a smile  
And eloquence of beauty, and she glides  
Into his darker musings, with a mild  
And healing sympathy, that steals away  
Their sharpness, ere he is aware. When thoughts  

  그의 가장 유명한 시 <Thanatopsis>는 자연이 갖는 치유의 능력을 보여준다. 자연을 사랑하는 이에게 자연은 즐거운 목소리와 미소와 아름다움을 보이고, 모르는 사이에 아픔을 없애준다고 시인은 이야기하고 있다.

  브라이언트와 달리 에머슨의 자연에 대한 관점은 그의 에세이 <Nature>에서 더 잘 드러나기 때문에 그의 에세이를 중심으로 살펴보았을 때, 에머슨이 브라이언트와 비슷하게 자연을 찬양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약간의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The greatest delight which the fields and woods minister, is the suggestion of an occult relation between man and the vegetable. I am not alone and unacknowledged. They nod to me, and I to them. The waving of the boughs in the storm, is new to me and old. It takes me by surprise, and yet is not unknown. Its effect is like that of a higher thought or a better emotion coming over me, when I deemed I was thinking justly or doing right.
 Yet it is certain that the power to produce this delight, does not reside in nature, but in man, or in a harmony of both.

  자연이 주는 최상의 즐거움은 인간과 식물 사이의 신비스러운 관계에 대한 암시이며 자연의 환희가 자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 속에, 양자의 조화 속에 있다 Ralph Waldo Emerson, 신문수 역, 『자연』,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8, p.23
는 에머슨의 말은 그가 이야기하는 자연이 자연 그 자체가 아닌 인간이 바라보는 자연, 인간 속의 자연을 의미함을 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브라이언트가 자연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자연 그 자체를 찬양한데 반해 에머슨은 자연과 인간사이의 관계를 찬양한 것이다.

Whoever considers the final cause of the world, will discern a multitude of uses that result. They all admit of being thrown into one of the following classes; Commodity; Beauty; Language; and Discipline.

  에머슨은 그의 에세이 <Nature>에서 자연을 네 가지-Commodity(편익), Beauty(아름다움), Language(언어), Discipline(훈련)-로 인간에게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브라이언트의 시에서도 자연이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고, 아름다움을 준다고 이야기하지만 에머슨의 자연을 보는 시선은 조금 더 실용적인 시선에 가깝다.

  자연의 편익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가 예시로 든 것은 자연에 대해 에머슨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케 한다.

"More servants wait on man
Than he'll take notice of." 

Nature, in its ministry to man, is not only the material, but is also the process and the result. All the parts incessantly work into each other's hands for the profit of man. The wind sows the seed; the sun evaporates the sea; the wind blows the vapor to the field; the ice, on the other side of the planet, condenses rain on this; the rain feeds the plant; the plant feeds the animal; and thus the endless circulations of the divine charity nourish man.

  자연은 인간을 nourish 먹여 살리고, 심지어 에머슨은 자연을 인간의 하인이라고 인용하며 자연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무수한 편익과 이익을 주장하고 있다. 이어 에머슨은 자연의 혜택들을 인간의 지혜로 재생산하거나 새롭게 결합시킨 문명의 이기(증기, 선로, 화차)가 예술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브라이언트가 생각하는 자연관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And shot towards heaven. The century-living crow,   30
Whose birth was in their tops, grew old and died  
Among their branches, till, at last, they stood,  
As now they stand, massy, and tall, and dark,  
Fit shrine for humble worshipper to hold  
Communion with his Maker. These dim vaults,   35
These winding aisles, of human pomp or pride  
Report not. No fantastic carvings show  
The boast of our vain race to change the form  
Of thy fair works. But thou art here—thou fill'st  
The solitude. Thou art in the soft winds   40

  브라이언트는 <A forest hymn>에서 신이 만든 자연의 형상이 인간의 허세와 오만에 대해 말하지 않고 하찮은 인간이라는 종족의 자만이 깃든 조각물도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자연에 반하고, 자연을 이용해서 무언가를 세우려하는 인간을 비판한다. 그의 이런 비판적인 태도는 <An indian at the burial place of his fathers>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But I behold a fearful sign,
To which the white men's eyes are blind;
Their race may vanish hence, like mine,
And leave no trace behind,
Save ruins o'er the region spread,
And the white stones above the dead.

Before these fields were shorn and tilled,
Full to the brim our rivers flowed;
The melody of waters filled
The fresh and boundless wood;
And torrents dashed and rivulets played,
And fountains spouted in the shade.

Those grateful sounds are heard no more,
The springs are silent in the sun;
The rivers, by the blackened shore,
With lessening current run;
The realm our tribes are crushed to get
May be a barren desert yet.

  개발로 자연을 훼손하고 인디언들의 터전을 짓밟는 백인들에 대한 이 시는 “그러나 내게는 또 두려운 징후가 보인다. (중략) 그 기분 좋은 소리들은 더는 안 들리고, 샘들도 햇살 속에서 말을 잃었다. 강들도 검게 물든 기슭 따라서 점점 줄어드는 물결로 흘러가고, 우리 부족들을 짓밟아 빼앗은 영토도 조만간 황량한 사막이 되고 말리라” William Cullen Bryant, 김천봉 역, <윌리엄 컬런 브라이언트 = William Cullen Bryant > (파주: 한국학술정보:이담books, 2012)
라고 백인들의 자연 파괴와 기만에 대해 우려하고 경고하고 있다.

