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런 덕성의 어머니, 차미리사
자랑스런 덕성의 어머니, 차미리사
  • 이은영 기자
  • 승인 2004.04.12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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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적인 여성 차미리사
차미리사 선생은 시대를 앞서 독립적인 여성상을 추구해왔다. 또 남다른 모험과 의지를 가지고 해외 유학을 하고 민족운동과 여성교육 운동에 헌신하였다. 아마도 이것은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아버지의 교육 때문이 아니었을까? 선생의 아버지는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자아를 상실하지 않는 독립적인 삶을 살도록 강한 정신력을 심어 주었다. 선생은 평소 학생들에게 "기생충 노릇은 하지말고 약자란 소리를 듣지 말아라. 남자의 덧부치가 되지 말라."라고 당부했다. 남편의 운명이 곧 여성의 운명이었던 그 시절, 차미리사 선생은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과감히 떨쳐버렸다. 남편과 사별 후 선생은 절망하기보다는 기독교로 종교를 개종한 뒤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을 결심했다. 그러던 중 여성독립운동가였던 조신성 여사를 상동예배당에서 만나 미국으로 유학 갈 것을 권유받고 해외 유학을 결심한다. 유학 자금이 부족했던 선생은 지인의 도움을 받아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 인천에서 상해로 가는 중국배에 오르면서 선생은 여성여방을 상징하듯 여성의 얼굴을 가리던 장옷을 벗어버렸다. 1900년 중국 소주에 있는 소학교 증서학원에 입학하고 학업에 매진하다 뇌 신경병에 걸려 후유증으로 귀까지 어둡게 되었다. 하지만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1904년 미국 칸사스시 스캐리트 신학교에 입학했다.
■사회 속의 여성 차미리사
미국에서 공부 할 당시 선생은 중국에서와는 달리 학업매진보다는 많은 사회 활동을 하였다. 이 때야 말로 사회를 향한 선생의 열정이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라 생각된다. 미국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인 1905년 미국 파사디나에서 교육구국을 목적으로 조직한 대동 교육회와 대동 보국회에 발기인으로 참여 활동하여 투철한 애국정신을 피력하고 '대동공보' 간행에 참여하여 교포들의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평소 교육 구국을 염원하고 계획하였던 선생은 대동교육회의 목적과 정신이 자신의 뜻과 부합한다고 믿어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던 것이다. 또 미국 내 최초의 교포 부인 단체인 '한국 부인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평안도 선천에 설립한 대동고아원에 적극적인 지원사업도 벌였다.
■애국적인 여성 차미리사
선생이 대동공보 발행에 참여하던 당시 선생은 높은 지적 수중과 뜨거운 애국심을 가지고 대동보국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대동공보 제 7호 (1907년11월 4일)에는 ‘상제를 믿고 나라를 위할 일’이라는 논문을 기재하여 동포들에게 애국심을 호소했다. 논설에서 선생은 ‘……(중략) 우리 이천만 동포는 어서 속히 정신을 차려 이 대에 선을 행하며 살신구국하여 망한 국권을 회복하여 이천만 동포를 구하는 선과 내 한 몸 사는 사사정욕과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을 취하냐뇨. …… (중략) 애국하는 형제자매에게 청컨대 우리의 붉은 피로 대한제국의 독립을 찾아 대대손손에 빛내기를 축수하고 바라나이다.’라고 적었다.
1910년 '한일합방'이후 선생은 외국에 가서 있느니보다는 차라리 고국에 돌아와서 여러 동지들과 청년여성교육을 통해 우리의 실력을 높이겠다는 의지로 귀국하였다. 그 후 약 8년 동안 배화학당 사감으로 재직하면서 여학생들에게 애국·애족·독립정신 사상을 주입했다. 1933년 민족교육운동가 남궁억 선생과 함께 '무궁화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기도 하였다. 선생의 애국적인 독립운동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에서 2002년 8월 15일 무궁화 훈장을 수상하였다.
■여성 교육의 선구자 차미리사
선생은 배화학당 재직 당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진작시키는 교육을 행하면서 한편으로는 여성 스스로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구태의연한 사고와 생활을 벗어나게 하는 적극적인 여성교육을 행하였다. 그 후 선생은 소외받는 여성에 대한 교육을 위해 배화학당을 그만둔 뒤 '여자야학강습소'를 설치, 여성을 대상으로 한 문맹퇴치와 계몽운동에 헌신한다. 1920년 4월 교육운동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기 위하여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하고, 이듬해 순회 여자강연단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계몽강연을 실시한다. 이때 4개월 간 73개소에서 여성교육의 중요성, 생활개조, 여성해방, 남녀평등 사상 등을 일깨웠으며, 1921년 10월 강연회에서 얻은 찬조금으로 '근화여학교'를 설립,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선생은 근화여학교의 교훈으로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라고 정했다. 선생은 자금을 모으기 위해 강연회·음악회·연극회·바자회 등을 개최하였으며 총독부는 물론 외국인 선교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고 자력으로 학교를 발전시켰다. 학교의 설립 자금은 당시 교육적으로 소외 받고 있던 여성들이 5원, 10원 같이 기부금을 품앗이로 모아 마련한 것이었다. 1934년 2월 안국동에 재단법인 '근화여학교'를 설립하여 재단이사장을 역임한 후 선생은 여성이 독립적으로 생활하기 위해서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여 '근화여자실업학교'로 확대·개편한다. 선생은 같은 해 2월 11일 매일신보와의 인터뷰에서 "4월 신학기부터는 실업학교로서의 생도를 모집하게 되었는데 물론 그 교육 방침은 조선여자들의 실제생활에 필요한 실업교육입니다."라고 말했다. 한편 '근화'라는 명칭이 무궁화를 상징한다는 일제의 간섭에 교명을 '덕성학원'으로 바꾸게 된다. 광복이 되자 선생은 그동안 계획하여온 여성고등교육기관 설립을 추진, 1950년 '덕성여자초급대학'(현 본교)을 설립한다. '덕성여자초급대학'의 설립은 우리 나라 여성에 의해서 세워진 최초의 고등여성 교육 기관인 동시에 차미리사 선생과 수많은 여성들의 힘으로 이루어진 자주적 여성 역사의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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