  아무래도 자연에 대해서 에머슨은 좀 더 철학적으로, 전통적인 서양의 자연관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브라이언트는 자연 그 자체의 소중함을 알고, 인디언들이 자연을 보는 태도와 비슷한 관점에서 자연을 바라본 듯하다.
 하지만 에머슨이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자연이 자연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이 현전할 때에 아름다운 것-은 분명 그가 <Nature> 서장에서도 말했듯 우주와 자연에 대한 독특한 관계를 정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봤듯 브라이언트가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광활한 초원의 아름다움, 굽이치는 강물의 아름다움을 논한데 비해 에머슨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아름다움을 밝혀내고자 했다. 이는 <Nature>의 후반부인 <Beauty>, <Language>, <Discipline>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연이 아무리 그 자체로 빛을 내뿜어도 그걸 바라보는 인간이 자연을 바라볼 능력이 없으면 볼 수가 없다. 자연이 주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가는 것은 인간의 능력인 것이다. 이런 관계 속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것은 분명 에머슨 이전의 작가들은 하지 못했던 일이다. 자연을 찬양하는 시를 쓸 때 보통은 자연에 초점을 맞춰 쓴 반면 에머슨은 자연을 바라보는 것은 인간의 눈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는 자연에 자신의 감정을 투영하는 것과는 다르다. 에머슨의 자연관에서 주체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동시대 작가였던 윌리엄 컬런 브라이언트와 랄프 왈도 에머슨의 비교를 통해 에머슨의 자연관을 알아보았다. 정리하자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양했다는 점에서는 두 작가 사이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겠지만 작품을 분석하면서 살펴보니 브라이언트가 자연파괴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갖고 있던 것에 비해 에머슨은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물익, 그리고 그로부터 만들어내는 인간의 문명의 이기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브라이언트가 자연을 신과 동일시하고, 자연의 아름다움만을 이야기한 것에 비해 에머슨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이야기하며 새로운 인간관, 주체적인 인간관을 정립하려 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마지막으로 두 작가의 사회적인 행보를 살펴보자면 에머슨은 초절주의를 주창하면서 수차례 강연을 하고, 주체적인 인간상을 만들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실제적으로 행동으로 취한 것은 사뭇 달랐다. 에머슨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에머슨의 현실과 동떨어진 주장이 사실상 국가적 위기를 외면했던 기회주의적인 백인 남성을 합리화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초절주의 사상이 ‘인종’과 ‘성’이라는 구체적인 개념을 ‘개인’이라는 보편적인 단어로 ‘추상화’(abstraction)하여 이와 관련된 사회문제들을 단순한 ‘일반적인 윤리문제’로 탈바꿈해버리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 사상의 틀로는 구체적인 사회모순을 인식하지 못하고 외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김은형, 「랠프 월도 에머슨의 초월주의의 사회적 성과와 한계」, 『안과밖』, 제26호, 영미문학연구회. 2009, p.342
 
  반면 브라이언트는 여러 논설을 통해서 개방무역 노동자의 권리 언론의 자유 노예제도폐지를 역설 옹호하고 국제 저작권 유급소방서 염가우편보급 등을 제안하거나 지지했으며 뉴욕 센트럴파크 메트로폴리탄미술관과 뉴욕메디컬컬리지의 구상과 설립에도 크게 기여한 인물이었다. 또한 노동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투사로서, 노조 결성에도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William Cullen Bryant, 김천봉 역, <윌리엄 컬런 브라이언트 = William Cullen Bryant > (파주: 한국학술정보:이담books, 2012), 머리말
 
  하지만 에머슨은 인식의 힘, 자아의 힘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한 미국 작가였고, 그 이후로 다른 미국의 작가들이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그는 미국 문학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작가임에는 분명하다.

<제40회 학술문예상 학술 논문 수상소감>
  1학년 말 저는 졸업하기 전 학교신문에 내 이름을 올려야겠다고 작은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4학년 1학기에 가작이라는 작은 이름을 올리게 됐지만 저는 이 상을 통해 제 부족함을 더 많이 깨닫게 됐습니다. ‘가작’이라는 그릇에 담기에도 제 글은 미미한 용량입니다. 동시대의 두 작가를 제 마음대로 가져다놓고 작품 몇 개만으로 비교하는 것은 그 작가들에게도 죄송한 일이고 쓰는 동안 스스로도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부족한 글 덕분에 랄프 왈도 에머슨이라는 작가가 단순히 미국문학사 전공 책에서 ‘어디서 한번 본’ 사람이 아닌 그래도 어떻게든 붙잡고 씨름해본 작가가 됐습니다. 그리고 그 어떻게든 씨름해본 결과로 이 상을 주신 데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두 교수님께 남은 지면을 빌어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정혜옥 교수님, 1학년 때 교수님께서 제게 영문학이라는 길이 있다는 걸 알려주셨기에 저는 책 속에서 다른 세상을 보게 됐습니다. 교수님께서 보내주신 문자의 하트가 제겐 용기의 물약이었습니다. 항상 부족한 모습임에도 조언해주시고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정민 교수님, 교수님께서 세미나 때마다 보여주시는 생각들은 제게 책의 또 다른 한 페이지가 돼 다가옵니다. 그런 페이지들이 쌓이고 쌓여 제가 책 속을 여행하는 데 필요한 지도가 됩니다. 먼저 밟혀있는 발자국을 보면 다음 걸음을 내딛을 용기가 솟아오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학술문예상을 준비하느라 그리고 창간호를 준비하느라 수고하신 덕성여대신문 관계자분들께도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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